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은 정의를 실어 나르는 수레”
12년간 이민자 동네 공익변호사
1979년 연방 제9항소법원 판사로
#2
이름 딴 ‘프레거슨 인터체인지’
가난한 히스패닉 마을 고속도 허용하며
“주민에 토목기술 가르쳐 고용” 조건
#3
DNA법 등 판결 뒤집힌 적 있지만
92세 은퇴까지 ‘사법적극주의 상징’
1947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고속도로 건설 10개년 계획을 승인했다. 인구 5,000명 이상 모든 타운을 거쳐 연방(주간)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총 연장 20만km 건설프로젝트였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전쟁 전후 급격한 인구 유입에 따른 대규모 택지 및 학교ㆍ상업시설과 공장 건설로 최악의 교통체증과 사고율, LA형 스모그로 몸살을 앓았다. 대규모 도로 건설 계획은 주민들의 토지 보상 및 주거대책 요구, 공원ㆍ사적지 훼손에 대한 반발 등으로 새로운 마찰을 빚었다. 도로는 70년대까지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다.
1972년, LA 남부를 관통하는 두 주간고속도로(Interstate 105/110)를 잇는 인터체인지 건설 계획으로 마을과 집을 잃게 된 히스패닉계 저소득층 주민들이 건설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연방지법 캘리포니아 중앙지원 판사 해리 프레거슨(Harry Pregerson)은 건설사의 손을 들어주며 특별한 조건을 달았다. 지역 주민, 특히 여성들을 우선적으로 고용하라는 거였다. 기술도 경험도 없어 안 된다는 건설사의 반발에 프레거슨은 목공과 용접 등 토목공사에 필요한 기초 기술교육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탁아시설을 먼저 지으라고 명령했고, 주 정부에게는 주민 대체 주거지를 조성하라고 주문했다.(law.berkeley.edu) 그는 판결 전 소송 당사자들을 불러 협상을 중재하며 자기만 도시락을 싸와서는 “여러분, 오늘은 긴 하루가 될 것 같은데 나만 도시락을 가져온 것 같군요. 식사할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여러분에게 달렸어요”라는 식으로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WP) 당초 예산의 두 배에 달하는 22억 달러를 들여 93년 완공한 인터체인지는 ‘프레거슨 인터체인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의 판결은, 공공건설 등 대규모 토목공사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눈높이를 높였다.
인터체인지가 들어선 마을은 프레거슨이 태어난 LA 우드랜드힐스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민 와 우체부로 일하던 아버지는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진보적 법조인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 1857~1938)를 우상처럼 여겨 어린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WP) 프레거슨은 47년 학생회장으로 캘리포니아대를 나왔고, 3년 뒤 UC버클리 로스쿨을 졸업했다. LA에서 2년 남짓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던 그는 53년 가난한 이민자 동네 밴 나이즈(Van Nuys)로 옮겨 사실상 공익변호사로 만 12년을 일했고, 캘리포니아 주 LA 지방법원 판사(65~67년)를 거쳐 67년 린든 존슨 대통령의 지명으로 연방 지방법원 판사가 됐다. 지법 판사시절부터 그는, 오늘의 산타모니카 만을 가능하게 한 LA 하수시스템 정화ㆍ정비 판결 등으로 이름을 날렸다.
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를 연방 제9 항소법원(9th Circuit Court) 판사로 지명했다. 10월 그의 상원 인준청문회가 열렸다. 도드라진 ‘리버럴’ 판사에 대한 공화당 의원들의 공세가 치열했고, 와이오밍 주 상원의원 앨런 심슨(Alan Simpson)이 그 선봉이었다. 심슨은 “어떤 사안을 두고 판례와 법규상의 판단이 양심과 배치될 때 당신은 어떻게 판결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프레거슨은 실제 삶에서는 그런 가정법, 즉 법과 양심이 명확하게 나뉘어 대치하는 예가 드물다고 말한 뒤 “하지만 정말 법적 판단이 내 양심에 어긋난다면 양심을 따를 것”이라고 대답했다. 놀란 심슨이 “다시 답변해달라(I didn’t hear, sir)”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내 양심과 법 조항이 조화할 수 있는 적절할 길을 찾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의치 않다면, 물론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나는 양심에 따라 판단할 것입니다. 나는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고, 미국의 전통과 관습과 신앙과 철학을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내 판단과 양심은 곧 내 존재이자 내가 받은 저 모든 교육의 결과입니다. 나는 내 양심을 따를 것입니다.”(weeklystandard.com)
