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경기 시간 단축 등 바둑계 변화에 미온적 대응
한 때 일본은 세계 바둑계의 최강자였다. 바둑 천재로 알려진 한국의 조훈현 9단이나 조치훈 9단은 물론이고 현대 바둑 창시자로 불렸던 중국의 고 오청원(吳淸源) 9단도 일본 유학파였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세계 바둑의 중심지였다. 그랬던 일본 바둑이 최근 들어 긴 부진에 빠졌다. 세계대회 우승컵은 이미 10년 넘게 한국과 중국의 전유물로 굳어졌다. 한ㆍ중ㆍ일로 구성됐던 세계바둑의 중심 축도 한ㆍ중, 양 강 구도로 재편된 지 오래다.
일본 바둑계 간판인 이야마 유타(29) 9단마저 지난 8일 열린 ‘제22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3번기(3전2선승제)에서 중국의 신예기사 셰얼하오(20) 5단에게 226수만에 불계패를 선언, 준우승에 그쳤다. 일본 기전 통산 48회 우승 기록을 가진 이야마 유타 9단은 지난해 일본의 7개 타이틀을 모두 싹쓸이한 절대강자란 점에서 일본 바둑계의 충격은 컸다. 더구나 이야마 유타 9단은 이 대회 4강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중국의 커제(21) 9단까지 물리치면서 상승세를 탔던 상황이었다. 일본은 지난 2005년 ‘제9회 LG배 기왕전’ 타이틀을 가져간 장쉬 9단 이후, 아직까지 세계 대회 우승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일본 바둑의 침몰은 사실상 예견됐던 수순이었다는 게 바둑계 안팎의 공통된 평가다. 무엇보다 경기 시간 단축 등 급변하는 세계 바둑계 흐름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면서 국제 대회 성적 부진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당장 일본의 대표 3대 기전인 기성전과 본인방전, 명인전의 경우 각자 제한시간 8시간에, 1박2일 대국을 고수하고 있다. 갈수록 속기화되는 세계 바둑계 추세 속에 국제대회도 3시간 이내로 진행되는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바둑TV 해설위원인 이희성(36) 9단은 “아무래도 일본 프로기사들은 자국에서 열리는 장고 시합 규정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제한시간이 짧은 속기 기전인 국제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빨라진 현대 바둑 경기 방식과는 달리 일본 바둑은 아직도 늘어진 제한시간만 고집하다 보니, 대중들에게 외면 받고 바둑 인구도 줄어들면서 세대교체 실패까지 이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바둑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 또한 국제대회 경쟁력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한국과 중국에선 바둑이 냉혹한 승부인 스포츠로 자리매김 했지만 일본 내에선 아직까지 승패와 무관한 ‘예(禮)’나 ‘도(道)’의 수련 과정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 일본 바둑계는 치열한 승부를 떠나, 후세에 기억될 기보 남기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 만큼, 실전 바둑 경기에서의 치열함은 약해질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실효성 없는 공동연구 역시 일본 바둑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이나 중국은 다른 스포츠 종목처럼 촘촘한 시간표에 따라 연습 대국과 복기 등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국가대표팀을 운영하고는 있지만 강제성이 떨어진다.
이와 함께 일본 프로기사들이 세계대회 보다 상금 규모가 큰 자국 내 주요 기전 참가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는 점도 국제경기에서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한국 국가대표 감독인 목진석(38) 9단은 “매일 철저한 일정에 맞춰 돌아가는 한국이나 중국 국가대표팀에 비해 개인 사정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운영되는 일본 국가대표팀의 실력 향상 속도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며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면 일본이 세계대회에서 성적을 거두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내다봤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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