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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마추어 스타] “한창땐 새벽까지 30게임 즐겨”

입력
2018.03.29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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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잡는 볼링 달인 이성균

고등학생 때 게임비 내기로 시작

운동신경 자부했지만 충격적 패배

오기 발동해 볼링장을 집처럼 출입

볼링장서 사랑 키우며 결혼 골인

일주일에 6일 동호인 대회 나가기도

2015년 한국선수권 우승 꿈 이뤄

프로 잡는 아마 볼러 이성균씨가 27일 서울 화곡동 KBS스포츠월드볼링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프로 잡는 아마 볼러 이성균씨가 27일 서울 화곡동 KBS스포츠월드볼링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2015년 12월 한국 볼링계는 깜짝 놀랐다. 프로와 아마 볼러들이 계급장을 떼고 맞붙는 한국볼링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첫 아마추어 선수들간의 결승전이 성사됐고, 서울 지역 동호회에서 고수로 통하는 이성균(45)씨가 2프레임부터 8연속 스트라이크를 기록하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990년 고교 시절 취미로 볼링 공을 처음 잡고, 귀금속 세공업체를 운영하던 그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프로들을 제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27일 서울 화곡동 KBS스포츠월드볼링장에서 어김없이 공을 굴리고 있는 이씨를 만났다. 볼링에 살고 볼링에 죽는다는 이씨지만 생각만큼 핀이 쓰러지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볼링은 정말 할 때마다 어렵다”고 했다. 볼링 고수인만큼 투구 시 스트라이크를 당연히 기록할 것처럼 보였지만 의외였다. 이씨는 “항상 어려운 것이 볼링”이라며 “경기장마다 레인 패턴은 천차만별인데다가 몸 컨디션에 따라 볼 컨트롤도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물론 볼링이 잘 안 될 때는 짜증나고 스트레스도 받는데 어려움을 극복하고 밀려오는 성취감이 더욱 좋다”면서 “볼링으로 즐거웠던 일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미소 지었다.

이씨가 볼링장에 발을 들인 건 오기 때문이었다. 평소 운동신경이 남다르다고 자부했던 이씨는 1990년에 친구들과 서울 압구정동의 한 볼링장에 처음 갔다. 쉬워 보이는 운동이라 게임비 내기에서 질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100점에 못 미치는 점수로 쓴 잔을 들이켰다. 당시 왼팔에 깁스를 한 상태라서 원했던 점수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깁스를 풀고 다시 볼링장을 찾았는데,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이씨는 “오기로 잘될 때까지 쳐보자고 했던 것이 지금까지 온 것 같다”며 “점수가 조금씩 오를 때마다 쾌감을 느끼면서 볼링에 빠져들었다”고 돌이켜봤다.

이씨가 볼링에 푹 빠졌던 1998년엔 아예 볼링장을 집처럼 여겼다. 약수동의 볼링장에서 매일 30게임씩 했다. 일과를 마친 뒤 새벽 4시까지 볼링을 치다가 사우나에서 잠깐 자고 출근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이씨는 “30게임씩 치고 난 다음날 공을 잡으면 손가락에 피멍이 들고, 손목에 통증이 있는 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쳤다”고 설명했다. 지금의 아내 서연정(43)씨도 어떻게 보면 볼링으로 이어진 인연이다. 당시 볼링을 함께 쳤던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나 볼링장에서 자주 어울렸고, 2002년 결혼에 골인했다.

하루 30게임씩 치며 볼링에 푹 빠졌던 이씨는 퍼펙트만 백 차례 넘게 기록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하루 30게임씩 치며 볼링에 푹 빠졌던 이씨는 퍼펙트만 백 차례 넘게 기록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2003년부터는 동호인 대회를 쉴 새 없이 다녔다. 당시엔 평일에 대회도 많아 일주일에 월요일 하루 빼고 6일을 대회에 나간 적도 있다.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한 탓에 아깝게 질 때도 많았지만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매년 우승 메달만 적게는 10개, 많게는 20개씩 가져왔다. 이씨에 따르면 지금까지 300점 만점을 의미하는 ‘퍼펙트’(12번 연속 스트라이크)를 100번 넘게 했다고 한다.

프로 볼러로 나서란 주변의 권유가 많았지만 개인 사업 때문에 불가능했다. 대신 프로들이 출전하는 대회에 나가 우승해 그 영광을 아내에게 바치는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5년 한국볼링선수권대회에서 마침내 꿈을 이뤘다. 이씨는 “늘 마지막 한 고비를 못 넘어 10위권 언저리에 머물렀고, 그 무렵쯤 엄청난 슬럼프도 와서 고생했다”며 “예선 때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는데 결승날 뭔가 딱 온 것처럼 볼링공의 인서트(손가락을 넣는 구멍의 고무패킹)를 교체하니까 손에 딱 맞는 그립이 잡혀 상상만 했던 우승을 일궈냈다”고 밝혔다. 당시 우승 상금이 2,500만원이었는데 그는 “돈 쓰는 건 금방”이라며 웃은 뒤 “아내에게 우승 선물을 안길 수 있어 매우 기뻤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니어(50대)를 넘어도 힘 닿는 데까지 볼링을 치고 싶다. 볼링엔 내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다. 아마 다시 태어나도 볼링 공은 놓지 않을 것 같다”고 볼링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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