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헐적 폭발장애 30%가 20대 남성
무한경쟁 사회에 배신감 쌓여 분노
불평등∙불공정 사회, 정신적 질병 불러
#2
경력 단절 무릅쓰고 키웠는데
딸 성적 떨어지자 고함ㆍ손찌검
병원서 ‘우울장애’ 진단 받아
#3
사회에선 감정 표출 자제 압박
분노, 자신을 향할 땐 우울ㆍ불안 생겨
“좌절 경험 땐 주변인들과 소통을”
‘3년 차 직장인’ 이종민(20대 후반ㆍ가명)씨는 지난 연말 회사 모임에서 상사와 주먹다짐을 한 이후 이직할 곳을 찾고 있다. 과음을 하면 주위 사람들과 다투는 술버릇 탓에 경찰서에도 끌려가고 합의금도 내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번엔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도 화를 참지 못해 직장 상사를 먼저 때렸다. 이씨는 “직장에서 나를 무시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을 보면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다. 병원을 찾은 그는 ‘간헐적 폭발장애’ 진단을 받았다.
분노, 즉 화가 폭발하면 누구나 심장이 뛰고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른다. 그러나 모두가 이씨처럼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다. 정신과 의사들로부터 그들이 치료한 환자들을 통해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 왜 화를 참지 못하는 병을 얻게 되는지 그 이유를 들어왔다.
개개인의 성향보다는 매일매일 각종 공간에서 마주치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 환경이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의사들은 입을 모았다. 20대 청년은 아등바등 노력해도 사회에 첫발조차 내딛기 어렵고 취업에 성공을 해도 언제 낙오할 지 모르는 무한경쟁 환경에 내몰린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강한 배신감이 차곡차곡 쌓여 분노가 된다. 40대 여성은 자녀 교육에 대한 스트레스에, 또 직장생활까지 훌륭히 병행하는 슈퍼맘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박감에 분노 조절 기능을 잃어가고, 70대 노인은 가족과 사회의 무관심에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비뚤어진 사회가 “나만 억울하다”는 인식을 낳고, 배출할 곳 없는 이런 화가 쌓여 병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20대 직장인, 40대 주부가 왜?
‘분노조절장애’가 ‘사회적 질병’으로 부각되지만 의학적, 과학적으로 정확히 정의된 개념은 아니다.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발생하는 이유나 세기(폭발력)가 모두 달라 하나의 질병으로 단순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분노조절장애’라는 진단명도 없다. 대신 전문가들은 간헐적 폭발장애나 양극성 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적대적 반항장애, 파괴적 기분조절부전장애 등의 진단을 받으면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본다.
이씨가 앓는 ‘간헐적 폭발장애’는 흔히 칭하는 분노조절장애의 성격에 가장 가까운 질병이다. 우울이나 불안, 성격장애 등의 정신질환이 없는데도 충동적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재산을 파괴하는 특성을 보인다. 이씨도 처음부터 분노에 익숙했던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가정은 비교적 화목했고 별다른 말썽 없이 학교 생활을 마쳤다. 분노나 화로 인한 충동적 감정은 성인이 돼 어렵게 취직을 한 후 ‘직장에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자존감 결여에서 싹 텄다. 상사나 동료에게 부족함을 지적 받을 때마다 억울하고 화가 나 술을 마셨는데 알코올 중독이 됐고, 때때로 폭력까지 휘두르게 됐다. 홍나래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려 하는 사람들은 무시하는 느낌을 받으면 더 크게 화를 내는 경향이 있다”며 “직장 내 대인관계와 업무량에 따른 스트레스를 조절하지 못해 분노가 폭발한 사회적 약자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간헐적 폭발장애’로 진단 받은 환자는 2012년 1,479명에서 2016년 1,706명으로 늘었고, 전체 환자의 30.4%(2016년 기준 519명)가 20대 남성이었다. 20대 청년들이 그만큼 사회로부터 느끼는 배신감이 크다는 것이다.
