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면적은 47만5,000㎢, 한반도의 2배가 넘고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20여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종족이 공존하는 수마트라에는 남북 길이 100㎞, 평균 수심 20m, 최고 수심 900m에 이르는 바다 같이 넓은 또바(Toba) 호수가 있다. 백두산 천지의 141배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화산호수다. 담수 양은 영국 전체를 1m 덮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 호수 안에 길이 50~60㎞, 폭 30㎞에 달하는 ‘사모시르 섬(Pulau Samosir)’이 고구마 모양으로 박혀있는데, 면적이 서울시와 비슷하다. 제주도의 3분의 2 크기 호수에 서울이 들어 앉은 형국이라니.... 에펠탑에 오르면 에펠탑 없는 파리 시내를 보게 된다. 사실 또바 호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냥 지도를 보는 게 낫다. 그럼에도 이 호수와 섬은 충분히 가 볼 가치가 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하늘과 물빛
푸른색을 많이 봤지만 비슷한 색이 도저히 떠오르질 않는다. 하늘과 호수가 동시에 뿜어내는 강렬하고 깊은 푸른색에 마취된 것처럼 어질어질하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 아주 최소한의 막만 있어 자외선이 적나라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다. 실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호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고 보면 말이다.
또바 호수는 7만4,000년 전 화산폭발로 만들어졌다. 1993년 과학전문기자 앤 기븐스는 약 7만년 전 인간 진화에서 ‘인구 병목현상’이 발생했는데, 그 원인이 또바 화산 분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화산폭발로 400㎢의 재가 분출돼 6년 동안 하늘을 뒤덮었고, 이로 인해 지구 기온이 최고 15도나 떨어져 1,800년 동안 빙하기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폭발 규모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것이었고, 이로 인해 또바 호수가 만들어졌다. 또바 호수와 사모시르 섬은 7만 5,000년 자연사를 품고 있는 셈이다. 일단 물리적으로 또바 호수는 다양한 동물의 서식지를 분리하는 경계선이다. 호수 북쪽에는 오랑우탄ㆍ흰손긴팔원숭이ㆍ토머스리프원숭이가 살고 있으며, 남쪽에는 맥ㆍ안경원숭이ㆍ흑관머리리프원숭이가 서식한다.
문화적인 경계도 그어졌다. 또바 호수에 둘러싸인 사모시르 섬은 수마트라의 다른 지역과 분위기가 다르다. 지금도 섬에 들어가기 위해 1시간 정도 배를 타야 하는데, 옛날 사람들에게는 바다나 마찬가지였다. 섬 속의 섬, 바다 같은 호수를 건너 사모시르에 닿으면 비현실적인 푸른 빛깔의 바다와 하늘뿐 아니라, 이곳만의 독특한 역사를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수마트라 인구의 약 90%가 무슬림이지만, 사모시르 섬의 바딱 족은 개신교 혹은 가톨릭을 믿는다. 이 섬에 잔혹한 식인 문화가 있어 외부인이 들어가기를 꺼려했다는 설도 있다. 접근이 어려울수록 신화와 설화는 풍성해진다.
바딱 족은 성격이 급하고 목소리가 크고 감정기복이 심한 반면, 자바 사람들은 느리고 조곤조곤하며 격식을 따지는 편이다. 직설적이고 목소리를 크게 내기 때문에 ‘Batak Tembak Lansung(바딱족은 바로 쏜다)’는 표현이 있다. 호수와 산 기슭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목청을 높여야 하고 꼭 전할 말만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지인의 태도나 말투로 '친절도'를 평가하기 보다, 부족간에도 기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모쪼록 바탁족의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태도에 상처받지 않길 바란다. 당신을 싫어해서도, 이들이 특별히 불친절해서도 아니니 말이다.
좋은 경치를 자랑하는 여행지는 허다하게 많다. '비경'만으로 경쟁할라치면 마땅한 기준이 없어 순위를 매기는 게 무의미하고 그럴 이유도 없다. 대신 그 지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색다른 재미가 생긴다. 편의시설ㆍ숙소ㆍ먹거리 같은 뻔한 것들에 일희일비 할 필요가 없다. 또바 호수는 그런 점에서 아주 재미있는 별책부록이다. ‘인도네시아=발리’를 공식처럼 인식하는 한국인에겐 수마트라도 낯선데, 그 안에 또 다른 세상이 있으니 말이다.
