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장터 수제막걸리 맛보고…
신학대학 제적, 뒤늦게 술 배워...
꽃집 불안해 밤에 술 팔다가...
작고 독특한 혼술 좋은 가게 창업
“술집은 저녁을 채워주는 공간
선물드린다는 생각으로 서비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내외술집과 바침술집. 술집깨나 다니는 사람에게도 생소한 말일 터. 요즘 말로 하면 도우미가 나오지 않는 술집이 내외술집, 술집에 술을 대는 가게가 바침술집이다. 그런 죽어 가는 말은 몰라도 즐거운 음주생활에 지장이 없다. 독립술집을 모르는 건 다른 얘기다. 국어사전에 아직 등재되지 않은 독립술집은 ‘술에 취향, 가치, 공간, 문화를 얹어 파는 작고 독특한, 혼자 가도 어색하지 않은 술집’이다. 이를테면 독립서점의 유흥 버전이다.
독립술집 사장님들을 만났다. 서울 상암동 ‘원부술집’의 원부연(33), 경리단길 ‘한국술집 안씨 막걸리’ 안상현(34), 망원동 ‘참프루’ 변익수(29), 연남동 ‘비노 라르고’ 하상우(39), 통의동 ‘심야오뎅’ 김슬옹(34) 사장. 최근 발간된 ‘합니다, 독립술집’(북저널리즘)의 공동 저자이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름 난 스타 사장님들이다. 얌전한 커피 대신 왜 술을 팔기로 했을까? 젊음을 술로 마셔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일까? 인공지능(AI) 시대 인류에게 남을 마지막 일자리가 술집이라고 본 걸까? 22일 원부술집에 모인 이들은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 2시간 넘게 이야기를 풀어 놨다.
-어떻게 술집을 하게 됐나.
안상현= “번듯한 회사를 다니다 2012년 총선에 출마해 낙선했다. 시골 장터에서 맛본 수제 막걸리가 운명이었다. 한국 술에 미래가 있다고 봤다. 영업 끝난 미용실에서 밤에 술을 팔았다. 6개월 뒤 5,000만원을 들여 술집을 열었다. 5년 만에 경리단길에서 제일 잘나가는 가게가 됐다. ‘2018 미쉐린(미슐랭) 가이드 서울 편’에 올랐다.”
원부연= “광고회사를 8년 다녔다. 내가 주도적으로 쓰지 못하고 버리는 시간이 아까웠다. 신촌 단골 술집을 인수해 해 보고 확신이 들어 사표를 냈다. 3년 만에 독립술집 6곳을 열었다. 술을 매개로 문화를 만드는 기획자를 꿈꾼다."
변익수= “사회는 똑똑한 친구들에게 맡기고 나다운 삶을 살기로 했다. 대학 기숙사에서 쫓겨나 집 얻을 돈으로 점포를 구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번 1,000만원에 학자금 생활비 대출금 300만원을 보태 내 집에서 술을 파는 홈인샵을 시작했다. 바텐더 경험을 활용했다. 3만원쯤 내고 구청에 등록하면 누구나 사장님이 될 수 있다.”
하상우= “신학대학에서 제적당했다. 가짜 약 파는 약장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30세부터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로 살며 뒤늦게 술을 배웠다. ‘가게 망한다고 인생 망하는 것 아니다’라는 다른 가게 사장님 말에 용기를 내 와인식당을 열었다. 카페는 극단적 레드오션이라 고려하지 않았다.”
김슬옹= “디자인회사 다니다 사표 내고 자취집에 꽃집을 차렸다. 미래가 불안해 밤에 술을 팔았다. 꽃과 어울리는 프랑스 가정식을 팔려다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오뎅(어묵)으로 안주를 바꿨다. 꽃집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려고 매일 밤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을 틀었다.”
