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열살도 되기 전 천부적 이야기꾼
실감나게 무서운 스토리 만들어 내
20세기 중반 코믹스 향한 열의
훗날 ‘와일드 카드’ 탄생의 밑거름
#2
고전적이며 세련된 소설로
‘아날로그’지의 간판 작가 부상
할리우드 드라마 업계 눈길 끌며
폐쇄적 SF와 TV업계 교두보로
조지 레이먼드 리처드 마틴, 이니셜을 따서 GRRM으로도 알려진 조지 R.R. 마틴은 특히 HBO에서 제작한 드라마 ‘왕좌의 게임’ 원작자로 유명해졌다. 2011년에 방영을 시작한 ‘왕좌의 게임’은 등장인물 수십 명이 얽혀 실제 정치처럼 정교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와 누가 죽을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전개로 수천만 명을 사로잡았다. 당시 재임 중이었던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다음 시즌 미리보기를 요청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미 시사주간 타임에서는 마틴을 “미국의 톨킨”이라고 부르며 2011년에 이미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꼽았다. 이 열풍에 힘입어 국내에서도 원작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가 다시 번역되고 또 그래픽노블과 컬러링북까지 출간되었다. 그러나 약간 덜 알려진 사실이 있다. 마틴이 판타지뿐만 아니라 SF, 호러, 슈퍼히어로 시리즈, TV 시나리오 전반에 업적을 쌓은 거장이라는 점이다.
아홉 살짜리 이야기꾼
마틴의 작가 이력은 유년기부터 시작한다. 열 살도 되기 전부터 그는 실감나게 무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었다. 어린 마틴은 학교 공책에 쓴 괴물 이야기를 같은 아파트 아이들에게 1쪽당 1센트에 팔았다. 관심을 보이는 고객들에게는 공짜 낭독회도 제공했다. 단골 고객 한명이 자꾸만 괴물 꿈을 꾸다가 부모님께 마틴의 이름을 고하기 전까지 말이다. 마틴은 20세기 중반 대중문화의 수혜를 듬뿍 받으며 SF, 미스터리, 호러, 웨스턴, 고딕소설, 판타지, 역사소설, 슈퍼히어로 코믹스를 보며 자랐고 자연히 그런 작가들 중 하나가 되기를 꿈꿨다고 한다.
1950년대는 대공황 시기 신문만화로 시작했던 아메리칸 코믹스가 보다 점잖고 다채로운 형태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코믹스의 발전에 발맞추어 아마추어들이 직접 인쇄한 팬진(fanzine)도 우후죽순 창간되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대였으니 코믹스 팬들은 알음알음 우편으로 동전을 부치며 구독을 신청하는 등 투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연대를 이뤘다. 마틴은 팬진에 꼬박꼬박 팬레터를 보내다, 칼럼을 정기 기고하고, 곧이어 자기만의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단편 소설을 싣는 사람이 되었다. 비록 코믹스 작가가 되기 전에 로버트 A. 하인라인을 비롯한 ‘진짜배기’들의 SF 소설을 발견해버렸지만 말이다. 코믹스를 향한 그의 열의는 후에 ‘와일드 카드(Wild Cards)’와 같은 슈퍼히어로 세계를 낳는 것으로 이어진다. ‘와일드 카드’는 인류가 세계 2차대전 후 외계인이 투하한 ‘와일드 카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초능력을 지닌 극소수의 돌연변이 ‘에이스’들과 신체가 심하게 변형된 ‘조커’들이 출현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마틴이 슈퍼히어로 TRPG에서 창안한 이 시리즈는 1983년부터 지금까지 메인 시리즈만 24권, 참여한 작가는 30여 명에 이르는 메가히트작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 중인데, ‘왕좌의 게임’의 인기를 이어 마블의 ‘어벤저스’를 넘어설 마틴의 미디어 차기작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할리우드와 SF의 교두보
대학생 마틴은 명문대에서 언론학을 전공하면서도 괴물과 우주가 등장하는 소설 쓰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학업 성취도 훌륭해서 언론학 석사과정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인턴십을 수료했으나 막상 마틴을 기자로 채용하겠다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소설을 사겠다는 연락이 있었다. 그의 진로를 결정지은 단편 ‘영웅’은 ‘갤럭시’지에 실렸고, ‘두 번째 종류의 고독’과 ‘새벽이 오면 안개는 가라앉고’는 1971년 SF 분야의 가장 큰 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 후보에 동시에 오르며 화려하게 거장의 데뷔를 알렸다.
