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류 여전해도 경제적 파급력 떨어져
공항 면세점ㆍ물관리 사업 등 진출했다 실패
ITㆍ인프라 등 차세대 산업서 길 찾아야
지난달 21일 찾은 태국 방콕 후웨이꽝 지역의 한류 복합쇼핑몰 ‘쇼 디씨’는 썰렁했다. 아세안 한류 중심지인 태국에서 지난해 4월 개장한 쇼 디씨는 한류스타들을 테마로 한 음식 거리와 화장품, 패션 제품을 선보이는 면적 18만㎡ 규모의 초대형 쇼핑몰로 태국에 불고 있는 한류의 랜드마크다. 가수 싸이와 비가 직접 투자했다는 음식점들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매장 직원들은 손님이 없어 손을 놓고 있었다. 의류매장 직원인 샤림(23)은 “한국 드라마나 연예인들의 공항패션이 인기를 얻으면 다음 날 바로 매장에 전시하고 있다”며 “하지만 정작 물건을 사가는 손님들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태국에서 한국 드라마와 K팝 등이 여전히 위력적이지만, 경제적 파급력은 추락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지난달 18일 한국 아이돌그룹 ‘샤이니’ 종현의 사망 소식 직후, 데일리뉴스와 방콕포스트 등 태국 주요 일간지들은 1면 머리기사로 태국 보건국이 발령한 ‘모방자살 경계’ 경보를 실었다. 태국 대학생인 왓사나(22)는 “애도 소식이 아닌 모방자살 주의보를 언론에서 1면에 다룬 건 처음 본다”며 “한류 영향력이 여전히 태국 젊은 층에서 엄청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류 열풍을 타고 그간 태국에서 잘나가던 한국 기업들의 활약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대표적인 분야가 한류 대표모델을 앞세웠던 화장품 업계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한국 드라마 ‘가을동화’로 태국에서 한류열풍이 불기 시작한 2002년 태국에 수출된 한국 화장품 규모는 약 80만달러에 불과했으나 2014년엔 3억80만 달러로 300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성장세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방콕 플런칫 지역 아모레퍼시픽 태국지사에서 만난 최웅 법인장은 “제품에 ‘한국에서 왔어요’라는 문구만 달아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던 시기는 이제 끝났다”며 “태국 화장품 시장에서 점유율 2위인 아모레퍼시픽의 연 매출 증가율도 3%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태국 온라인 유통은 한국기업에 여전히 고성장의 가능성이 있는 유망 분야로 꼽힌다. 중산층 확대에 따른 구매력 향상으로 지난 5년간 79.6% 급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태국에서는 일찌감치 진출한 동남아 최대 오픈마켓 ‘라자다’(중국 알리바바)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나라 ‘11번가’는 2016년에 진출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태국 정부는 ‘이커머스’(e-Commerce) 육성 마스터플랜(2017~2021)’을 통해 전자상거래 시장을 대폭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유현 한-태국 교류센터 대표는 “태국은 한류의 영향력이 여전한 만큼 한국산 소비재에 대한 태국인의 선호도는 여전히 높은 편”이라며 “태국에서의 신 남방정책의 성공은 제조업과 IT 산업 등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는 것뿐 아니라, 한국제품이 강세인 소비재와 그 제품을 판매할 유통망을 얼마나 강화하느냐가, 경쟁상대인 일본과 중국을 앞설 수 있는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현지 사정에 대한 치밀한 조사 없이 한류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진출했다가 사업에 실패하는 한국기업들도 속출하고 있다. 태국 면세점 사업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도 고전 중이다. 태국 정부로부터 방콕 쑤완나품 국제공항에 대한 면세품 인도장 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한 채 면세점 쇼핑몰 건설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는데, 수년째 허가가 나지 않아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태국 정부 관계자는 “그 한국 대기업은 2014년 태국 쿠데타 당시 군부 2인자인 쁘라진 짠덩 현 부총리 겸 법무부 장관과의 관계만 믿고 면세점 사업에 뛰어들었다”며 “하지만 태국 왕실 세력이 면세점 독점사업권을 내세우며 가로막고 있어, 인도장 설치 허가는 요원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2012년 태국 인프라 사업에 진출했던 한국수자원공사도 올해 중순 사업을 포기, 380억원의 손해를 입었다. 태국 현지기업 관계자는 “태국 정부가 물관리 사업 입찰조건에 ‘환경단체와 마찰 시 정부가 아닌 시공사가 해결한다’는 조항을 넣었는데 한국수자원공사가 그대로 받아들였다”며 “태국 지방에 짓다 만 댐들이 엄청 많은 이유가 강성인 태국 환경단체들의 반대 때문인데 수자원공사가 이런 사정을 전혀 사전에 점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신(新) 남방정책’이 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막연히 한류 바람만 믿고, 소비재 산업 위주로 진출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또 사전에 철저한 시장 조사를 통해 정보통신(IT)와 인프라 등 태국의 차세대 산업에 진출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태국 현지 한국인들의 조언이다.
태국 정부는 올해 11월 민정 이양을 위한 총선을 준비하고 있는데, 여기서 승리하기 위해 경제 성장에 매진하고 있다. 태국 정부는 2020년까지 대중교통, 철도 등 사회기반시설 분야에서 534억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고,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2021년까지 동부경제회랑(EEC) 인프라 개발에 45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전춘우 코트라(KOTRA) 방콕무역관장은 “태국 정부의 공공 발주 및 민관합작투자사업(PPP)으로 추진되는 인프라와 전력ㆍ신재생에너지, 에너지 분야 관련 기자재 건설 분야가 우리나라 기업들에는 유망한 차세대 수익 사업이 될 것”이라며 “태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일본이 30%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현재 3%에 불과해, 앞으로 태국에 대한 한국의 투자는 계속 늘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우리나라의 태국 방산시장 진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2014년 군부 쿠데타 성공 이후 태국 정부는 무기 구입을 크게 늘리고 있어 시장 가능성은 밝은 편이다. 하지만 태국은 빈부격차가 극심한 데다, 매년 홍수로 물난리가 나는 형편이어서 국민들은 군부 정권이 방산 예산을 늘리는 것에 반감이 거세다. 기업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태국 방산시장 진출 규모가 커질수록 한류로 애써 쌓은 현지 기업 이미지가 무너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방콕(태국)=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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