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캐릭터 오디세이] 부드럽지만 강하다, 넉살 좋은 '여자 하정우'

입력
2018.03.21 04:40
18면
0 0

데뷔 전 편의점 알바 경험

영화 리틀 포레스트서

사실적인 88만원 세대 연기

임순례ㆍ장준환 등 감독들

"자기중심 확실하고 단단해"

카톡 프로필은 세월호 추모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 많아

“겨울술은 으스스한 바람과 함께 마셔야 돼.”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김태리)은 '어른스럽게' 친구와 술잔을 기울인다. 김태리는 할머니와 유년시절을 보내고 극단 생활을 해 어른들과 지내는 게 익숙하다. 영화사 수박 제공
“겨울술은 으스스한 바람과 함께 마셔야 돼.”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김태리)은 '어른스럽게' 친구와 술잔을 기울인다. 김태리는 할머니와 유년시절을 보내고 극단 생활을 해 어른들과 지내는 게 익숙하다. 영화사 수박 제공

“배고파서 왔어.” 상영 중인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김태리)은 갑자기 고향(경북 의성)으로 내려온 이유를 묻는 친구 은숙(진기주)에게 “정말 허기져서 온 건데”라며 웃는다.

한국전쟁 피난민도 아니고 배가 고파 귀향이라니. ‘88만원 세대’인 혜원은 난민처럼 몸과 마음이 늘 허기진다. 서울 옥탑방에서 교사 임용 시험 준비를 하던 혜원은 밥 한 숟갈을 떠 입에 넣었다 결국 뱉는다. 냉장고에 넣어둔 편의점 도시락이 쉰 탓이다.

혜원에게 누군가와 감정을 공유하며 밥을 먹는 식사는 사치다. 노량진에서 홀로 먹는 컵밥이 그의 주식. 배를 채우기 위해 입에 욱여 넣는 ‘사료’로는 배가 찰 리 없다. 혜원의 어머니는 딸 수능 직후 어머니가 집을 떠난다. 홀로 서울로 올라와 대학 졸업 후 취업 준비를 하는 혜원은 늘 관계에 허기지고, 속은 채워지지 않는다. 시험에 떨어진 혜원이 야반도주하듯 고향에 내려와 처음 한 일은 눈이 내려 살짝 언 텃밭에서 배춧잎을 뜯어 전을 만들고 된장국을 끓여 허기를 달래는 일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에서 혜원(김태리)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한다. 김태리도 데뷔 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봤다. 영화사 수박 제공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에서 혜원(김태리)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한다. 김태리도 데뷔 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봤다. 영화사 수박 제공

허기진 ‘88만원 세대’… ‘을’로 산 김태리

혜원이 찐 시루떡을 맛본 죽마고우 재하(류준열)는 떡에서 “짠맛이 난다”고 한다. 혜원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짬을 내 삼각김밥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는 ‘짠내’가 가득하다.

혜원의 절절한 모습은 김태리의 경험과 무관치 않다. 김태리는 대학 재학 시절 편의점과 카페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현실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을’의 경험은 김태리에게 헛된 판타지를 지운다. 화사한 얼굴이 보여주는 순수와 그 밑에 드리워진 절망의 그늘. 이 극단적 이미지의 묘한 결합으로 김태리는 또래 스타보다 청춘의 명과 암을 더 선명하게 들춘다. 데뷔 3년 만에 충무로의 새 간판으로 떠오른 김태리가 지닌 강점 중의 강점이다.

영화 '1987'에서 연희 역을 맡은 김태리는 지난해 촛불집회에도 참여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1987'에서 연희 역을 맡은 김태리는 지난해 촛불집회에도 참여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스스로 깨닫고 행동하는 여성

김태리의 진취적 행보는 흥미롭다. 스크린 속 김태리는 늘 스스로 깨닫고 결정하며 행동한다. ‘아가씨’(2016)에서 숙희(김태리)는 백작(하정우)의 뒤통수를 치고 히데코(김민희)와 자유를 찾아 떠나며, ‘1987’(2017)에서 연희(김태리)는 이한열(강동원) 죽음 뒤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몰려든 시민을 보고 버스 위에 올라 주먹을 치켜든다. 김태리는 독립 영화 ‘문영’(2017)에선 자신이 누군가를 알기 위해 16mm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서성인다.

