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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DEEP 딥] 한없이 가벼운 '시사예능' 이대로면 독

입력
2018.04.06 04:4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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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사프로의 예능화

무거운 이슈까지 가십거리로 다뤄

#2

성추행 의혹 정봉주 두둔

‘블랙하우스’서 허점 여실히 노출

#3

시청률 경쟁에 객관성 잃고

진영논리에 말싸움까지

자극적 표현과 막말도 예사

‘정치관심 향상’ 순기능 옅어져

SBS 시사예능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성희롱 의혹에 휘말린 정봉주 전 의원의 거짓 해명에 힘을 실어주는 방송으로 질타를 받았다. SBS 제공
SBS 시사예능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성희롱 의혹에 휘말린 정봉주 전 의원의 거짓 해명에 힘을 실어주는 방송으로 질타를 받았다. SBS 제공

‘이명박 대통령 헌정방송’. 파격적인 수식어에 대중의 시선이 몰렸다. B급 유머를 곁들인 신랄한 풍자는 무거운 정치 이슈를 서로 편하게 주고 받을 수 있는 가벼운 대화 소재로 바꿔놓았다. 2011년 온라인 방송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는 정치 현안을 시시콜콜한 농담을 곁들여 풀어내면서 젊은이들이 시사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민감한 정치 사안을 편가르기 식으로 분석해 편향성의 위험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오락적 요소를 바탕으로 진행자인 방송인 김어준씨와 정봉주 전 의원은 스타로서 확실히 자리잡았다.

적지 않은 마니아 팬을 거느린 김씨는 이후 교통방송 ‘뉴스공장’ 등을 거쳐 지상파 프로그램에 진출했다. 지난 1월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건 SBS 시사예능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이하 ‘블랙하우스’)를 이끌고 있다. 블랙코미디와 시사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요소를 내세워 정치와 사회현상을 날카롭게 풍자하겠다는 의도를 비쳤다.

프로그램은 합리적인 의심을 바탕으로 탐사보도와 시사토론을 선보이겠다고 해 주목을 끌었으나 했으나 최근 정 전 의원에 대한 방송 내용 때문에 도마 위에 올랐다. 성추행 의혹에 휘말린 정 전 의원을 면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두둔하는 식의 방송을 내보내 비판을 받았다. ‘블랙하우스’는 사진기자에게서 제공 받은 사진을 토대로 정 전 의원이 무고한 희생자일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진행자인 김씨가 정 전 의원과 절친한 사이인 것이 널리 알려진 점을 고려하면 성급한 방송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결국 방송 후 정 전 의원의 해명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블랙하우스’는 김씨가 지인을 위해 ‘방송을 사유화’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블랙하우스’ 논란은 시사프로그램의 예능화가 지닌 허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대중의 지식과 정치적 관심을 향상시키는 순기능보다 시청률 경쟁에 매몰돼 객관성을 잃을 수 있는 점을 보여줬다. ‘블랙하우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명 ‘정치토크’가 유행하면서 시사예능프로그램은 패널들의 선정적인 싸움과 정치인들의 홍보수단으로 변질돼왔다.

80년대부터 시작된 정치+예능

시사와 예능은 정통 방송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다. 정치 풍자는 주로 예능프로그램을 통해서 이뤄졌다. 1987년 KBS2 ‘쇼 비디오 쟈키-네로25시’, 1999년 첫 방송된 KBS2 ‘개그콘서트’가 정치 풍자의 무대로 활용됐다.

시사프로그램은 정형화된 틀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KBS1 ‘심야토론’(1987)과 MBC ‘100분 토론’(1999) 같은 정통 시사프로그램은 시사에 능통한 진행자가 등장하고, 전문가나 관계자 4,5명이 출연해 방청객들 앞에서 토론을 펼치는 형식이었다. 정연한 논리와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주장을 하는 출연자가 눈길을 받는 프로그램이었으나 선정적이거나 민감한 현안을 다루지 않으면 시청률을 올리기 쉽지 않았다.

2004년 온라인 매체 미디어몹이 제작한 ‘헤딩라인 뉴스’는 시사예능프로그램의 원조다. 시사에 패러디를 동원해 정치나 사회 현상을 비판해 주목을 끌었고, 파격적으로 KBS2 ‘생방송 시사투나잇’의 한 코너로 지상파방송까지 진출했다.

