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들이 불에 타면서 비명을 지르고 ‘안에 사람이 있어’하고 외치며 바닥의 물에 몸을 비비며 계단 쪽으로 나갔고 (중략) ‘못 빠져나온 동료가 죽었겠구나’, ‘나 또한 죽었구나’ 생각하는데 (중략) 우리 특공대가 언론에 매도되고 국민에 지탄받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희생된 철거민 농성자의 목숨도 우리 동료도 사랑하는 우리 국민입니다.“ -당시 작전에 투입된 경찰특공대 팀장의 진술서 중
“망루 3층에 있을 때 느닷없이 특공대원들이 올라오면서 철거민과 부딪히면서 철거민에게 불이 붙었고, 특공대도 불이 붙었어요. 그러다가 철수를 했는데, ‘아, 이거 심각하다. 그만 왔으면 좋겠다. 안 올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도 했었는데 머지않아 특공대가 다시 왔죠.” -망루 농성자 김창수씨
주차장이 됐던 참사 현장
한쪽은 버티려 했고 한쪽은 뚫으려 했다. 9년 전 겨울, 한강대로 옆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서 둘은 뒤엉켰고 함께 불길에 휩싸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지옥은 철거민과 경찰을 가리지 않고 6명의 목숨을 가져갔다. 5명은 철거민, 1명은 경찰이었다. 2009년 1월 20일 오전 7시 20분,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이 농성 중인 망루에서 발생한 화재는 1시간도 되지 않아 꺼졌으나 이렇게 참담한 결과를 남겼다.
불타버린 망루를 품고 있던 남일당 건물은 2010년 12월에 철거됐지만, 시공사와 계약이 해지되면서 공터로 6년간 방치됐다. 재개발이 멈췄고 사라진 목숨을 끌어안은 공간도, 남은 자의 아픔도 그대로였으나 참사는 점차 잊혀갔다. 이 공간에 다시 공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2016년 11월부터다.
그곳을 찾은 지난 2월, 참사 9주기가 지난 용산 4구역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건설 자재를 나르는 차량이 줄지어 출입했고 건설 노동자들이 찾는 작은 식당들이 울타리 옆에 있었다. 희생자의 얼굴과 ‘여기, 사람이 있었다!’는 문장이 그려진 허름한 울타리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널따란 건축 현장에 어울리는 높은 울타리들은 참사 현장에 어떤 시선도 닿을 수 없다는 듯, 재개발 사업의 청사진만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나가면 장사 못 한다’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이 처음 골랐던 장소는 남일당 건물이 아니었다. 처음 물망에 오른 건 ‘무교동낙지’가 있던 건물로 용산 4구역의 가운데 위치했으나, 고립될 위험이 크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힘들다는 이유로 대로변에 있는 남일당 건물이 낙점됐다. ‘남일당 건물’이라는 이름은 1층에 ‘남일당’이라는 금은방이 있었기 때문. 건물의 소유주기도 했던 남일당 주인이 2008년 재개발조합에 건물을 넘기면서 당시 빈 상태로 놓여있었다.
망루 농성을 결의한 철거민들은 모두 세 들어 장사하는 상인들이었다.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철대위) 소속 23세대 중 14세대가 식당을 나머지 9세대는 당구장, 여관, 비디오방, 옷가게, PC방, 금은방 등 다양한 업종을 경영했다. 참사 이전까지 10년 이상 영업을 하던 이들이 10세대로 가장 오래된 ‘실내포차’는 22년 가량 자리를 지켰다.
상가 세입자들에 대한 미비한 보상은 철거민들이 강경한 투쟁을 벌이게 되는 원인이 됐다. 철거민들은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억 단위의 금액을 시설 투자 및 권리금 명목으로 지급하고 들어왔다. 그러나 권리금은 언감생심, 투자한 시설비용도 일부만 보상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외에 주어지는 3개월 치 영업손실 보상금으로 다른 지역에서 새로 장사를 시작하기 힘들다는 것이 철거민들의 입장이었다.
화재 참사의 원인을 철거민들에게 물었던 사법부도 “사회적 약자인 재개발지역 내의 철거 세입자의 입장을 사회적으로 수용하지 못함에 따라 발생한 측면이 있다(1심 판결문)”고 밝힌 바 있다.
화염병 던지기 전에 특공대 투입 결정
철거민들의 요구는 재개발 기간 동안 임시로 장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를 이루려면 조합과 협상해야 했고, 협상을 위해서는 공사를 지연시킬 필요가 있었다. 철거민들이 망루 농성을 계획한 배경이다.
이들은 농성자들이 한 달 동안 먹을 식량을 들고 19일 새벽부터 건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망루는 오후 1시쯤 형체를 갖췄으나 이날 밤까지 설치는 계속됐다. 경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물대포를 쐈고 용역들은 건물 계단에서 폐타이어 등을 태워 유독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농성자들은 새총을 쏘고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다.
김수정 당시 서울경찰청 차장은 “철거민들이 도심 테러를 벌여 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지만 경찰특공대의 투입은 화염병이 투척 되기 2시간 전에 결정되는 등 당시 상황이 경찰특공대를 투입할 정도로 긴박했는지 의문의 여지가 많다. 19일 경찰과 철거민의 협상이 실패하면서 20일 오전 6시 30분부터 경찰특공대의 진압이 시작됐다.
참극이 빚어지기 전에도 한 차례 기회는 있었다. 망루 안팎에서 경찰과 철거민이 충돌하면서 7시 5분 1차로 화재가 발생했던 것. 망루는 1차 화재 이후 2층 바닥이 꺼지면서 인화 물질들이 쏟아져 화재에 취약한 상태가 됐다.
인화 물질 냄새로 진입이 힘들다는 대원들의 보고가 있었지만, 현장 책임자는 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채 작전을 강행했다. 7시 20분쯤 발생한 2차 화재가 크게 번지면서 참극이 빚어졌다.
당시 건물 아래에 있던 철거민들은 ‘여기 사람이 있다’며 울부짖었다. 생존을 위해 망루에 오른 철거민이나 명령을 받고 작전에 투입된 경찰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이들이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도록 등 떠민 건 누구인가.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같은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는가.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는 울부짖음은 여전히 메아리치고 있다.
글ㆍ사진=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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