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우주의 스카이라크’
최초의 우주 배경 활극모험담
대중적으로 인기 얻으며 연재
‘스타워즈’ 등 탄생으로 이어져
80년대 일명 ‘스타워즈 계획’
미 전략방위구상의 개념 제시
군사적 연구개발에 많은 영감
2차 대전시 통제소 디자인도
‘스타 워즈’ 시리즈의 새 작품 ‘라스트 제다이’가 개봉했다. 국내 흥행은 신통치 않지만 ‘스타 워즈’를 모르는 이는 없다. 역시 국내에서 큰 인기는 없지만 ‘스타 트렉’도 우리에게 영 낯선 이름은 아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제목에 ‘스타(star)’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들은 광활한 우주를 누비며 화려한 액션을 펼치는 우주활극담이다. 드넓은 우주를 배경으로 삼는 이야기답게 온갖 기묘한 외계생명체며 외계인들이 이질적인 풍광의 천체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여러 신기한 과학기술들이 등장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이런 장르를 SF 중에서도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한다. 20세기 과학시대를 가장 잘 상징하는 대중문화 중 하나다. 이렇듯 과학적 상상력과 우주 배경을 스토리텔링으로 결합시켜 최초로 대중적 인기를 끌어 낸 인물, 그가 바로 ‘스페이스 오페라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E. E. 스미스이다.
제국주의적 확장의 정서
엄밀히 따지자면 지구가 아닌 외계에서 활약하는 영웅 이야기로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은 스미스 이전에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화성의 공주’(1912)가 있었지만, 이 작품은 화성에서만 펼쳐지는 내용이고 설정도 과학적 상상이기보다는 판타지에 더 가깝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의 명실상부한 시초는 스미스의 ‘우주의 스카이라크’(1928)를 꼽는다. 일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인류가 태양계를 벗어나 활약하는 최초의 SF라고 한다.
천재 과학자인 주인공은 우연히 발견한 미지의 광물질이 우주여행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원임을 깨닫고 사업화를 추진하지만, 그 과정에서 불순한 욕망을 품은 악당에게 아이디어를 도용당하고 약혼자까지 납치된다. 주인공은 절친한 동료 사업가와 함께 우주선 스카이라크를 타고 악당을 추적하는 길에 나선다. 이렇게 시작되는 ‘스카이라크’ 시리즈(1928~1966)는 모두 4편이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렌즈맨’ 시리즈(1934~1948) 6편은 수 억 년 전의 우주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압도적 스케일로 그야말로 본격 스페이스 오페라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평화를 사랑하며 정신적 능력을 극대화시켜 온 외계 종족과, 지배와 정복을 추구하는 또 다른 외계 종족. 이 두 세력의 대결이 지구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은하순찰대의 활약을 통해 전개되는 내용이다.
사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이름은 원래 시니컬한 뉘앙스를 담은 멸칭이었다. 서부극은 카우보이들이 말을 타고 인디언과 싸운다고 해서 ‘호스(horse) 오페라’라고 불렀고, 라디오 연속극은 가정주부를 겨냥한 비누 회사의 광고와 함께 나와서 ‘소프(soap) 오페라’라고 부르곤 했는데, 비슷한 식으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웅담에는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스미스에 의해서 촉발된 스페이스 오페라의 붐은 이른바 ‘펄프 SF’의 전성기로 이어졌다. 건장한 백인 남성이 악당 외계인에게 붙잡힌 금발 미녀를 구한다는 식의 기본 서사구조가 수없이 변주되며 통속적 SF콘텐츠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본질적으로 서양의 영웅 기사담을 배경만 우주와 미래로 바꾼 것일 뿐이었고, 바탕에 제국주의적 확장의 정서가 깔려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현대 군사과학의 벤치마킹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를 만들다시피 한 스미스는 ‘스카이라크’와 ‘렌즈맨’ 두 대표작만으로 오랫동안 문파의 당주 지위를 누렸다. 이 시리즈의 작품들은 20년대 말에 첫 선을 보인 뒤 무려 40여 년 가까이 스테디셀러로 군림했으며, 특히 과학기술계에 종사하는 연구자에게도 널리 읽혔다.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기본적으로 우주 배경의 전쟁이나 전투 장면이 자주 나올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갖가지 아이디어들은 현실의 군사과학에 적잖은 영감을 제공했다. 스텔스 기술, 조기경보체제, 또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이른바 ‘스타워즈 계획’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전략방위구상(SDI) 등은 모두 스미스의 작품들에 나왔던 개념이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사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의 칼 래닝 제독이 군함의 전투지휘통제소 디자인을 스미스의 ‘렌즈맨’ 소설에 나오는 그대로 채택하여 일본 해군과의 대결에서 큰 효과를 거두었다고 밝힌 일이다.
