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4일, 광화문광장에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 신도 2만5,000명(경찰 추산)이 모였다. 이들이 겨울비를 맞으며 광화문광장에 나선 이유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CBS가 신천지를 지속적으로 ‘반국가 반사회 반종교’ 단체로 음해해 왔기 때문이다. 이 규탄 시위는 한국 개신교계 주류를 대변하는 ‘국민일보’ 이외의 어떤 종합 일간지도 보도하지 않았다. 일인시위도 기사가 되고 남는 터에, 2만5,000명의 집단 시위를 못 본 체하는 언론은 이미 사회의 공기(公器)가 아니다. 종교문제에 대해 언론이 매번 이런 식으로 몸을 도사리며 침묵을 택할수록, 종교는 점점 반국가ㆍ반사회ㆍ반종교적이 되어 간다.
신천지의 광화문 시위는 올해로 500주년을 맞은 종교개혁의 한계를 검토하게 만든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궁정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시작되었다. 두루 알다시피, 루터가 반박문을 붙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로마 교회(가톨릭)의 면벌부(免罰符)였다. 루터는 인간의 노력으로 속죄 또는 은총을 얻을 수 있다는 구 교회의 오랜 신학적 관행을 거부하면서 “오로지 믿음으로서만(sola fide)” 구원될 수 있다는 신교 사상을 내세웠다. 이로써 로마 교회를 지탱해 주던 성직 제도ㆍ성인 숭배ㆍ순례ㆍ수도원 생활ㆍ고해성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성사(聖事)는 미신이 되었다.
구교(가톨릭)에서 신교(프로테스탄트)로의 전환은 ‘인간 중심’의 신학을 ‘신 중심’의 신학으로 되돌려 놓은 신학상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 막스 베버는 바로 이 전환으로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맞추어 ‘루터와 종교개혁’(길, 2017)을 출간한 김덕영은 베버주의자답게 중세의 주술적 세계로부터 합리적 근대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이 책을 썼다.
“루터는 서구 사회의 근대화, 보다 세분화하여 말하면 서구 사회의 개인화, 탈주술화, 세속화, 분화에 그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 개인화되고 탈주술화되고 세속화되고 분화된 세계에서 결혼, 가족, 종교, 정치, 경제 등의 다양한 삶의 영역이 자체적인 가치와 의미를 갖도록 했으며, 또한 이 다양한 삶의 영역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원리인 직업윤리를 제시했다.”
신교가 탈주술을 통해 근대의 기초를 놓았다는 베버의 그럴듯한 입론을 절대로 믿지 말라. 루터는 탈주술을 위한 신학적 원천을 철저히 성서에서 찾고자 했는데, 성서는 애초부터 근대적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200여 년 전에 미국의 흑인 노예제를 찬성했던 목사들과 인종차별주의를 지지하는 오늘날의 근본주의 개신교도들이 근거로 삼는 것도, 낙태와 남녀평등과 동성애 반대 운동을 펼치는 개신교도들이 철석같이 따르는 것도, 박성진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가 ‘지구의 나이 6,000년 설’을 따르는 근거도 모두 성서다. 루터는 성서로 돌아가자면서 크리스마스를 의문시하지 않았고, 예수가 십자가가 아닌 나무기둥에 못 박혔다는 것을 무시했으며, 영혼이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교리가 비성서적임을 캐지 않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코 주술을 청산하지 못했다.
인간의 치성으로 비도 오게 하고, 병도 낳게 하고, 좋은 대학에도 갈 수 있고, 출세도 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면 원시종교다. 무속의 단계에서 신은 인간이 부리는 하인이다. 반면 고등종교에서 인간은 오로지 신의 뜻을 따를 뿐이다. 십일조 헌금을 하나님이 내리실 복(福)과 연관시키는 현재의 한국 개신교는 면벌부를 판 구 교회와 다를 게 없다. 개신교는 조세 정의를 거스른다는 점에서 반국가적이고, 성소수자와 여성의 인권에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반사회적이며, 십일조로 세운 교회를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한다는 점에서 반종교적이다. 한창덕은 ‘한 권으로 끝내는 신천지 비판’(새물결플러스,2013)에 이렇게 썼다. “장기적 안목에서는 무엇보다 이단 사이비가 횡행할 수밖에 없는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적 토양이 더욱 강하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한국 개신교가 신천지의 모태였다는 말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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