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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길 잃은 편지’

입력
2018.01.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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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온 곳은 벽돌이 빨간 4층짜리 빌라야. 집 바로 뒤에는 산이 있어. 사방이 경사라 길은 물론이고, 집도 사람도 모든 게 기울어진 것처럼 보여. 누군가는 우리 집을 가리키면서 어떻게 저런 집에서 살 수 있냐며 흉을 볼지도 몰라. 내가 봐도 그 모습이 꼭 등짐진 할머니가 비탈길 위에 서 있는 것 같아서 위태롭게 보이거든. 그런데 말이야,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아. 지구가 기울어져 있어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아.

아빠는 다 좋은데 보는 눈이 없었다. 욕조 없는 욕실, 손바닥만한 창문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빌라. 엄마가 알았더라면 분명 말렸을 것이다.

큰방에서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간간히 새어 나왔다. 문에서 귀를 떼고 노크를 했다.

“아빠, 엄마?”

아빠는 한참 후에 나왔고, 전에 본 적이 있는 여자가 뒤따라 나왔다.

작년 이맘때 윤주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탔다. 우리는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가 좁아지는 길목에서 두 자전거의 바퀴가 뒤엉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전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엎어져 있었다. 가랑이가 얼얼했고 앞니가 조금 깨졌다.

얼마 후 아빠가 차를 끌고 데리러 왔다. 조수석에는 일로 알게 되었다는 친구, 오늘 온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수석은 늘 내 차지였다. 아빠는 때때로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곤 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아빠의 친구에 대해 궁금해 한 적이 없다. 이사온 이후로 처음 학교에 가는 날이라서 아빠는 서둘러 채비를 끝내고 학교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등굣길 차 안에서 우리는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장맛비가 뿌릴 것이니 우산을 챙겨 나가라는 일기 예보가 흘러나왔다.

전에 살던 동네는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이고 평평하고 넓었는데 이곳은 가파르고 좁은데다가 구불구불하기까지 했다. 내려오는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고 미로를 빠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연립주택 옆에 연립주택, 어린이집을 지나 구멍가게와 세탁소, 약국을 지나 큰길, 대중목욕탕 옆의 사진관, 낮은 아파트를 지나 문방구, 그리고 교문.

아빠는 접이 우산을 쥐여 주며 작은 목소리로 우리 딸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전학생이 왔다는 소문이 복도 끝까지 퍼졌는지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보러 왔다. 누구는 창문에 누구는 뒷문에 매달렸다.

전학을 좋아하는 애들은 없겠지? ‘전학생을 위한 안내서’와 같은 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에만 갇혀 있지 않을 뿐이지 원숭이가 된 기분이야. 저희들처럼 나도 육학년일 뿐인데 신기한 동물 보듯이 대하는 이유가 뭘까. 단지 다른 동네에서 이사를 왔기 때문일까. 게다가 우스운 건 다 들리는데 마치 저희들끼리 있는 것처럼 이런저런 말로 나를 평가한다는 거야. 그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고 대꾸해 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렇게 되면 동물이 말을 하게 되는 꼴이니까 참기로 했어.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몬스터 취급을 받았을 거야.

체육 시간에 철봉에 거꾸로 매달렸는데 얼굴이 긴 남자 아이가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어.

“너는 어떤 문제집 풀어?”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때마침 체육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었어. 나랑 친해지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조회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교탁에 나를 세워 두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전학을 왔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일까.

종례 후 구령대를 돌아 수돗가를 지났다. 멀리 보이는 교문 밖에는 학생들로 붐볐다. 운동장에서 축구부원들은 훈련을 하고, 저학년들은 정글짐 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잡기 놀이는 생각만 해도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정문을 나서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빠는 예상대로 보이지 않았다. 혼자 잘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깨를 펴고 책가방을 고쳐 맸다. 아이들 틈에서 와플 하나를 사고 걸어 내려갔다. 낮은 아파트와 파출소를 지났다. 이만큼 오면 대중목욕탕이 나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길을 잃었던 적이 있다. 윤주는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겁쟁이, 걱정할 것 없어. 입은 뒀다 뭐 하니?’

바람에 원피스가 펄럭였다. 한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길을 물어 보길래 모른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이쪽 동네가 처음이야.”

경찰 아저씨가 보였다.

“저분한테 물어보세요.”

종종걸음을 치다가 앞만 보고 마구 달렸다. 아저씨는 어른이다. 어른이 아이의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한참을 뛰었다. 누가 나를 불렀다. 되돌아보았더니 이용기다. 용기라는 이름은 잊을 수 없다. 이름 때문이기도 하고 나에게 어떤 문제지를 푸는지 물어왔던, 처음 따로 말을 걸어주었던 아이이기 때문이다.

“누가 잡으러 오기라도 해, 어디 가?”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집.”

“이 근처야?”

“아마도.”

용기와 가깝게 지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현대아파트에 살아.”