처음에는 비꼬는 의미가 들어있었던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이름은 곧 SF의 대표적인 하위 장르 중 하나의 명칭으로 굳어져 가치중립적 용어로 쓰이게 되었고, 과학기술 및 SF적 상상력의 발전이 이어지면서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이야기들도 계속 선을 보였다. 현재 스페이스 오페라는 단순한 우주활극담 수준을 넘어 우주 속에서 인간과 생명의 기원, 그리고 그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변소설의 경지에까지 올라 있다. 댄 시먼스의 ‘히페리온’(1989)이나 이언 뱅크스의 ‘플레바스를 생각하라’(1987) 등이 좋은 예이다.
한국의 스페이스 오페라 수용
스미스의 소설들은 현재 한국어 완역판이 나와 있지 않지만, 지금의 50대 이하 중년층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한 번씩은 접했던 작품이었다. ‘스카이라크’와 ‘렌즈맨’의 아동용 축약판은 60년대에 처음 출판된 뒤 40여년이 넘도록 여러 판본으로 계속 나왔으며, 1984년에 일본에서 제작된 ‘렌즈맨’ 애니메이션 시리즈도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한국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끈 소설은 일본 작가 다나카 요시키가 쓴 ‘은하영웅전설’일 것이다. 원작 소설이 1988년에 전 10권으로 완간된 뒤 애니메이션과 만화, 게임 등 다양한 각색 버전이 함께 수입되었는데, 원작 소설은 한국에서 100만부에 달하는 누적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은하영웅전설’은 세계관 설정부터 캐릭터, 정치, 과학기술, 군사전략 등 스페이스 오페라에 나오기 마련인 온갖 측면들이 방대한 양의 이야기에 녹아들어 있어서 한국에 적잖은 매니아 층을 형성시켰다. 비록 이름값에서는 ‘스타 워즈’나 ‘스타 트렉’에 뒤질지 몰라도 한국에서 책으로 가장 많이 읽힌 스페이스 오페라인 것은 틀림없다. 이밖에 높은 인기를 누린 게임인 ‘스타크래프트’(1998~)나 마블 코믹스의 슈퍼영웅물 중 하나인 영화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시리즈(2014~) 역시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이다. 또한 이 장르는 한국에서 창작 활동이 꾸준히 이루어지는 분야이기도 하다. ‘라이트노벨’ 또는 ’대여점 소설‘로도 불리는 일군의 대중 SF문학 작가들 작품은 상당수가 스페이스 오페라에 해당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스타 워즈’를 비롯한 대부분의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한국 시장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몇몇 예외 말고는 영화, 소설, 만화 할 것 없이 우리나라에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해외에서만큼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는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탄생 배경이 우리나라의 역사와는 매우 동떨어진 환경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전통 서사에는 바깥세상으로 ‘원정’을 나가거나 방대한 영토를 수호한다는 설정이 드문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E. E. 스미스
1890년 5월 2일 ~ 1965년 8월 31일. 본명은 에드워드 엘머 스미스이며 미국 위스콘신 주의 소도시 시보이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영국계이고 기독교 장로교에 속한 집안이었다. 성장기 동안 워싱턴주와 아이다호주에서 살았으며 아이다호대에 진학한 뒤 화학공학을 공부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엔 국립표준국(현재의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에서 버터 등의 식품 표준을 정하는 수습화학자로 일했다. 그 뒤 조지워싱턴대에서 공부를 계속해 식품공학 박사학위를 받고는 한 식품회사의 수석화학자로 채용된 뒤 은퇴할 때까지 계속 식품공학자로 일하면서 작품을 썼다.
첫 작품 ‘우주의 스카이라크’는 그가 대학원생이던 1915년에 친구 부부와 항성간 우주여행에 대한 토론을 하던 중에 태동했다. 스미스가 등장인물들 간의 로맨틱한 관계 묘사를 어려워하자 친구의 아내인 리 가비가 그 부분을 맡아 집필했다. 이렇게 탄생한 초고는 십 수 년 간 잠들어 있다가 1928년에야 잡지 연재로 처음 세상에 선을 보였고,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은 1946년의 일이다. ‘스타 워즈’를 탄생시킨 조지 루카스 감독과 ‘슈퍼맨’의 창작자인 제리 시걸은 모두 어릴 때 스미스의 ‘렌즈맨’과 ‘스카이라크’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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