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임원 딸 채용하니, 가맹점에 우리 제품 깔려”
끝자락 접힌 신입사원 서류 펴니,
절반이 ‘고위층 자제’ 청탁 꼬리표
대기업 임원 1년 5, 6건 이상 청탁 받아
기업 이미지 고려 자정 노력에도
고위층, 관계사, 내부 임원 자녀들
채용시즌 되면 취업 청탁 줄이어
공기업ㆍ금융사와 달리 실태 파악 어려워
“국회의원의 부탁이 있었다. 너한테 정말 미안하다.”
인턴사원으로 일했던 모 기업 정규직 모집 전형에 응시해 서류, 필기, 인성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 후 면접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던 이민서(가명)씨는 자신을 아꼈던 회사 상사로부터 얼마 전 충격적인 전화를 받았다. 국회의원 지인의 취업청탁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탈락해야 한다는 말에 이씨는 “충분히 실력이 있다고, 다음에 기회가 있을 거라고 위로를 받았지만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했다. 유명 취업정보 인터넷 사이트에서 회자한 이 사연에 취업준비생(이하 취준생)들은 “인맥사회의 부당함에 치가 떨린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 재벌 S그룹의 제약 계열사에서 2년 전 인턴사원으로 일했던 김하정(가명)씨는 인사팀에서 인턴들에게 실수로 보낸 이메일을 받아보고 기가 막혔던 사연을 털어놨다. 그 해 20명 인턴 중 10명 이상이 해당 그룹 계열사 친인척으로 별도의 표시가 돼 있었던 것. 이 업체 인턴은 추후 일부 정직원으로 전환되는 형태였다. 인사팀 관계자는 실수로 보낸 이메일을 외부에 공개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정부의 취업비리 근절 의지가 어느 때보다 뜨겁다. 하지만 공기업과 금융사에 한한 이야기다. 공기업과 금융사는 각각 기획재정부, 금융감독원이 관리ㆍ감독권을 갖기 때문에 전수조사로 취업비리를 밝혀낼 수 있었다. 반면 공기업 못지않게 취준생들의 선호도가 높은 대기업의 경우, 정확한 실태 파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일보는 대기업 내부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이들 기업에는 사회 고위층이나 이권이 걸린 관계사로부터 취업청탁이 끊이지 않고, 내부 임원 자녀에게 특혜를 주는 경우도 확인할 수 있었다. 청탁이 실제 부정채용으로 이어지는지는 기업에 따라 다르지만, 청탁이 몰리자 부담감에 공고를 취소하거나 응시 횟수를 제한한 경우도 있었다. 청탁을 용인하는 사회가 결과적으로 취준생의 금쪽같은 취업 기회를 갉아먹고 있음이다.
모 대기업 팀장인 정수영(가명)씨는 과거 다른 재벌 계열사인 유명 건설회사의 인사업무를 담당하던 친구로부터 하소연을 들었다. 친구가 보여준 해당 건설사의 신입사원 명단표는 오른쪽 일부가 접혀 있었다. 접힌 부분을 펼치자, 경영ㆍ관리 부분 신입사원 이름 절반에 ‘꼬리표’가 등장했다. 사외이사 아들, 어느 고위층 자제 등의 ‘신분’이 적혀 있었던 것. 이 문서는 회사 고위직들만 공유하는 ‘임원용’이었다. 기술력이 우선돼야 하는 엔지니어 채용은 청탁이 거의 통하지 않지만, 경영ㆍ관리부분은 채용청탁으로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정씨의 친구는 “공정함을 믿고 열심히 공부하는 취준생들 보기가 정말 미안할 정도”라고 자괴감을 호소했다. 더구나 일선 부서에서 청탁으로 합격한 사원은 함께 일하기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꼬리표 없는 애로 달라’는 요구가 많아, 인사 담당자들은 이중고를 겪는다고 했다. 채용청탁이 만연하자 대기업은 채용 청탁을 봉쇄하기 위한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등의 고육책도 시행하고 있었다.
