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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가 사는 세상] 전시를 디자인했다, 그림이 달리 보였다

입력
2018.03.10 10: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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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의 김용주 전시운영 디자인 기획관이 지난해 서울관에서 열린 ‘종이와 콘크리트’전시장에 서 있다.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에 합류한 김 기획관은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모든 전시의 공간을 디자인한다. 안웅철 사진작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의 김용주 전시운영 디자인 기획관이 지난해 서울관에서 열린 ‘종이와 콘크리트’전시장에 서 있다.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에 합류한 김 기획관은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모든 전시의 공간을 디자인한다. 안웅철 사진작가 제공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국현) 덕수궁관에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찾은 이들은 이중섭의 ‘벽화’를 만났다. 이중섭 그림 중에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은지화를 가로 16m 벽면에 프로젝션으로 쏘아 벽화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은지화는 평생 가난과 전쟁에 시달렸던 화가가 담뱃갑 속 은종이를 펴서 그린 것으로, 가로 길이가 16㎝가 채 안 된다. 그게 답답했던지 이중섭은 생전에 대형 벽화를 그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 꿈이 100년 뒤에 100배의 크기로 실현된 것이다.

“미술 작품, 보여주는 방식에 따라 달라져”

이 낭만적인 생각을 한 사람은 국현 전시팀의 김용주 전시운영ㆍ디자인 기획관이다. 그가 하는 일은 국현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모든 전시의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 작품을 벽에 매달까, 바닥에 놓을까부터 시작해 벽의 색깔, 공간의 높이와 폭, 조명의 위치와 세기, 관람자의 동선, 시선, 심지어 전시실의 온도까지,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 전반에 관여한다.

“전시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건 관람자들이 작품을 만나는 과정을 만들어주는 일이에요. 우리가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한다고 할 때 국현에서 보든 퐁피두센터에서 보든 작품은 같아요. 그러나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시 전경. 이중섭의 작은 은지화를 유리 상자 안에 전시하고 반대편 벽면에 100배 크기로 확대한 영상을 투사했다. 장준호 작가 제공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시 전경. 이중섭의 작은 은지화를 유리 상자 안에 전시하고 반대편 벽면에 100배 크기로 확대한 영상을 투사했다. 장준호 작가 제공

전시공간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국내에서 생소한 직종이다. 다수의 대학에 공간디자인과가 있지만 전시에 한정하지 않으며, 미술관마다 전시 디자이너가 있지만 주로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현재 전시공간 디자이너를 보유한 곳은 국립중앙박물관, 국현, 고궁, 민속박물관, 리움 미술관 정도. 나머지는 큐레이터들이 작품의 연구와 전시장 디자인을 같이 하고, 포스터 등 그래픽 작업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현대미술에선 전시공간 디자인이 꼭 필요하냐는 의문이 있었어요.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텅 빈 화이트 큐브가 작품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하지 않겠냐는 거죠. 전시공간 디자인은 이에 대한 반론에서 출발합니다. 누가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똑 같은 작품도 매번 새로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어요.”

2016년 이중섭 전시에서 김 기획관의 고민은 화가의 인지도였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이미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가지고 또 다시 사람들을 전시장으로 불러 모을 수 있을까. 그는 이중섭의 생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는 내내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불행하진 않았다. 지극한 가족애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을 피해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살던 시절 그렸던 그림은 그의 작품 중 가장 “행복한 그림”으로 꼽힌다. 김 기획관은 전시장 바닥에 당시 이중섭이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살았던 방의 크기를 흰색 선으로 표시했다. 전시를 보러 온 이들은 침대 하나 크기의 비좁은 방과 은박지 그림 속의 웃는 표정을 비교하며 인간 이중섭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이중섭의 작품은 그의 고된 삶, 한국의 아픈 역사와 떼놓고 말할 수 없어요. 작가의 생애와 시대상을 작품과 함께 조명해주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전시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과천 30주년 특별전, 상상의 항해’ 전시장 내부(위)와 외부. 두 건물을 잇는 유리 통로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했다. 독일 iF디자인어워드와 독일디자인어워드를 중복 수상했다. 장준호 작가(위 사진), 명이식 작가 제공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과천 30주년 특별전, 상상의 항해’ 전시장 내부(위)와 외부. 두 건물을 잇는 유리 통로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했다. 독일 iF디자인어워드와 독일디자인어워드를 중복 수상했다. 장준호 작가(위 사진), 명이식 작가 제공

