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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고통만은 면해 달라” 기도한 예수

입력
2018.03.24 09: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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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예수의 고난, 신앙의 위기

십자가를 지러 온 ‘신’이지만 십자가를 두려워한 ‘인간’

신앙적 위기를 넘어 결국 하나님 뜻대로…

“왜 나를 버리시냐” 외침 후 고통의 비명과 함께 숨 거둬

작자 미상의 15세기 작품 '그리스도의 수난'. 암스테르담 릭스뮤제움 제공
작자 미상의 15세기 작품 '그리스도의 수난'. 암스테르담 릭스뮤제움 제공

예수는 완벽한 신이며 완벽한 인간이다. 기독교의 이 교리가 이해가능 할까? 신학자들도 ‘신비’로 남겨두는 가르침이다. 신이지만 예수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철저히 겪어야 했다. 인간이 받아야 할 징벌을 대신 받는 ‘희생제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는 틀림없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반인반신쯤 되어 ‘슈퍼맨’처럼 징벌을 감당할 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처럼 고통에 고스란히 아파해야만 한다.

배우 겸 감독 멜 깁슨이 만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셨는지.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실감나게 살린 영화다. 그는 살이 찢기고 탈진에 허덕였으며, 다가오는 죽음 앞에 조금씩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우리가 가시에 찔리면 아프기 때문에 그는 가시 면류관을 썼으며, 채찍에 살이 뜯기면 고통스럽기에 그분도 채찍을 맞으셨다. 인간이 겪는 고통을 똑같이 겪어야만 했다.

예수는 고통을 겪었을까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예수는 정말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을까?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기 낳는 고통은 모르실 것이며, 결혼은 안 하셨으니 가장의 고충도 모르실 것 같다. 물론 우매한 생각이다. 고통을 종류별로 다 겪으셨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고통의 깊이와 그 심도에 의미가 있는 것이리라. 그래도 또 미안한 말이지만, 인간에게는 육체뿐만 아니라 내면의 고통도 있는데, 예수는 그것도 겪으셨을까? 공황장애나 우울증 같은 것 말이다. 그 중 최악의 내면적 고통은 ‘왕따’ 경험이라고 한다. 사람을 평생 가장 무섭게 누르는 정신적 심리적 사회적 장애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수는 왕따도 철저히 겪었다.

지오토 디 본도네의 14세기 작품 '예수에게 침례를 베푸는 요한'. 예수는 요한의 후계자쯤으로 인식됐다.
지오토 디 본도네의 14세기 작품 '예수에게 침례를 베푸는 요한'. 예수는 요한의 후계자쯤으로 인식됐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예수는 주변 사람들을 황당하게 하였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신 것이다. 즉 ‘메시아’라는 것인데, 당시 정통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람하기 그지없는 소행이었다. 메시아는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독립시켜줄 강력한 정치 군사적 지도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사회 지도자들이 예수의 뒷조사를 해보았을 것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얼마 전 목이 달아난 또 다른 ‘관심종자’가 있었다. 옷은 대강 걸치고 사막에서 노숙하면서 예언자 흉내를 내던 침례 요한인데, 예수가 그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침례를 받았으니 아마 ‘후계자’ 쯤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자격 미달 메시아’ 예수

유능한 정치 지도자가 되기에 그의 배경은 너무나 초라했다. 수도권에도 들지 못하는 시골구석 목수의 아들이었고, 하는 활동 역시 신통치 않아 보였다. 독립을 위한 투쟁은커녕 늘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며 병자나 고치고 인기를 얻는 소인배였다. 도대체 어떻게 나라를 구하려 하는지, 참담하다 못해 더 괘씸한 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와 정치인들을 어지간히 욕하며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예수는 가난하고 소외받은 계층의 민심은 꽤 얻었던 것 같다.

그에겐 12명의 ‘정예부대’가 있었는데 그 구성이 참 가관이었다. 고기 잡는 어부, 매국노 세리, 또 그들을 돌보는 이들 중엔 창기들도 있었다. 더군다나 예수는 서른이 될 때까지 장가를 가지 않아 유대 사회에서는 이상한 남자로 여겨졌다. 맘만 먹으면 ‘가짜뉴스’로 그들을 풍기문란 죄로 엮을 수도 있었다. 예수는 출생에 대해서도 소문이 안 좋았다. 그의 부모가 혼전임신을 하여 멀리 도망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는 어릴 적부터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예수의 돌발 행동에 사실 가장 당황했을 사람들은 그의 가족과 이웃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같이 동네에서 코 흘리며 놀던 큰형이 갑자기 자기가 왕이며 신이라고 했으니,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 실제로 예수는 선지자가 자신의 고향에선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며 그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요한복음 4:44)

대략 이 정도면 그가 얼마나 유대 사회에서 왕따를 당했을지 짐작이 간다. 진정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 예수는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고통도 처절하게 겪어야만 했다. 시골뜨기 출신으로서 목수 집 아들로 자란 모멸, 이해력이 떨어지는 제자들을 데리고 소귀에 경 읽듯 3년 간이나 훈계를 해야만 했던 불운한 선생의 고단함, 무엇보다도 아들의 끔찍한 말로를 눈치 채셨을 어머니 마리아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였던 불효자의 고통도 경험하셨다.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예수는 모진 고초를 겪으며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단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는 것에 능숙해서가 아니다. 쓰러지고 엎어지고 결국 남이 대신 그 십자가를 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랬던 예수가 마지막에는 처절한 절규를 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5:46)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 신이신 예수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미 징조가 있었다. 어느 날 예수는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질 정도로 절박했던 기도를 드렸었다. 기도를 드리기 전, “예수께서는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하셨다.”

매우 직접적으로 십자가 고통만큼은 면하게 해달라고 하신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마가복음 14:33-36) 예수는 십자가를 지시려 이 땅에 오신 ‘신’이었지만, 그 십자가를 그토록 두려워했던 ‘인간’이셨던 것이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예수가 그런 기도를 하셨을까?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며 자신을 내어 던지셨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르고자 했던 인간 예수에게 일종의 신앙적 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신으로서의 예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예수에게는 피할 수 없던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있으며, 그들에게는 영적인 고통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하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경험이다. 신이 자기를 버렸다는 예수의 마지막 절규는, 다름 아닌 이와 같은 말이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

하인리히 호프만의 1886년 작품 ‘겟세마네의 그리스도’. 예수는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고뇌하고 있다.
하인리히 호프만의 1886년 작품 ‘겟세마네의 그리스도’. 예수는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고뇌하고 있다.

고통 속에 죽어간 예수

채찍이 살을 후비고 지나가 눈앞이 아득해졌을 때, 예수도 인간이기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겁 많고 연약한 인간이 그랬을 것처럼, 그저 살려달라고 빌고 싶은 갈등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고백도 했고, 옆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을 위로하기도 하셨지만, 아마 ‘신’처럼 여유로운 모습으로 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몸뚱이가 마지막 순간에 그러하듯 경련에 떨고, 도통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아 겨우 내뱉은 말이었을 것이다. 왜 나를 버리시냐는 외침 후, 예수는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리를 외쳤다. 언어가 없는 그냥 고통의 비명이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마태복음 27:50)

오는 일주간은 기독교가 예수의 수난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이다. 성경은 예수가 하나님께 ‘어째서 날 버리느냐’는 외침을 던지고 고통 속에 죽으셨다고 한다. 분명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고통은 이와 같을 것이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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