사모시르 섬, 올해 가야 좋은 이유
되도록이면 올해 또바 호수를 가봐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동시간이 대폭 줄었다. 기존에는 메단공항에서 선착장이 있는 빠라팟 항구(Pelabuhan Parapat)까지 버스로 5시간, 빠라팟에서 사모시르까지 다시 보트로 1시간이 걸렸다. 그마저도 배 시간을 놓치면 빠라팟에서 하루를 묵어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또바 호수에서 가까운 실랑잇공항이 국제공항으로 승격돼 반나절이면 호숫가에 닿을 수 있게 됐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자카르타에서 가루다인도네시아항공, 스리위자야항공, 라이언에어 등을 이용하면 된다. 이로 인해 또바 호수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대거 밀려들 것이 뻔하고, 그러면 7만 5,000년 전으로의 호젓한 역사와 문화여행은 불가능해질지 모른다. '더 변하기 전에' 또바 호수를 가야 할 이유다.
두 번째는 올해 수마트라와 자카르타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때문이다. 18회 아시안게임이 8월 8일부터 9월 2일까지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와 수마트라의 팔렘방에서 열린다. 팔렘방에서 또바호수까지는 국내선을 한 번 더 이용해야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도 음식이 가장 맛있는 빠당(Padang)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부낏띵기(Bukittinggi)가 인근이라 인도네시아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또바 호수 가는 방법
자카르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서 비행기로 실랑잇공항에 내리면 오전 11시와 오후 1시30분에 떠나는 셔틀버스가 있다. 공항 개장 기념으로 올해 말까지 무료로 운행한다. 시간이 맞지 않으면 공항 밖에서 여행사 차량이나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차로 이동하면 빠라빳 항구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빠라빳 항구에서 사모시르의 숙박업소 밀집 지역인 뚝뚝(Tuktuk)을 왕복하는 배를 탄다. 승객이 많은 수상택시라고 보면 쉽다. 배는 뚝뚝의 남쪽 선착장을 시작으로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며 승객이 요구하는 숙박업소의 선착장에 내려준다. 승선할 때 미리 목적지를 말해야 하고 비용은 배를 타면 직원이 걷는다. 배 삯은 1만5,000루피아, 1,000원이 좀 넘는다. 수마트라의 물가는 너무너무 착한 편, 지역주민이 운영하는 근사한 전통가옥 게스트하우스가 1만원이면 충분하고, 5,000원이면 수제 커리, 나시고렝, 튀김 등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사모시르에서 가봐야 할 곳
시피소피소 폭포(Sipiso Piso Waterfall)
뿌숙부힛(Pusuk Buhit)
빠시르뿌티(Pasir Putih)
바딱 박물관(Batak Museum)
2011년 개관한 바딱 박물관은 3층으로 나뉜다. 탁 트인 1층에는 전통 돌 조각 전시공간이 자리하고, 2층 정원에서는 또바호수의 멋진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 바딱족의 상징인 시라자바딱(Si Raja Batak)이라는 7m 바딱 왕 청동상이 웅장하게 서 있다. 500년 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바딱 전통의복인 ‘울로스(Ulos)’ 및 고대 경전, 전통 무기, 보석류, 농기구 등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바딱 박물관은 인도네시아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박물관 중 하나다.
무뚝뚝하게 생긴 거대한 인형 시갈레갈레도 바딱족의 독특한 전통문화 중 하나다. 전쟁터에 나간 젊은 아들이 죽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왕이 아들과 닮은 인형을 만들어 창밖에 세워두고 시름을 달랬다는 것이다. 왕은 아들의 이름을 따 시갈레갈레(Sigale-gale)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바딱족 마을에 가면 이 인형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딱 양식 건물과 교회
자전거로 사모시르 섬을 돌면 오래된 바딱 건축물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체족과 바딱족이 수마트라 섬을 이루는 주요 부족인데, 아체족은 강경 무슬림이고 바딱족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한때 아체족이 바딱족을 노예로 삼을 정도로 탄압이 심했던 적도 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독교 문화가 발달 했는데 한국 못지 않게 십자가가 달린 교회를 흔히 볼 수 있다.
박재아 여행큐레이터 DaisyParkKorea@gmail.comㆍ사진제공 인도네시아관광청(VITO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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