프레거슨 같은 입장을 폭넓게 사법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라 한다. 법 못지않게 양심을 중시하고, 법 조항보다 사법 정의와 상식적 법의 취지를 존중하는 그 전통은 미국에서 시작됐다. 입법ㆍ행정 권력에 맞서 사법 분립의 취지를 무겁게 여기는 몽테스키외적 분립 전통과 주법(원)-연방법(원) 이원체제의 오랜 긴장과 견제에서 비롯된 경향이다. 사법적극주의는 그 자체로 선이라 말할 수는 없다. 좁고 가팔라 독선으로 미끄러질 수 있는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법적극주의가 미국의 법치와 법-체제의 보수성을 돌파하는 데 적잖이 기여해 온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프레거슨은 2차대전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해 두 다리에 총상을 입고 퍼플하트 훈장을 탄 해병 베테랑이자 거리의 변호사 출신이었다. 또 당시 그는 이미 종신직인 연방판사였다. 승진이라고는 하지만 서류만 들여다보는 항소법원 법률심 판사보다 당사자들과 부대끼며 사건 자체와 씨름하는 지방법원 사실심 판사직을 더 선호했을지 모른다. 미국 연방판사 연봉은 박봉으로 악명 높다. 거액 연봉을 받으며 로펌으로 가지 않고 판사직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물론 정계 진출 등 개인적 야심이 있다면 다른 문제겠지만, 썩 명예로운 일이다. 프레거슨의 당당함은 그런 배경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쨌건 그는 인준을 통과, 미국 13개 항소법원 중에서도 가장 리버럴한 법원으로 꼽히는 제9 항소법원(캘리포니아, 네바다, 애리조나, 아이다호, 몬태나, 알래스카, 하와이, 오리건, 워싱턴 주 관할) 판사가 됐다. 거기서도 그는 가장 리버럴한 판사이자 ‘사법적극주의’의 상징적 존재로 꼽히며 2015년까지 만 36년을 봉직한 뒤 원로판사(Senior Judge)가 됐다. 원로판사란 예우 차원에서 재판 업무를 거의 면제해주는 자리지만 그는 그걸 ‘배제’라 여겼다. 풀 죽은 그에게 아내(Bernardine, 1947~)가 “당신 지금 몇 살인지 알아? 92세야. 82세가 아니라고. 이제 좀 쉴 때도 됐어”라고 말하더라고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법은 정의(목적)를 실어 나르는 수레(수단)”라 믿으며 “판사인지 사회운동가인지 모르겠다”는 비판을 자랑스러워했다는 판사 해리 프레거슨이 지난 해 11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주목할 만한 그의 판결은 무척 많아, 사건의 맥락과 함께 일일이 환기하려면 책이 돼야 할 정도다. 그 중에는 대법원 상고심에서 패배한 것도 많았고, 제9항소법원 전원합의부 동료 판사들에 의해 뒤집힌 것도 적지 않았다.
2003년 그의 의료용 마리화나 허용 판결(Raich v. Gonzales 법무장관)은 2007년 3월 대법원에서 패소한 예다. 캘리포니아 주는 96년 미국 최초로 마리화나의 의료 목적 사용을 합법화(‘Compassionate Use Act)했다. 중증 환자가 의사의 권고나 승인을 얻어 주 내에서 마리화나를 소지ㆍ재배해 의료용으로 사용할 경우 환자와 의사에게 형사 면책권을 부여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저 법은 연방법인 약물규제법(CSA)과 충돌했고, 마약국과 연방경찰 단속 때문에 환자 등이 주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중증 뇌종양 환자 앤젤 라이히(Angel Raich, 1965~)와 만성 퇴행성 척추질환자 다이앤 몬손(Diane Monson)이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지법에서 패소한 뒤 항소했다. 제9항소법원 3인 재판부는 2003년 12월 2대1 평결로 환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sfgate.com) 프레거슨은 그들은 ‘약’을 구매하지 않았거나(몬손) 주 내에서 재배된 것을 구했으므로(라이히) 연방 통상법을 위반하지 않았고, 의사 권고에 따라 의료 목적으로 썼으므로 주법을 준수했으며, 사실상 유일한 치료제로 의사가 권한 ‘약’을 금지하는 것은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 판결 요지였다. 연방대법원은 2007년 3월 마리화나의 재배 자체가 본질적으로 상업 목적이라며 지법의 편을 들었다.
2003년 당시 캘리포니아의 민주당 재선 주지사 그레이 데이비스(Gray Davis, 1942~)는 닷컴 버블 붕괴에 이은 불황과 만성 재정적자, 초유의 전력위기 등으로 궁지에 몰려 1921년 이래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주지사 주민소환투표를 앞두고 있었다. 그 투표의 적법성을 두고 소송이 진행됐다. 9월 항소법원은 1심 판결을 뒤집고 한 달 뒤 예정된 소환투표를 6개월 늦추되 그 사이 LA와 샌디에이고 등 6개 카운티의 펀치카드 투표 시스템을 교체하라고 3인 재판부 전원 일치 판결했다. 펀치카드 투표는 천공 찌꺼기가 용지에 붙어 야기하는 전자개표 오류로, 2000년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의 대선 플로리다 주 투표에서 재검표 사태를 빚은 바 있었다. 프레거슨은 6개 주의 4만여 표는 전체 선거인단의 약 44%에 달하며, 그 상태로 투표를 진행하는 것은 수정헌법 14조(시민권 평등 조항)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그의 판결은 하지만, 특별한 사건에 한해 열리는 항소법원 전원합의부(En Banc) 평결로 뒤집혔고, 소환투표와 동시에 진행된 주지사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당선돼 11월 취임했다.