마틴이 간판 작가로 들어서기 전 ‘아날로그’지는 명망 높은 편집장 존 W. 캠벨의 지휘 아래 SF 잡지 중에서도 가장 많은 발행부수와 원고료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캠벨은 과학적 합리성과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하드 SF를 추구한 사람으로, 캠벨이 발굴한 하드 SF 작가들을 “캠벨파”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러나 캠벨 사후 ‘아날로그’의 다음 편집장이 된 존 보버는 정합성을 따지기보다는 이야기 본연의 매력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고, 고전적이면서도 진중하고 세련된 소설을 쓰는 마틴은 바로 새로운 세대의 대표 작가가 됐다. 호러의 플롯에 SF의 매력을 얹은 ‘샌드킹’은 ‘옴니’지에서 역대 최고 인기작으로 꼽히며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종교적 갈등을 SF로 녹여낸 ‘십자가와 용의 길’은 같은 날 휴고상 단편 부문을 수상했다. ‘샌드킹’은 여러 앤솔로지에 거듭 게재되며 반복해서 재간됐고, DC코믹스의 그래픽노블로, SF TV 시리즈 ‘외부 한계(The Outer Limitsㆍ제3의 눈)’ 1화로 제작됐다. 1980년 출간된 마틴의 또 다른 하이브리드 대표작 ‘나이트플라이어’는 우주선에 유령이 출몰하며 승무원이 하나씩 사망하는 이야기로, 몸을 조여오는 공포와 그럼에도 광막한 우주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결합하며 ‘아날로그’ 독자상과 로커스상을 받았다. ‘나이트플라이어’도 1987년 영화로 제작됐지만 평이 좋지 않았는데, 마침 올해 새롭게 영화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마틴이 TV를 보며 젖을 뗀 첫 세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시나리오와 대본 작업을 맡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할리우드 드라마 업계에서는 마틴의 소설을 눈여겨본 연출자들과 선배 작가 할란 앨리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틴은 특유의 강력한 친화력을 발휘해, 폐쇄적이었던 SF 팬덤과 대중적이었던 할리우드 TV 업계를 잇는 교두보가 되었다. 그는 ‘환상특급’의 리메이크판 제작에 착수했고, 동료 작가들을 초빙하고 그들의 소설을 각본으로 각색했으며 SF에 호의적인 제작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차원을 넘나드는 소녀가 주인공인 SF 드라마 ‘도어웨이즈’를 궤도에 올리려 애썼다. 결국 제대로 흥행한 것은 어반 판타지 ‘미녀와 야수’뿐이었지만 말이다. 할리우드에서 10년간 값지고 뼈아픈 경험을 쌓은 결과 마틴은 두 가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첫 권 ‘왕좌의 게임’을 쓸 시간, 그리고 소설을 드라마로 탈바꿈시키는 노하우다. 그는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 각본가, 공동 총괄 프로듀서(co-executive producer)이며, 차기 활동으로 아프리카계 SF 작가 응네디 오코라포의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Who Fears Death)’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으며 SF를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팬심을 불어넣는 작가
마틴의 절친한 친구이자 저명한 SF 편집자 가드너 도즈와는 마틴이 모든 분야에 “탐욕스럽게” 최고를 노린다고 평했다. 그리고 마틴은 탁월한 글쓰기 실력만큼이나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출해왔다. 작가 조지 거스리지는 과거 직장 동료 대신 출석한 SF 컨벤션에서 우연히 마틴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여전히 SF를 경멸하고 있었으리라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마틴은 누구보다 휴고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낸 사람이다. 마틴과 도즈와가 시작한 ‘휴고상 낙선자 파티’는 이제 세계 SF 대회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2015년 휴고상이 백인 남성을 배제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새드 퍼피’들이 나타났을 때도 마틴은 발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여론전과 온라인 협박이 더해지며 ‘퍼피게이트’로 갈등이 격화되자 마틴은 블로그와 연설을 통해 열린 마음을 잊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백인 남성 아닌 후보자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백인 남성들이 배제되고 있냐고, 화성인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이 흑인과 아시아인을 거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는 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Santa Fe)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때 문을 닫았던 지역 명소인 ‘장 콕토 시네마’를 사들여 극장 주인이 됐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과 팬들을 위한 행사를 직접 기획하며, “말을 걸 용기만 있다면 누구든” 기꺼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지 R. R. 마틴(1948~)
조지 레이먼드 리처드 마틴은 1948년에 태어난 미국의 작가 겸 프로듀서로 대하 판타지 ‘얼음과 불의 노래’가 HBO에서 ‘왕좌의 게임’으로 제작되며 명성을 쌓았다. 그는 미국 TV의 황금기에 나고 자란 첫 세대 작가이며, 코믹스와 SF소설에 심취해 어린 시절부터 활발하게 동인 활동을 펼쳤다. 언론학에서 미국의 명문으로 꼽히는 노스웨스턴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꾸준히 습작을 써서 잡지에 투고했고 1971년 ‘갤럭시’지에 단편 ‘영웅’을 발표하면서 SF작가로 정식 데뷔했다. 향후 10년 동안 마틴은 SF와 판타지와 호러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정적이고도 화려한 필치의 중단편들을 발표하며 포스트뉴웨이브 시대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고, 1974년 ‘리아에게 바치는 노래’로 휴고상을, 1979년 ‘샌드킹’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수상하며 SF계의 총아가 되었다. 1985년에는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환상특급’과 ‘미녀와 야수’ 등의 인기 TV드라마의 각본가와 프로듀서로 일하는 한편 SF 앤솔로지 시리즈인 ‘와일드 카드’의 편집자로 활약했다. 1990년대 들어 제작업을 그만두고 쓰기 시작한 대하 판타지 시리즈 ‘얼음과 불의 노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원작의 음울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 에미상과 휴고상을 받았다. 마틴이 직접 반세기에 걸친 자신의 작가 이력을 정리하고 작품을 선별하여 상세한 에세이를 추가한 ‘조지 R. R. 마틴 걸작선(GRRM: A RRetrospective)’이 2017년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심완선ㆍ SF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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