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연주자들과 미국 샌디에이고의 연주자들이 ‘한 날, 한 시, 한 무대에’ 섰다. 단순히 화상 연결을 통해서가 아니다. 서로의 악기를 연주하며 호흡을 맞추는 모습이 말 그대로 입체적이다.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연주자들이 3차원 입체 영상 사진인 홀로그램 형태로 서울 무대에 나타난다. 서울 관객은 샌디에이고 연주자가, 샌디에이고 관객은 서울 연주자가 눈 앞에서 ‘진짜로’ 연주한다고 느낀다.
서울과 샌디에이고 연주자들은 서로 떨어져 있는 장소 혹은 가상의 장소끼리를 연결하는 통신회선(탤레매틱스)을 이용해 합주가 가능했다. 서울의 대금, 가야금 연주와 샌디에이고의 트롬본, 베이스, 피아노, 플루트, 트럼펫 소리가 최첨단기술과 만나 실시간 연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서울예술대가 미국 뉴욕 실험극단인 ‘라 마마’와 함께 구축한 컬처허브를 활용해 만든 실험 예술인 ‘체인징 타이스(Changing Tides)’는 이렇게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예술 행태를 선보이고 있다.
예술과 기술은 이제 물과 기름 같은 관계가 아니다. 무대 위에 로봇과 아바타가 등장하는 장면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4차 산업혁명(4IR)이라는 수식으로 압축되는 21세기 기술 발전의 물결이 공연계에도 넘실거리고 있다. 홀로그램과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등 다양한 기술로 빚어낸 가상 공간이 공연 예술의 무대로 쓰이면서 전통적인 시ㆍ공간 경계는 무의미해지고 있다.
18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4IR 공연예술 컨퍼런스’를 열었다. 강연자로 나선 컬처허브의 아트디렉터 빌리 클라크씨는 VR과 AR 등 첨단기술이 예술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줬다. 미국 뉴욕에서 강연한 그는 화상 속 이미지로 서울에 나타났다. 그는 “예술가들이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탐색하는 게 중요하다”며 “단순한 시청자가 될 것인지 기술에 대한 발언권을 가진 예술가가 되는지에 따라 미래 예술의 발전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 통한 다양한 예술 혼합
예술가에겐 첨단기술 도입 시도가 예술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나가는 기회가 된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린츠에는 매년 9월 다양한 나라의 공학자와 예술가들이 몰려든다. 세계적 테크놀로지 축제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아르스)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아르스는 미디어 아트를 기반으로 음악, 디지털 등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지는 축제다. 아르스에서는 LED 조명을 단 드론을 하늘로 쏘아 올려 시각 예술을 구현하는 ‘스팍셀(SPAXEL)’을 선보이고 있다. 2016년 ‘인텔’과 협업한 ‘드론 100’은 지상에서 연주되는 베토벤 교향곡 5번과 드론들의 움직임이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새로운 예술 경험을 선사했다.
일본의 퍼포먼스팀 엔라(enra)도 ‘4차 산업혁명 예술’의 한 사례다. 무용수 8명과 비디오 아티스트 1명으로 구성된 엔라는 영상과 춤이 상호작용하는 무대를 선보인다. 영상이 단지 무대 배경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공연의 일부가 된다. 예전 무용수들이 여러 도구를 오브제로 활용해 던지고 굴리며 동작을 만들어냈다면, 21세기 무대 위에서는 스크린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된다. 무용수의 손에는 무대 위 스크린을 조정할 수 있는 센서라도 달린 것처럼 그의 움직임에 따라 스크린 속 이미지들이 변화한다.
관객과 상호협력은 더욱 중요
관객은 더 이상 팔짱 끼고 무대 위를 쳐다보는 존재가 아니다. 예술 안으로 기술이 스며들수록 관객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이는 세계적인 흐름이다. VR과 AR 같은 기술을 활용하면 관객의 공연 몰입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 극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디지털 공연예술 총론서 ‘디지털 퍼포먼스’의 저자인 스티브 딕슨 싱가포르 라셀 예술대학 총장은 공연팀 ‘더 카멜레온 그룹’이 선보인 ‘Net Congestion’을 소개했다. 공연은 무대 3곳에서 진행됐다. 카메라 4대가 촬영한 영상은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됐다. 관객들은 인터넷에 직접 극본을 써 올리며 공연을 연출했고, 배우들은 관객이 쓴 극본을 띄운 스크린을 보면서 즉흥 연기를 했다.
관객 참여형 공연을 의미하는 ‘이머시브 공연’은 한국에서도 즉흥극 형식 등으로 시도되고 있다. 더 카멜레온 그룹의 공연은 인터넷 공간까지 극장으로 흡수했다는 점이 다르다. 딕슨 총장은 “이러한 쇼에서는 인터넷 채팅방 사용자끼리의 소통, 또 채팅방과 극장 간의 소통이라는 두 가지 소통이 이뤄졌다”며 “사회적 공연과 연극적 공연이 혼합된 형태였다”고 말했다.
영국 런던의 관객 참여형 극단인 ‘COLAB’은 관객을 서사 안으로 끌어들여 각각의 캐릭터를 부여한다. 관객들은 서로 다른 극을 본다. 예를 들어 극 속 아이의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어떤 관객은 VR헤드셋을 쓰고 아이의 사망 전 여정을 뒤따라 간다. 다른 관객은 휴대폰으로 AR 기술을 실행해 다른 장면을 본다. 버티 왓킨스 COLAB 감독은 “우리는 공연 중 관객들이 휴대폰을 적극 사용해 극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며 “이런 기술을 공연에 접목하는 건 어렵지만, 관객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생일대의 경험을 주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국내 예술가들도 이런 흐름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이경성 연극 연출가는 지난해 무대에 올린 ‘워킹 홀리데이’의 무대 연출을 위해 배우, 스태프와 함께 비무장지대(DMZ) 일대를 걸어서 횡단한 경험을 들려줬다. 그는 “우리가 보려고 했던 장소들은 접근이 차단돼 있었다. 그래서 과거 DMZ에서 군 생활을 한 사람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 안의 자연과 지뢰를 관객들이 경험해 볼 수 있도록 VR로 구현했다”고 말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박혜인 인턴기자(중앙대 정치국제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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