전업주부 김수영(40대ㆍ가명)씨는 중학생 딸과 눈만 마주쳐도 온몸을 부들부들 떨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른다. 평소 딸의 성적 향상을 위해 경력 단절을 자처하고 온 열정을 쏟아 부었던 김씨는 딸의 성적이 떨어지자 허무함을 느꼈다. 딸에게 소리를 지르고 뺨을 때리는 일이 잦아졌다. 남편은 가족의 일상을 파괴할 만큼 화를 참지 못하는 김씨의 행동이 위협적이라고 봤는데, 병원은 ‘우울장애’ 진단을 내리고 ‘우울증’을 치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씨는 ‘전업주부는 능력이 없다, 게으르다’는 사회적 편견에 유독 민감해 딸에게 정성을 쏟는 ‘슈퍼맘’이 되려 애써왔다. 그 때문에 주변인 중 누구도 그의 우울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노인들의 분노는 치매증상 등과 연관이 있으나 간과하기 쉽다. 퇴직 공무원 박수근(70대 후반ㆍ가명)씨는 얼마 전 아내와 대수롭지 않은 일로 다투는 과정에서 칼을 들고 ‘같이 죽자’고 협박했다. 온화하고 점잖은 성품이었던 박씨는 퇴직 후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내와 다투는 게 일상이었다. 그의 병명은 ‘전두측두치매’. 전두엽은 본능을 조절하고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본능을 참아낼 수 있는 기능을 하는 곳인데, 이런 기능이 감퇴해 박씨가 공격적으로 변한 것이다. 퇴직 후 별다른 사회활동 없이 집에만 머무르는 박씨에게 무관심했던 가족들은 “병을 키웠다”며 자책했다.
분노와 우울은 동전의 양면
분노와 우울은 언뜻 다른 범주처럼 보이지만, 얽혀 있다. 실제 분노 조절 기능의 마비가 모두 ‘폭발적인 분노’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감정을 표출해 주변인의 일상을 파괴하는 적대적 반항 장애, 주의력 결핍 행동장애(ADHD), 반사회적 성격 등도 있지만 반대로 그 공격성이 자신에게 향하는 우울, 불안, 강박 등의 증상도 있다. 김은주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공격성이 타인을 향하는 ‘가해자 유형’은 문제를 부인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만, 스스로에게 분노하는 ‘피해자 유형’은 문제를 과장해 괴로워하는 편”이라며 “자신을 향한 극단적 분노가 표현되는 게 자살”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성향도 물론 있지만 사회적 요인이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건 공통된 설명이다. 양극화, 불평등 심화 등으로 계층ㆍ세대간 갈등이 극에 달하고 이런 문제를 국가와 사회가 해결해줄 거란 신뢰가 기대가 낮아지면서 분노가 쌓여간다는 것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입시 특혜, 채용 특혜, 건설 비리, 권력자의 갑질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될 때 일반인들은 ‘공적제도의 신뢰가 무너졌다’고 느끼게 된다”며 “분노가 확산되지 않도록 만든 사회적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나만 억울하다’는 피해의식이 널리 퍼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참기를 요구하는 사회, 배출구 있어야
전문가들은 분노는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우리 사회가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지 않아 병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개인이 억울한 일을 당해 분노를 표출하면 ‘뭐 그런 일에 화를 내나’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다’ ‘억울해도 참아야 산다’ 등 조직과 사회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도록 학습시킨다는 것이다. 나해란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현대인들은 가정과 학교, 직장 등에서 끊임없이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고 매일 분노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감정을 배출할 곳도 없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쌓여 있다가 폭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개인이 좌절을 극복할 수 있는 경험이 쌓여야 분노의 감정은 긍정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도 조언한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성은 타고난 개인의 성품도 영향이 있지만 가정ㆍ학교ㆍ사회를 통해 학습되는 것”이라며 “좌절을 경험할 때 주변인들과 소통을 통해 얻는 지지는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힘이 되는데 소통이 단절된 사회는 이 완충기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ankookilbo.com
※ 도움말씀 주신 분(가나다 순)
김선미 중앙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김은주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나해란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노대영 한림대춘천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서정석 건국대충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홍나래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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