桐千年老恒臧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나무는 천 년을 묵어도 변함없이 자기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자기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치 않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 가지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신흠(申欽)이 노래한 매화와 버드나무의 품성이다. 시조는 매화의 지조와 고결함을 찬양한다.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 매화는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추운 겨울날 꽃을 피우기 때문에 꽃말도 고결, 인내, 충실, 맑은 마음이다. 봄 여행, 꽃 여행, 그 중에서도 매화 여행의 시작은 순천이 제격이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피는 금둔사의 납월매와 이보다 조금 늦지만 600년 자태를 뽐내는 선암사의 선암매를 소개한다.
흔히 보는 매화는 3월에 개화를 한다. 대표적인 매화 여행지인 전남 광양 홍쌍리여사의 청매실농원 축제도 3월 7일 무렵 시작한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 속 매화는 추운 겨울 눈 속에서 피어나는 설중매가 진짜가 아닌가 싶다. 한국에도 설중매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순천 금둔사다. 금둔사 설중매는 납월매(臘月梅)라 부르기도 한다. 음력 섣달 납월에 피는 매화라는 의미다.
“납월매 한 그루, 납월매 두 그루…” 그래 봤자 6그루밖에 없다. 원래 금둔사 납월매는 아랫마을 낙안읍성에서 자라던 매화나무가 고사하자 그 가지를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 접을 붙이려고 해도 잘 안 됐던 모양이다.
금둔사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찰이다. 호남고속도로 승주IC에서 상사호를 지나 낙안읍성으로 가는 고갯마루 중턱에 위치한다. 왕복 2차선도로 중간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올라가면 납월매를 볼 수 있다. 납월매가 필 때 즈음엔 홍매화도 함께 만개해 매화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금둔사를 품고 있는 금전산은 바위산으로 규모는 작지만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비슷한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한때는 석란이 유명했는데, 안타깝게도 전부 캐가는 바람에 이제는 그 흔적조차 볼 수 없다.
같은 순천 땅의 백제시대 고찰 선암사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600년 넘는 매화나무가 있다. 토종매실나무로 그 자태가 얼마나 고운지 따로 ‘선암매’라 부를 정도다. 2007년 11월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된 선암매는 키가 8m, 가슴높이 둘레가 1.2m에 이른다. 꽃 색깔이 유난히 붉고 향이 짙을 뿐만 아니라, 사방 13m로 넓게 퍼진 가지가 특히 아름답다.
선암사는 매화만 유명한 곳은 아니다. ‘화훼사찰’이라 불릴 만큼 경내에 수 많은 봄 꽃들이 그득하다. 이른 봄부터 홍매ㆍ백매ㆍ청매가 여기저기서 꽃망울을 터트리고, 왕벚꽃ㆍ백일홍ㆍ올벚나무 등이 3월 중순부터 5월까지 쉬지 않고 피어난다. 그 중에서도 대웅전을 지나 원통보전으로 가는 길에 돌담과 어우러져서 피는 ‘선암매’를 으뜸으로 꼽는 것이다. 이 매화를 보기 위해 봄이면 선암사에는 상춘객으로 북적댄다. 선암매는 청매실농원의 매화보다 조금 늦은 3월 중하순에 만개한다. 금둔사 납월매보다는 3~4주 늦는 셈이다.
선암사는 과거에 불이 많이 나는 사찰이었다고 한다. 오래된 건물 바람구멍에는 물 수(水)와 바다해(海) 자로 모양을 새겨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선암사 일주문 뒤편에는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산과 절의 이름을 바꿀 만큼 불이 잦았다는 의미로, 건물이 화마에 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엿보인다. 삼인당을 비롯해 경내에 유난히 연못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원근 여행박사 국내여행팀장 keuni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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