한국은 자영업자의 늪이다. 행운이었는지, 영리해서인지, 다섯 명은 늪에 빠지지 않았다. 안상현, 원부연 사장의 술집은 궤도에 올랐다. “연봉으로 따지면 연간 소득이 1억 정도다.”(안) “회사 다닐 때보다 조금 더 번다.”(원) 다른 세 명은 상대적으로 팍팍하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했다. “생계를 유지하기엔 아슬아슬하다. 창업 비용을 아직 갚고 있다. 그래도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소모적으로 살고 싶진 않다.”(하상우) “짜장면 사 먹을 정도는 번다. 돈이 목표가 아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다.”(변익수) “나와 손님들이 즐거우면 그만이다. 당장의 행복이 중요하다. 꽃 파는 것보다는 쉽다.”(김슬옹)
-초보 자영업자로서 ‘망하지 않은’ 비결은.
변익수= “나와 공간의 매력이 넘치면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 온다. 진토닉 한 잔에 겨우 3,000원 받는다. 술값이 싼 대신 나와 신나게 놀아 달라, 내가 서툴러도 좀 봐 달라는 뜻에서다. 술 소비자 안목이 아직 높지 않다. 잘하면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원부연= “요즘 손님들은 술을 어디서 마시는지를 따진다. 공간은 금세 지루해지는 게 본질이다. 공간을 끊임없이 바꾸는 기획력이 가게 위치보다 중요하다.”
하상우= “소주 애호가 중에 진상이 많기 때문에 와인을 팔기로 했다. 와인 공부를 많이 했다. 코르크를 따자마자 맛있는, 개성 있는 중ㆍ저가 와인을 내놓는다. 손님을 동네 친구처럼 편하게 대한다. ‘변호사님’ ‘교수님’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김슬옹= “손님들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게 철칙이다. 나는 공간을 기르는 사람이다. 손님들 의견을 반영해 최고의 공간을 만든다. 쉬는 날엔 지방을 다니며 술과 안주의 매칭을 공부한다.”
안상현= “이른바 힙스터 플레이스는 오래가지 못한다. 트렌드는 순식간에 바뀌기 때문이다. 온갖 정성을 들이되 공간을 평범하게 꾸몄다. 장사의 품위를 지키려 애쓴다. 예컨대 ‘서비스 준다’고 하지 않고 ‘선물드린다’고 한다. 초기엔 공부는 안 하고 영업만 생각하다 망할 뻔했다. 요즘은 음식 회의만 매주 여덟 시간씩 한다.”
‘독립술집 사장님’이라는 이름에선 달큰한 낭만이 폴폴 풍긴다. 내 마음대로 꾸려 가는 공간에서 술을 팔고, 마시고, 취하는 건 진짜로 낭만적인 일일까.
김슬옹= “손님들이 낭만을 느끼게 하려고 애쓰는 사이 나는 낭만을 잃었다(웃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하상우= “내가 하루의 온전한 주인이 됐다. 하지만 내 돈 내고 노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가게를 혼자 하다 보니 제대로 쉴 수 없다. 월세를 감당할 수 있으면 장기 휴가를 가겠지만, 현실은 따라 주지 않는다.”
안상현= “술집은 낭만적이지만, 생계가 걸리는 순간 낭만적이기만 할 순 없다. 가게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 내가 그 공간에 질려서다. 내가 흥에 겨워 손님들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내가 주5일 근무하면 매달 300만원쯤 더 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망가질 것이다. 가게를 낭만적 공간으로 남겨 둬야 한다. 그게 오래가는 길이다. 하루 24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가 지금 지구 최고의 부자다.”
변익수= “나도 고민하는 문제다. 사람을 써 봤는데 인건비 나가면 남는 게 없다. 돈이 돈을 벌게 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회사원보다 시간이 많은 삶은 만족스럽지만, 돈을 생각하면 우울해지기도 한다. 부업 삼아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상권을 따라다니며 가게 세를 올리는 부동산 업자들이 문제다.”
원부연= “회사 다닐 땐 자유 없는 갑이었다 자유로운 을이 됐다. 가게 이름을 내 이름을 따 ‘원부’로 지은 건 실수였다. 내가 있어야 성립하는 술집이라는 게 나를 갉아먹었다. 이제 매주 사흘만 가게를 지킨다. 열 평짜리 가게에선 그만큼만 수익이 날뿐, 대박은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가끔 진상도 만난다. 매장에서 소변 본 사람도 있다.”
