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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시인 김용택 “월부 책 장사가 건넨 문학전집”

입력
2018.02.24 10: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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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시인' 김용택을 시의 세계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니라 월부 책 장수들이 자신에게 판 책들이었다. 그 책들을 죽어라 읽었더니, 어느 순간 자신도 시를 쓰고 있었다. 마음산책 제공
'섬진강 시인' 김용택을 시의 세계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니라 월부 책 장수들이 자신에게 판 책들이었다. 그 책들을 죽어라 읽었더니, 어느 순간 자신도 시를 쓰고 있었다. 마음산책 제공

책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는 스물두 살 때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초등 교사가 모자라던 시절, 고졸 이상이면 누구나 시험을 치르고 단기간 교육을 해 교사로 내보내던 때였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선생이 되어 이웃 면에 있는 작은 분교로 발령을 받았다.

어느 날 월부 책 장사들이 학교로 책을 팔러 왔다. 나는 그때까지 교과서 외에 읽은 책이 별로 없었다. 그 나이까지 책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고, 주위에는 책을 읽는 사람도, 읽을 책도 없었다. 내가 처음 산 책은 도스토옙스키 전집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그 책을 읽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니었다. 책 크기, 표지, 장정, 긴 수염에 우울해 보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진이 어쩐지 멋져 보였다. 책을 윗목에 놓아두었다. 내 방이 근사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책을 읽기 시작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처음 읽었다. 겨울방학이었다. 창호지 문을 신문지로 다 가려 햇빛을 차단하고 책을 읽었다. 방이 환해서 집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밥 먹는 시간도 화장실을 가는 시간도 아까웠다. 겨울방학 동안 일곱 권 전집을 다 읽었다.

방학이 끝나고 집을 나설 때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앞산이 있었고 강이 있었다. 산 속의 나무들, 강물 속의 큰 바위들, 이웃 마을, 논과 밭과 사는 사람들, 내가 근무하는 학교까지 걸어가는 강 길에서 본 것들이 처음인 듯 낯설고 다시 보였다. 모든 것들이 신비로웠다. 어쩐지 뭔가 큰일을 이루어낸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이 새로 보였으니까. 설레고 출렁이고 들뜨고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들로 나는 가슴이 벅찼다. 찬란이었다.

그 책 장사가 이번에는 헤르만 헤세 전집을 가지고 왔다. 다섯 권이었다. 때로 밤이 하얗게 밝아왔다. 헤세의 책들은 나를 허무맹랑한 허무와 외로움, 까닭 모를 방황과 괴로움, 시시때때로 찾아 드는 절망들로 요동치게 해주었고,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경로를 스스로 찾아가도록 안내해주었다. 앙드레 지드 전집도, 박목월 전집도, 이어령 전집도, 서정주 전집도 읽었다. 그러는 사이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로 부임했다. 거기서 새로 전근 온 선생 교실에 들렀다가 그 선생이 가지고 있던, 오십 권이나 되는 한국문학전집을 싸게 샀다. 한국문학의 모든 장르를 집대성한 전집을 첫 권부터 읽어나갔다.

그러곤 전주의 헌책방에도 가게 되었다. 책이 싸서 너무 좋았다. 월간지나 문고판들이었다. 방학이 시작된 날은 책을 지게로 한 짐 짊어지고 들길을 걸어 집으로 올 때도 있었다. 197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헌책방에서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뿌리 깊은 나무’ ‘계간 미술’ ‘동양 문화사’ ‘세계 문화사’ ‘한국통사’ 같은 책들을 두루 만났다. 그 책들이 일러주는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을 새롭게 접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새 책을 파는 곳도 가게 되었다. ‘홍지서림’이라는 전주의 한 서점은 내게 또 다른 세계였다. 새 책을 살 돈이 없었던 나는 책방에 들러 잡지 속의 시들을 읽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그 서점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나중에는 그 서점 아가씨가 간이의자도 내주고 빵도 사다 주었다. 1982년 나는 문단에 나갔다.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내 생각과 고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쓰곤 했다. 일기 비슷한 글들이었다. 어느 날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니, 시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써놓은 그 시가 무슨 말인지 나도 몰랐다.

달빛이 창호지 문으로 새어 들어왔다. 방 안에 달빛이 가득 찼다. 달빛으로 시를 썼다.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아 흰 종이와 연필을 머리맡에 놓고 자다가 돌아누워 달빛 위에 시를 썼다. 외풍에 어깨는 시렸다. 삶이 경이였다. 손에 잡히지 않은 것들이 휘몰아치고, 그것으로 넘어지고, 흩어지고, 깨지면서 꺼질 것 같은 절망의 끝에서 나는 빛을 찾아 세상으로 되돌아 걸어 나오곤 했다. 혹독한 자습과 예습의 자율적인 자가 훈련이었다.

그러다가 한 순간 내가 쓴 시가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형체 없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며 나를 혼란과 절망에 빠뜨리던 길들이 새벽 산길처럼 서서히 드러났다. 오랜 시간이 지난 날 드디어 내 글을 남도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여자 선생에게 내 글을 보여주었다. 시라고 했다. 시인이 되었다. 책이 내 삶이 되었고, 내 삶이 시가 되었다. 책을 처음 사본 지 13년 뒤였다. 시인이 되었을 때 작은 사회과학 서점 주인을 알게 되고, 그 집에서 13년 동안 외상으로 책을 사보았다. 1995년 책 외상값을 다 갚고 아내와 나는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열망 없이 살았다. 무엇이 되어 어디서 사느냐는 내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시골에서 선생으로 살면 되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바라는 것이 없으니, 안 이루어진 것도 없었다. 지금도 나는 지금이 좋다. 나는 책을 통해 막힌 문을 열고 또 열며 살아왔고, 살고 있다. 그러나 어찌 책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 왔겠는가. 책을 읽다가 보니, 나무와 바람과 논과 밭과 강이, 마을과 밤하늘의 별과 달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일이 다 내 책이었다. 내가 사는 작은 마을의 모든 것들이 다 서점이고 서재다. 나는 삶이 공부였고 배운 것들을 써먹으며 평생 공부하며 살게 되었다. 나는 알아서 나름대로 나만큼 산다.

배운 대로 다 따르지는 못하지만, 길이 막혀 서성일 때마다 책이 내가 가야 할 아름다운 길은 저쪽이라고 가리키며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러면 나는 또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나는 지금도 세상이 늘 새롭고 신비롭고 감동적이다. 세상이 너무너무 궁금하다. 살아 있다는 말이다. 살아 있을 때 바람을 느끼고 본다. 살아 있을 때만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야 새롭다.

책을 읽기 시작한 산골 그 방에서 나는 시인이 되었고, 지금도 그 집에 산다.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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