내심 용기가 같은 방향이라고 말하기를 바랐지만 용기는 직진, 나는 골목으로 가야 했다.

뻥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빼빼 마른 뻥튀기 장수였다. 와플을 먹은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배가 고픈 것일까. 호주머니에는 동전 몇 개뿐이었다. 아저씨만 괜찮다고 한다면 가방이라도 팔고 싶었다.

하도 걸었더니 다리가 아팠다. 학교가 집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몰랐다. 이만큼 오르면 어린이집이 보이고 우리 집도 있어야 하는데 하나같이 처음 보는 집들뿐이었다. 둘이 한 통속이 되어 몰래 이사라도 가버린 것일까.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내가 너무 여유를 부렸던 것일까. 와플을 사먹지 말았어야 했나. 모퉁이를 돌면 집이 나올 것 같았는데 막다른 골목이었다. 회색 벽돌담은 묵묵히 서 있었다.

윤주야 길을 잃었어. 이리 가도 저리 가도 그게 그 길이야. 등굣길은 내리막이라 빠르고 쉬웠는데 말이야. 집을 못 찾진 않겠지.

너한테 말 안 한 게 있어. 작년에 자전거 사고났을 때 아빠랑 온 친구 분 있지? 그 분이 우리 집에 놀러 왔어. 네가 날 너희 집에 데리고 간 것처럼 아빠도 그런 것일까. 어른도 사람이니까 우리랑 똑같겠지, 그렇지?

너희 집에 들렀던 생각이 난다.

운동회였다. 윤주가 플래카드를 집에 두고 왔다고 해서 우리는 흰 체육복을 입은 채로 교문을 빠져 나왔다. 손을 잡고 가는 내내 윤주가 어떤 아파트에서 살고 방은 어떤 색깔로 꾸며 놓았을지 몹시 궁금했다.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 번째 집이었다. 대낮인데도 실내는 어둡고 눅눅했다. 벽을 더듬어 전기 스위치를 켠 윤주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누군가가 윤주를 불렀다. 한쪽 방구석에 누워 있던 윤주 엄마는 일어나 앉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윤주와 같은 갈색 머리카락은 거의 빠진 상태였다.

윤주의 방은 따로 없었다. 그러니까 분홍색 침대도 번듯한 책상도 없었다. 나는 풀 죽은 강아지마냥 윤주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나왔다. 밖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고 활기가 넘쳤다. 윤주는 알록달록한 플래카드를 내게 들어 보였다.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스피커 소리와 함성 소리가 커졌다. 윤주는 가만히 있다가도 심장이 찌릿하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 보라고, 나도 그럴 때가 있다고 안심시켰다.

내 말만 하느라 네 얘기는 물어보지도 않았네. 운동회 이후로 네가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이틀 연달아 결석한 날 너희 집으로 찾아갔어. 문이 닫혀 있더라. 그 다음날, 그 다음날도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갔어.

어느 날 선생님이 너희 엄마가 심장이 아파서 입원 중이시라고 했어. 그러고 나서는 온갖 소문, 너희 엄마가 심장을 이식을 받았다느니, 그렇지 못 했다느니 하는 그런 말들이 돌았어. 어떤 애들은 네가 엄마를 돌보느라 학교에 잘 나오지 못해서 내년에 오학년 애들과 한 해 더 수업을 받게 될 거라고도 말했어. 그렇게 되면 학교로 놀러 갈게. 너에게 주려고 하루도 빠짐없이 쓴 모든 편지를 들고 말이야.

앗, 빗방울이다. 일기예보가 맞았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교차하는 곳에 서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갈지 망설이고 있는데 안경을 낀 여자아이가 쏟아질 듯 뛰어내려왔다. 이삼 학년쯤으로 보였다. 윤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저기, 이 동네가 처음이야. 이 근처 어린이집이 어디에 있는 줄 알아?”

아이는 불쑥 내 손목을 끌고 앞질러 달렸다.

“저기, 보여요?”

씩씩한 아이가 손가락으로 하얀색 건물을 가리킬 때, 나는 건물 뒤쪽 너머의 빨간 벽돌, 우리 집을 찾았다. 파출소 앞에서 나를 불러 세웠던 아저씨도 어쩌면 정말로 길을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호주머니에 있던 동전 몇 개가 떠올랐다. 가려던 아이를 붙잡아서 오백 원을 건넸다. 여자아이는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이것 밖에 없어.”

부끄러웠다. 아빠는 방을 치우고, 설거지를 해 놓을 때마다 내게 용돈을 주었다.

어린이집을 지났다. 하늘은 마치 이제는 괜찮다는 듯이 큰비를 마음껏 뿌렸다. 아빠가 챙겨준 우산을 펼쳤다. 꼭대기 중의 꼭대기에 숨어 있는 우리 집은 산을 등에 지고도 꿋꿋이 서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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