변익수= “이상한 여자 손님도 있다. 무턱대고 자고 간다고 하고, 나를 만지기도 한다.”
안상현= “나도 꽤 당했다. 자존감 덕분에 나를 지켰다. 초기엔 술을 내가 마셔서 매상을 올렸다. 팔리는 술의 10%는 내가 마셨다. 어느 순간 끊었다. 손님이 술을 주면, 더 비싼 술을 선물한다.”
-사장님이 나오지 않는 가게라니, 자영업자 대부분이 공감하지 못할 텐데.
하상우= “치킨을 팔면서 나 자체를 팔아 버리는 식의 소모적 접근은 위험하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든다. 잠시 경험해 봤는데, 내 생명과 가치를 먹어 치우는 일이다.”
김슬옹=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당연히 망한다. 할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은 다르다.”
원부연= “자영업 문턱이 너무 낮다. 너도 나도 할 수 있으니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안상현= “자영업에 ‘내몰린다’고 하는데, 그런 수동적 태도로는 성공할 수 없다. 자영업은 고난이도의 사업이다.”
변익수= “그래도 젊은 영세 자영업자가 되겠다면, 추천한다. 밤늦게까지 남 좋은 일만 하면서 쥐꼬리만큼의 돈을 버느니, 가난하고 여유 있는 자영업자가 낫다. 책을 쓰고 싶어서 이번에 냈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단편영화를 선댄스영화제에 출품했다. 출품은 자유니까. 물질적으로는 덜 갖춰도 지금을 충실하게 즐기며 살려 한다. 즐기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밑에서 열심히 발차기 하는 중이다.”
하상우= “가게 이름 ‘라르고(Largo)’는 음악 용어로 ‘아주 느리고 풍부하게’라는 뜻이다. 행복은 그런 태도에서 시작한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 20대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놓치고 산 것을 후회한다. 젊은이들이 열심히 놀았으면 한다.”
김슬옹= “해 보고 싶은 건 다 해 봐야 한다. 해 봤다가 아니면 다른 걸 하면 된다. 하고 싶지 않은 걸 계속했는데 끝내 아니면 시간 낭비 아닌가. 망하더라도 빨리 망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낫다.”
-술이란 뭔가. 우리는 술을 제대로 마시고 있나.
변익수= “술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재미없게 산다. 보고 먹은 것 찍어 SNS에 올리는 게 전부다. 잘 노는 문화가 막 생기기 시작하는 단계다. 술 먹고 하는 잘못에 지나치게 관대한 건 문제다.”
하상우= “먹는 게 유행이긴 한데, 음식을 입, 코가 아닌 눈, 귀로 먹는다. 여행지 술집처럼 모르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소통하는 살롱을 차리고 싶다.”
안상현= “술은 사람들을 엮어 주는 것이고, 시간을 낭비하는 사치를 만끽하기에 제일 좋은 공간이 술집이다. 술을 점점 알고 먹는 쪽으로 천천히 가고 있다. 술을 매개로 한국의 오리지널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게 목표다.”
원부연= “술과 술 마시는 공간에 대한 취향이 다양해지고 있다. 술집은 개인의 남는 저녁시간을 채워 주는 곳이 돼 갈 것이다. 유럽과 일본이 그렇다. 모여서 술을 마시되 취향을 존중해 주는 가게가 술집의 이상적 미래다.”
김슬옹= “술과 어울리는 온도, 음악, 공간, 음식과의 조화를 찾는 게 중요하다. 가격은 그 다음이다. 퍼 마시고 취하는 술이 아니라, 미식 차원에서 접근하는 술이 됐으면 한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박혜인(중앙대 정치국제학과 4) 인턴기자
합니다, 독립술집
원부연ㆍ안상현ㆍ변익수ㆍ하상우ㆍ김슬옹 지음
북저널리즘 발행ㆍ182쪽ㆍ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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