선발 전부터 내정자 소문 파다
2016년 국내 유명 가공식품 업체 S사에서 일했던 김정호(가명)씨는 팀장으로부터 새로운 직원이 올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공채 외에도 상시 채용으로 직원을 뽑곤 했지만 그때는 선발 전부터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소문이 회사에 파다했다. 알고 보니 새 직원은 프랜차이즈 업체인 H사 고위 임원의 딸이었다. 해당 프랜차이즈 업체는 당시 가맹점주들에게 S사의 제품만 사용하라고 지시해 불만이 컸다. S사 제품은 프리미엄 제품이어서 다소 비쌌다. 김씨는 “우리 회사가 프랜차이즈 임원 딸을 채용하는 대가로 관계가 공고해져 그런 일이 발생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권과 대가성 채용, 그 결과가 죄 없는 가맹점주들에 대한 엉뚱한 갑질로 이어진 셈이다.
과거 공기업이었던 K사는 사업 특성상 정치권과 관가의 인허가 및 제도 변화에 민감하다. K사가 채용공고를 내자, 경쟁률을 알아보기 위해 친분이 있던 K사 담당자에게 문의했던 업계 관계자에는 “이미 다 정해져 있다. 공채가 아니고 이렇게 중간에 뽑는 것은 다 정해져 있다는 것 아직도 모르나”라는 말이 돌아왔다. 경영자로 낙하산 인사가 자주 오는 K사는 내부에서 “어느 팀 누구는 누구의 딸이고, 다른 팀 누구는 아버지가 누구다”라는 식의 소문이 일상적이다.
대기업 임원 “1년에 5, 6건 이상 청탁 받아”
국내 굴지의 대기업 김모 상무에게 채용 청탁을 얼마나 자주 받는지 물었다. 그는 “매년 취업철이 되면 5, 6건 이상씩 받는 것 같다. 하지만 원칙은 지킨다. 인사팀에 응시자가 어느 정도 위치인지 정도만 알아보고 원칙을 지켜서 하겠다고 알려준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은 인재 확보가 핵심이다”며 “아무리 압력이 들어와도, 누구나 똑똑하고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과 일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김 상무는 “계열사에서 운영하는 스포츠팀에 그룹 최고위층이 어디서 청탁을 받고 특정 선수를 뽑는 것이 가능한지 문의한 적도 있으나, 감독이 안 된다고 해서 이뤄지지 않았다”며 “아무리 청탁이 들어와도 기본적으로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공기업은 청탁에 휘둘리기 쉽지만, 사기업은 덜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다른 기업 관계자는 “청탁이 들어온 대상들이 학벌, 스펙 등이 결코 뒤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입장에서 취업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청탁 대상이 된 채용자가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다른 문제이며 청탁으로 채용됐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그는 지적했다.
물론 기업들이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만큼, 일률적으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한 대기업 전무는 “지난해 채용청탁을 3, 4건 받았다”며 “그럴 때면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지금 우리 딸도 취업 준비하느라 힘들어 잘 이해한다고 공감을 표하는 선에서 개인적으로 마무리할 뿐 청탁 내용을 회사에 전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누구 ‘빽’으로 들어왔다는 식의 소문이 돌면 사내에서 큰일 난다고 전했다.
국내 한 대기업은 사내 아나운서 채용 공고를 냈다가 어찌나 청탁이 밀려드는지 공고를 취소한 적이 있다. 이후 해당 대기업 계열사들은 모두 사내 아나운서 채용은 공고를 내지 않고, 채용 대행업체를 통해 아나운서 아카데미 등 교육기관의 추천을 받아 고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청탁으로 입사한 사람이라 해도 정확히 어떤 경로로 누구의 압력을 통해 들어왔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며 “국회의원일 수 있고, 사외이사일 수도 있고, 인허가권을 가진 관가일 수도 있고 다양하다”고 말했다.
삼성 응시제한, 청탁쇄도에 따른 고육책?