김태리가 택한 영화 4편의 화두는 ‘여성’과 ‘자립’이었다. 우윳빛 얼굴에 연약해 보이는 20대 배우는 자각하는 여성의 이미지로 자신만의 강인한 세계를 구축한다. “김태리는 매 작품에서 캐릭터의 처음과 끝이 달랐다. 각성의 순간과 내면이 강한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줘 연기의 보폭을 넓힌다.”(지혜원 대중문화평론가)

연약함 속 단단함이 숨어 있다. 배우 김태리는 영화 '아가씨' 등의 출연작에서 남성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용필름 제공
연약함 속 단단함이 숨어 있다. 배우 김태리는 영화 '아가씨' 등의 출연작에서 남성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용필름 제공

부드러움 속 뚝심... ‘여자 하정우’의 넉살

‘노출 수위 협의 절대 없음’. 김태리는 배우라면 감당하기 버거운 이 부담을 딛고 ‘아가씨’ 오디션에 지원해 1,500대 1의 경쟁을 뚫고 숙희로 발탁됐다. ‘아가씨’ 이후 대중적 행보가 기대되던 배우는 두 번째 영화로 ‘1987’을 택했다. 박근혜 정부 때 기획돼 투자 등에서 난항을 겪던 영화에 출연해 홍역을 치를 수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모험이나 다름 없었다.

28세 신예의 소신과 뚝심은 어디에서 왔을까. 영화감독들은 “자기 중심이 확실하고 단단해 보여”(임순례ㆍ장준환 감독) 김태리를 찾는다. “‘1987’이 두 번째 영화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해진과 하정우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연기해 놀랐다”(정원찬 우정필름 프로듀서)는 평도 따른다.

김태리는 주변의 상황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2016년 ‘아가씨’로 프랑스 칸국제영화제를 갔을 때도 주위 관심에 휩쓸리지 않고 행사 후 홀로 배낭여행을 떠날”(‘아가씨’ 스태프 A씨)정도로 당차다.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김태리는 지난해 촛불집회에도 참여했다. 그의 휴대폰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리멤버 20140416’이란 문구와 노란 리본이 새겨진 세월호 희생자 추모 이미지가 걸려 있다.

김태리는 학창시절 넉살 좋은 ‘여자 하정우’로 통했다.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내 연극 동아리 선배였는데 굉장히 사교적이다. 선배들한테 너스레도 잘 떨고. 공연 소품을 직접 만들 정도로 추진력이 강했다.”(연극 동아리 후배 B씨)

독립영화 '문영' 의 한 장면. 극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김태리는 성정체성을 두고 고민하는 여성과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KT&G 상상마당 제공
독립영화 '문영' 의 한 장면. 극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김태리는 성정체성을 두고 고민하는 여성과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KT&G 상상마당 제공

‘어떻게 연기할까’ 걱정 샀던 연극 스태프

김태리는 데뷔 전 3년 동안 극단 생활을 했다. 연기 전공을 하지 않았던 터라 처음엔 미숙했다. ‘어떻게 연기할까’란 주변의 걱정도 샀다. 극단 이루에 들어간 김태리는 조명 관리부터 시작했다.

무대에 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김태리는 2012년 연극 ‘넙쭉이’의 언더스터디(주역에 문제가 생겼을 때 투입되는 배우)로 투입됐다. ‘빌리 엘리어트’로 유명한 영국 작가 리홀이 쓴 1인극으로, 배우 강애심이 홀로 무대를 채우던 연극이었다. 손기호 연출가의 권유로 어느 날 무대에선 김태리는 짧은 리허설을 끝낸 뒤 바로 배역을 따냈다. “강애심이 울면서 김태리의 무대를 봤고 나중엔 두 배우가 번갈아 무대에 올랐다.”(손기호 연출가).

7월 방송될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김은숙 극본) 속 김태리의 모습. tvN 제공
7월 방송될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김은숙 극본) 속 김태리의 모습. tvN 제공

김태리는 스스로 캐릭터의 색을 입힐 줄 아는 배우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은 은숙에게 “그럼 얘 빼고 니만 불렀을까 봐?”라고 한다. 재하와 단 둘이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은숙이 삐쭉해 집으로 가려던 차에 던진 농담이었다. 애초 대사는 ‘왜 너 빼고 재하만 불렀을까 봐?’였다. 김태리가 임 감독에게 제안해 촬영 현장에서 대사를 바꿨다. 여성 둘이 한 남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이 아닌, 고교 동창끼리 우애를 나누는 관계로 캐릭터를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얼핏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의미가 참 다른데 김태리가 그걸 잘 캐치했다. 영화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부엌으로 갈 때 발로 재하를 차며 ‘저리 꺼져’라고 한 것도 김태리의 애드리브였다.”(임순례 감독)

할머니와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 김태리는 70년 된 한옥(‘리틀 포레스트’)에서의 생활이 어색하지 않았다. 김태리는 일제시대인 1900년대 초반(‘아가씨’)부터 태어나기 전인 1980년대(‘1987’)를 오가며 지나간 시간 속에서 빛을 발했다.

향수를 자극하는 청춘 배우는 더 머나먼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tvN 새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극본 김은숙ㆍ7월 방송)의 시대적 배경은 신미양요가 벌어진 1871년. 최근 공개된 티저 영상에서 김태리는 상투를 틀고 남장을 한 채 총을 겨눈다. 격동의 시대로 뛰어든 그는 또 어떤 모험을 준비 중일까.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