전국의 어린이들이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기대한 크리스마스 이브. 선물 배달을 책임질 루돌프 사슴들이 난데 없는 파업에 돌입했다. 지난 24일 오전 2시쯤 루돌프노동조합은 사측인 산타연맹에게 노동법을 준수하고 우는 아이까지 모두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 선물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년 만에 대목을 맞이한 전국산타연맹은 즉각 루돌프노조의 파업을 규탄했다. 루돌프들의 파업 때문에 고객인 어린이들은 물론 주식회사 산타코리아에 소속된 다른 근로자인 순록과 엘프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 노사갈등의 풍경은 사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의 루돌프노동조합 및 전국산타연맹 페이지가 지난 성탄절 연휴 동안 벌인 일종의 온라인 역할극이다. 두 페이지를 운영한 청년들은 2017년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이 가상 파업을 통해 화려한 크리스마스 뒤에 가려진 현실을 환기하고자 했다.
‘무늬만 사장’인 2017년의 루돌프
파업 선언 속 루돌프는 4대보험 없이 일한다. 2017년의 여느 택배근로자와 마찬가지로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근로계약이 아닌 용역ㆍ도급형태로 계약을 맺어서 형식적으로는 개인사업자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사용자들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과도한 업무 탓에 매년 코의 이상발광 현상과 낙상사고, 추락사고로 다치는 루돌프가 수천인데도 산타들은 이들이 노동자가 아닌 사업자라며 노조의 단체교섭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루돌프노조 페이지를 운영한 직장인 가브리엘(24ㆍ가명)씨는 “지난달 3일 고용노동부가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을 인정한 것을 보고 파업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택배연대노조는 법적으로 인정된 첫 전국단위 특수고용직 노조다. 그는 “노동자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가브리엘씨가 크리스마스 전야에 파업을 기획한 것도 파업을 통해 사측은 물론 소비자들이 곤란해지는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서다. 그는 “루돌프들의 파업으로 어린이들이 실망하겠지만 그만큼 사용자인 산타가 협상에 나설 요인이 더 커진다”고 설명했다. 또 “파업으로 소비자에 부득이하게 불편을 주는 노동자들 역시 미안한 마음이어서 파업사유에 보편적 선물권이라는 더 큰 명분을 넣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무책임한 파업’ 지적하는 산타
루돌프들의 파업 선언에 전국산타연맹 측은 사전 대체인력 투입 계획까지 세워가며 강경한 대응을 했다. 산타측은 ‘주식회사 산타코리아에 소속된 인원인 순록과 엘프에 비하면 크리스마스에만 배달하는 루돌프들의 노동시간이 지극히 적다’고 지적했다. 페이지를 기획한 대학생인 니콜라이(24ㆍ가명)씨는 “현실에서 기업들은 ‘노조 이익을 위해 고객 이익을 볼모로 내세운다’는 논리로 파업에 대응한다”며 “노조의 신용도를 떨어뜨리거나 정규직 비정규직간의 분열로 파업을 약화시키려는 사측의 행동을 루돌프와 순록, 엘프를 구분하는 것으로 풍자했다”라고 설명했다.
니콜라이씨는 “우연히 루돌프노조 페이지를 본 뒤 현실에 대한 재밌는 패러디라고 생각해 산타연맹 페이지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역할극에 동참한 건 그 뿐만이 아니다. 네티즌들은 댓글을 통해 ‘루돌프가 루돌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며 파업을 지지하거나, ‘루돌프 파업 영세 산타들만 직격탄’ 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실제 파업 발생시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반응들이다. 가브리엘씨는 “많은 사람들이 이번 가상파업을 웃기지만 슬픈 현실로 공감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이런 논의들을 즐겨야 합니다”
루돌프노조의 파업은 이틀 만에 끝났다. 사측인 산타연맹이 파업 하루 만에 협상에 나섰기 때문이다. 25일 오후에 발표된 산타연맹과 루돌프노조의 파업 중단 합의 내용에 ‘파견 루돌프와 엘프, 순록 등 노동자 전원의 정규직화’, ‘루돌프 야간노동 철폐’ 등이 들어갔다. 매년 밤샘근무에 시달리던 루돌프들은 이제 낮에 선물을 배송할 수 있게 됐다.
실제 파업이 수십, 수백일 넘게 이어지면서 노사가 합의를 도출하기 쉽지 않은 현실에 비춰보면 이들의 해피엔딩은 비현실적이다. 니콜라이씨는 “노사간의 갈등과 이를 넘어 우리 사회의 갈등이 이처럼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빠르게 결론을 지었다”라고 설명했다.
크리스마스 놀이는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기획자들은 실제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이번처럼 논의를 즐겼으면 한다고 전했다. 니콜라이씨는 “우리는 현실 분쟁이 발생하면 사측이나 노조 양 측의 입장을 자세히 살피기 보다 그저 비난한다”며 “이번처럼 실제로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논의한다면 그 과정 자체가 우리 사회의 진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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