삼성그룹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대학 졸업 예정자와 직전 학기 졸업자에 대해서만 공채 지원을 받았다. 취준생들의 원성이 컸다. 삼성은 당시 “지금까지 다른 기업에 입사하고 나서도 삼성 공채에 응시하는 지원자 때문에 쏟아지는 ‘인재를 독식한다’는 비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지만, 업계에서는 밀려드는 채용청탁을 무마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삼성의 규정은 일부 다른 대기업에까지 확산했었다. 삼성은 2014년까지 대졸 신입 사원의 동일 계열사 입사 지원을 세 번으로만 제한하기도 했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에서 인사업무를 하는 친구에게서 ‘오죽하면 이렇게 하겠느냐, 청탁이 들어왔을 때 아예 이력서 입력이 안 된다고 답하며 청탁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하소연을 들었다”고 전했다. 삼성은 채용 인력이 많다 보니 청탁의 타깃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정확히 어떤 내막에서 지원 제한 정책이 나왔는지 지금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더구나 이런 청탁으로 채용된 사람들은 동료들이 부담스러워 해 본인도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워낙 불신이 깊다 보니 실력으로 입사했는데도 오해받는 피해자가 생긴다. 재계 관계자는 “청탁 취업이 아닌데도 청탁으로 소문난 경우가 있다”라며 “예전에 뽑고 나니 고위관리의 딸이었고 성실한 친구였는데, 주변의 수군거림에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임원 자제 특혜, 또 다른 채용비리
외부 청탁이 아닌, 내부 임직원 자녀나 친인척 우대도 채용 비리의 한 축이다. 등산복 등을 제조하는 국내 유명 의류업체 K사에 근무했던 최진호(가명)씨는 “공채 디자이너로 입사한 후배 중 한 명이 바로 옆 사업부 전무의 딸이었다”라며 “직전 공채에서는 디자이너를 해외채용으로 선발해 파슨스 디자인 스쿨 등 모두 유명 디자인 스쿨 출신들로 구성됐지만 그 후배는 학력이 떨어져 다들 의아해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21명 입사 동기 중에서 여자가 7명이었는데 이중 3명이 계열사 임원의 자녀였다”라며 “신입 공채 정원 일부는 이들을 위해 배정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남성 신입사원 중 임원 자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성이 취업하기가 비교적 힘들기 때문에 임원 특혜라도 받으려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내부자 청탁에 대한 대응은 기업문화에 따라 편차가 크다. 한 대기업 임원은 “만약에 자기 자녀 채용 청탁을 한 임원이 있다면 회사에서 망신을 당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대기업 임원은 “임원의 자녀가 경쟁 회사에 들어가면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과거에 우대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자정 노력 한다지만, 불안한 취준생들
채용비리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확산되면서 기업들 스스로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곳도 많다. 5대 그룹에 포함되는 모 대기업 계열사는 지난해 하반기 채용 전에 임원 및 팀장들에게 ‘채용 청탁 대응 매뉴얼’을 공지했다. 특정 지원자 전형화면을 조회할 경우, 로그 기록이 남도록 되어 있는 등 철저히 중간 개입이 없도록 하고 있으니 채용청탁을 받을 경우 불가능하다고 확실히 알리도록 독려한 것이다. 이 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최종 합격자가 발표된 후에야 출신과 학력 정보를 인사팀에서 받아볼 정도로 블라인드 채용을 정착시켰다”며 “채용 비리의 경우,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어 아주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신은 뿌리 깊다. 경기 고양시에서 교사로 일하는 김모씨는 “졸업한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누구는 공부 못했는데 아버지가 유명 대기업 임원이어서 그 회사에 들어갔다’고 허탈해하는 모습을 봤다”고 전했다.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김경민씨는 “안 그래도 취업이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데, 몇 개 없는 자리마저 채용비리로 빼앗기는 느낌이어서 허탈하다”며 “최근 뉴스를 보고 있으면 해외 취업이 더 유리하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김민우(대학 3학년 휴학)씨는 “현대판 음서제는 더 이상 뜬소문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렸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당시 공언했던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가 하루빨리 구현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이영석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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