레드닷, iF 등 2012년 이후 6년 연속 수상 기록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은 2017년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꼽히는 독일 iF 디자인어워드를 수상했다. 수상 기록은 이뿐이 아니다. 2010년 김용주 기획관이 국현에 합류한 뒤 2012년 독일 레드닷 디자인어워드를 시작으로 국현은 한해도 빠짐없이 유수의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레드닷 3회, 독일디자인어워드 5회, iF 디자인어워드 2회 수상 성과를 거뒀다. 하나의 전시가 두 개의 상을 중복 수상한 경우도 많다. 지난해엔 이중섭 전과 더불어 과천관에서 열린 ‘과천 30년 특별전, 상상의 항해’ 전과 서울관에서 열린 ‘공예공방, 공예가 되기까지’ 전이 iF 디자인어워드를 수상해 국현 3개관 동시 수상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수상을 하면 박수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저작권이 생겨요. 누군가 우리의 전시 디자인을 모방했을 때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의 수상기록이 우리가 최초임을 증명해주는 거죠. 전시공간 디자인의 입지가 작은 한국에서, 특히 국립 미술관이 이런 기록을 만들어간다는 건 아카이빙(자료 축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학에서 공간 디자인을 전공한 그가 원래 일하려던 분야는 미술이 아닌 자동차였다. 그는 “시동 켜는 소리로 ‘무슨 자동차 몇 년 형’이라는 걸 맞출 정도”로 알아주는 자동차 마니아다. 자동차의 성능을 공간적 경험으로 보여주는 일을 찾다가 미술관의 매력에 빠져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 계기는 역으로 미술에 대한 거리감 때문이었다.

“미술관에 가려면 뭔가 대단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늘 위축됐어요. 그런데 외국의 전시공간 디자이너들을 보니 바로 저 같은 사람을 위한 직업이더라고요. 예술에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을 공간을 통해 ‘주체적 관람자’로 만들어주는 거죠. ‘난 예술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에게 전시 디자이너는 ‘아냐, 네가 느낀 게 예술의 가치야’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해요.”

2012년 과천관에서 열린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전시 전경. 세대 간의 교류를 중시했던 건축가의 가치관을 구현하기 위해 벽을 뚫어 모든 전시실을 연결시켰다. 장준호 작가 제공
2012년 과천관에서 열린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전시 전경. 세대 간의 교류를 중시했던 건축가의 가치관을 구현하기 위해 벽을 뚫어 모든 전시실을 연결시켰다. 장준호 작가 제공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전을 준비하며 김용주 기획관이 그린 전시장 평면 스케치. 김용주 제공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전을 준비하며 김용주 기획관이 그린 전시장 평면 스케치. 김용주 제공

아직 인지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영역에서 김 기획관은 메달과 상패로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매번 문을 열어 젖히는 위치이다 보니 “찬바람도 많이 맞고 상처를 받은 적도” 있다. “어떤 분야든 하나의 영역이 독립할 땐 성장통이 있게 마련이에요. 그러나 전문성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포기해버리면 제 뒤에 오는 사람들도 길을 잃겠죠. 이왕 발을 디뎠다면 후배들에게 넘겨줄 바통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아직 전시공간 디자이너를 뽑는 곳은 많지 않지만 그 직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김 기획관은 해줄 말이 많다. 그는 “문화에서 공간적 경험은 빠질 수 없는 요소”라며 “전시공간 디자인에 대한 수요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과거 미술관은 도시의 랜드마크였어요. 전시를 어떻게 하느냐보다 미술관의 외관이 중요했고, 사람들도 미술관 앞에서 사진을 찍었죠. 지금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일명 ‘뮤지엄 셀피족(미술관에서 자기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사람들)’처럼 공간을 직접 경험하고 증거를 남기고 싶어하는 욕구가 높아졌어요. 전시공간 디자이너라는 직함이 생소할 뿐이지, 공간이나 전시 디자인을 전공한 뒤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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