그는 혈액샘플(DNA) 제공을 거부한 한 은행강도(John Reynard)를 역성들기도 했다. FBI가 94년 주 범죄자를 대상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는 2000년 연방법(일명 DNA법)이 제정되면서 연방사범으로 확대됐다. 98년 샌디에이고은행에 침입, 2,325달러를 털어 도주했다가 며칠 뒤 자수한 범인은 13개월 형을 산 뒤 3년 보호관찰 대상자로 석방을 앞두고 있었다. 프레거슨은 FBI의 혈액샘플 요구가 수정헌법 4조(사생활 보호)와 5조(정부 권한 남용) 위반이며 부당한 소급(Ex Post Facto) 처분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findlaw.com)은 2007년 1심 판결을 지지했다.
반 종교단체인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FFRF)’이 2012년 몬태나 주 빅마운틴 국립공원 스키리조트 정상부에 세워진 예수상이 수정헌법 1조(정교 분리)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냈다. 한 가톨릭 종교단체(Knights of Columbus)가 2차대전 참전군인들을 기린다며 53년 세운 성상이었다. 1심은 FFRF의 편을 들었지만, 항소법원은 그 성상이 종교적 목적이 아닌 세속적 목적으로 세워진 사적물이라고 2대1로 판결했다. 반대자가 프레거슨이었다. 그는 “국유지에 선 높이 3.6m짜리 예수상이 판결문에서 밝힌 것처럼 ‘본질적으로 명백하게 세속적(predominatly secular in nature)’이라고 여길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달았다. 그는 앞서 상원 인준청문회 직후 인터뷰에서 “나의 양심은 십계명과 권리장전, 보이스카우트 선서와 해병대 송가의 산물”이라고 했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2차대전 필리핀 전선에서 미군과 함께 싸웠던 필리핀인 베르나르도 오르테가(당시 73세)가 귀화를 신청했다가 자격기한 만료로 88년 항소법원에 의해 반려되자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낸 것도 그였다. 기한이 만료된 것도 전쟁 직후 귀화 사무국의 책임이었지만, 그의 귀화를 허용할 경우 유사 사례가 잇따르리라 염려되는 상황이었다. 프레거슨은 소수의견에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국가의 양심은 우리가 그(원고)에게 더 나은 대접을 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그는 조국의 전쟁에 매우 용감하게 임했다”고 밝혔다.(law.justia.com) 사형제 반대론자였던 그는 92년 동료 판사들과 함께 살인과 은행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에 선 사형수(Robert Alton Harris)의 형 집행을 중단하라고 4차례나 명령하며 법에 ‘저항’하다 급기야 연방대법원이 나서 형 집행을 지시하게 한 예도 있었고, 캘리포니아 주 ‘삼진아웃법(94년)’ 즉, 중범죄 재범자가 세 번째 범행을 저지를 경우 폭력을 수반하지 않은 경미한 범죄여도 25년형 이상 종신형까지 선고토록 하는 법에 대해 연방대법원의 합헌 판정(2003) 이후로도 그에 맞서는 판결을 고집스레 반복했다.
프레거슨의 어떤 판결들은, 맥락과 취지를 아는 이들조차 고개를 젓게 했다. 양심과 상식은 최종적으로는 사적인 기준에 근거하며, 법은 그 한계와 위험성 때문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2015년 버클리 로스쿨 매거진 인터뷰에서 “우리의 범죄정의시스템은 실패할 때가 많고, 정치적으로 경도된 기소의 남용으로 감옥은 늘 만원”이라고 말했고, LA타임스 인터뷰에서는 “법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나로선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을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법은 약자에게 썩 동정적이지 않을 때가 가끔 있다”고도 말했다. 그는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어김없이 노숙자 푸드뱅크에서 일했다.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로스쿨 학장 케빈 존슨은 “그는 진정한 정의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힘 없고 집 없는 가난한 이들과 이민자, 동성애자들을 위한 법적 정의에 생을 바쳤다”고 말했고, 제9항소법원 동료인 스티븐 라인하트 판사는 “그는 법이란 정의를 실어 나르는 수레일 뿐이라 믿었던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말했다.(courthousenews.com) 그보다 한 해 뒤 항소법원 판사가 된 원로판사 윌리엄 캔비 주니어는 “그는 우리 법원의 신호등(beacon of our court)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cdn.ca9.uscourts.gov)
프레거슨은 “우리의 성공은 모두의 성공이어야 하며, 누군가가 낙오하면 모두가 낙오하는 것(If we succeed, we all succeed, If we fail, we all fail)”이라고 말했다. 그건 해병대 정신이었다.
부부는 1녀1남을 두었다. 피부과전문의로 ‘로던 필즈 Rodan+Fields’라는 꽤 유명한 스킨케어 업체를 설립한 딸 케이티 로던(Katie Rodan)은 “아버지는 세상을 구하고 싶어했다”고 말했고, 아버지를 이어 캘리포니아 연방지법 판사가 된 아들 딘은 “임종 직전까지 아버지는 ‘시민들을 더 도울 힘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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