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중재’로 시작된 한반도의 봄
대담하게 보조 맞추는 김정은 트럼프
일·중·러 패싱 우려 해소하고 함께 가야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왜소하고 미덥지 않던 문재인 외교안보라인이었다. 야당과 보수언론은 틈만 나면 물갈이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믿음직스럽다. 11일 2박 4일 방미를 마치고 귀국해 브리핑을 하는 그들의 얼굴은 물광이 났고 자신감도 보였다. 여장도 풀지 못하고 12일 베이징과 모스크바, 도쿄를 향해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은 짠하면서도 든든했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컬링스톤 강대국을 차례차례 무너뜨리며 국민적 열풍을 일으킨 여자 컬링스톤 국가대표 ‘킴팀’과 견주면 오버일까?
평창올림픽 이후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 정세의 대전환 국면에서 ‘문팀’의 활약이 눈부시다. 한반도 운전석 옆자리에 김정은을 앉히는가 싶더니 금방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함께 태웠다. 북미 간 물밑 접촉도 배제 못하지만 문 대통령의 ‘정직한 브로커 역할’(the role of honest broker, 영국 BBC방송 표현)이 주효했다고 봐야 한다. 백악관 앞뜰 브리핑장에 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영어 발음은 투박했다. 하지만 김정은의 북미 정상회담 제안과 트럼프의 즉각 수락 사실을 알리며 그 공을 전적으로 트럼프 대통령 리더십과 국제사회의 연대 덕분으로 돌릴 때는 전율이 느껴졌다.
그는 “대한민국은 미국 일본 그리고, 전 세계 많은 우방국들과 함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견지해 나가고 있다”고도 했다. 북한이 구체적 행동으로 보여 줄 때까지 압박을 지속하는 데 대한민국과 우방국들이 단합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현란한 상황전개에 불안과 혼란을 느끼는 측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홍준표 대표와 보수진영은 큰 박수를 보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평화 사기극”이라는 쇳소리만 어지럽다. 기-승-전-종북 프레임에 갇힌 평면적 사고로는 현재 전개되는 입체적 변화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미국과 조금만 입장이 엇나가면 코리아 패싱 아우성이 빗발쳤던 문재인 정부였다. 지난해 11월 베이징 한중 정상회담 과정서는 혼밥외교, 홀대론이 비등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도로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판이 열리자 일본과 중국에서 악 소리가 터져나왔다. 두 나라에서 각각 재팬 패싱, 차이나 패싱 우려가 높다니 격세지감이 든다. 시황제 대관식으로 경황없는 시진핑 주석은 방북·방미 결과 설명 차 베이징을 찾은 정의용 실장을 만사 제치고 만나 주고, 서훈 국정원장 일행을 맞는 아베 일본 총리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일본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초기 핵사찰 비용 3억엔(30여억원)을 대겠다는 제안까지 하고 나섰다. 자신들 머리 위로 진행되는 한반도 정세 대전환에서 소외되는 걸 끔찍이도 두려워하는 일본의 다급한 심정을 잘 보여 준다.
문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은 한반도 차량은 승합차다. 조수석에 김정은을 태울지, 트럼프를 태울지를 잘 판단하고, 한반도 핵심 이해관계자인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소외시키지 않고 동승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북한 비핵화와 항구적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은 6개국이 함께 해야 가능하고 1회성 담판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전진과 후진 좌회전과 우회전을 수없이 거쳐 야 할 장거리 주행이자 지난한 프로세스다. 엊그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한 이수혁 더불어민주당 의원(북핵 6자회담 초대 수석대표)은 2개 정부는 거쳐야 할 것이라고 했고,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빨라야 5~6년”이라고 했다.
이른 시일 내 가시적 성과를 원하는 우리 국민이나 11월 중간선거에 마음이 바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겐 커다란 실망일지 모른다. 그러나 비핵화 절차와 김정은 체제안전보장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내와 지혜, 시간이 필요하다. 행동 대 행동, 유리알 검증 방식만을 고집하면 부지하세월이다. 물론 기간을 줄일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대담한 상상력과 신뢰다. 영국 BBC방송이 평가했듯, 문 대통령의 정직한 중재자로서의 자세, 그리고 김정은과 트럼프의 선제적이고 대담한 기질이 무엇보다 희망적이다.
논설고문 겸 한반도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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