2011년 4개 종합편성채널(종편)이 출범하면서 시사예능은 전성기를 맞았다. 입담 좋은 화제의 인물들이 진영논리를 바탕으로 말싸움을 벌이는 ‘정치토크’는 종편에게 효자상품으로 떠올랐다. 제작비는 상대적으로 적게 들면서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으니 지상파에 비해 자본력과 인력이 떨어지는 종편으로서는 매력적인 포맷일 수 밖에 없었다.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2011),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2013) 등은 편향성을 띤 미국 뉴스전문채널 폭스뉴스의 전략을 따르며 시청자를 확보했다. 2013년 예능 요소를 강화한 JTBC ‘썰전’이 인기를 끌면서 시사프로그램 제작 방향은 예능 쪽으로 더 기울었다. 최근 종편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사예능이 지상파에서까지 등장했다. ‘블랙하우스’ 역시 “생존방법을 찾으려는 지상파가 다양한 플랫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채영길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로 읽혀진다.

시민의 정치참여 촉진하는 시사예능

시사·정치 콘텐츠가 가벼워지는 현상은 세계적인 흐름이지만, 정치 논제를 가십거리로 다루는 예능 형식은 우리나라만의 특징이라는 게 언론학자들의 해석이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미국 아침뉴스프로그램 ‘굿모닝 아메리카’, 미국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와 같은 방송이 시사·정치 이슈를 대중화했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다루는 시도는 드물다”며 “우리나라는 인터넷 기반의 매체가 발달해 정치가 가십거리로 소비됐고, 이 재료가 그대로 (주류)TV방송에 적용됐다”고 말했다.

시사·정치 풍자가 일상화돼 있는 해외와 달리, 국내 방송은 “지난 10년간 정치 소재의 풍자개그가 위축”(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되면서 시사예능프로그램이 대안으로 떠올랐고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는 견해도 있다.

시사예능프로그램은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 시사예능프로그램이 시민의 정치적 관심을 향상시키고 정치 참여를 독려한다는 주장은 여러 연구에서 입증됐다. 2014년 한국언론학보에 실린 논문 ‘정보인가 오락인가: 정치 예능 토크쇼의 정치적 효과’(금희조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등)에 따르면 시사예능프로그램 시청은 대중의 정치에 관한 관심을 유도하고 소극적이나마 참여의사를 촉진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간에 잘 드러나지 않는 정치 이면의 진실을 짚어주고 사실에 근거한 정보를 전달하는 양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면, 시사예능프로그램은 건강한 여론 형성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다. 채영길 한국외대 교수는 “이슈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이슈에 대한 개입 의지에서 차이를 보인다”며 “시사예능프로그램은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정치 불신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고 했다.

SBS 시사예능 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 출연하는 개그우먼 강유미는 강원랜드 채용비리 청탁 및 검찰 외압의 의혹을 받고 있던 권성동 의원에게 기습질문을 해 화제를 모았다. 용감하다는 평도 있었지만, 시청자 시선을 끌기 위한 무례한 방식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SBS 방송화면 캡처
SBS 시사예능 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 출연하는 개그우먼 강유미는 강원랜드 채용비리 청탁 및 검찰 외압의 의혹을 받고 있던 권성동 의원에게 기습질문을 해 화제를 모았다. 용감하다는 평도 있었지만, 시청자 시선을 끌기 위한 무례한 방식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SBS 방송화면 캡처

탐사보도 프로그램, 다시 살아나나

시사예능프로그램은 패널이 어떤 성향의 인사냐에 따라 질이 좌우된다. 패널의 발언으로 프로그램 전반의 내용과 방향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편의 시사예능프로그램은 시청자의 눈길을 끌 만한 유명 정치인을 내세우면서 편향성이 두드러진 한계를 드러냈다. 다층적인 정보를 검증하기보다는 지엽적인 의제로 시선몰이를 하며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도 했다.

정치인과 유명인들이 인지도를 얻고 홍보 효과를 누리려는 전략으로 시사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자극적인 표현과 막말, 근거 없는 추측성 발언도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썰전’에 출연한 전원책 변호사는 이재명 전 성남시장을 향해 “원자핵공학을 했다면 세계적인 테러리스트가 됐을 것”이라고 발언해 뭇매를 맞았다. ‘블랙하우스’에 출연하는 개그우먼 강유미는 강원랜드 채용 비리 의혹에 휩싸인 권성동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딜러 복장을 하고 찾아가 “강원랜드에 몇 명이나 꽂았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답변을 받아내려는 목적보다 보여주기식 기법으로 화제몰이에 나선 것이다.

김헌식 동아방송예술대 교수는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데 웃기려고 하다 보니 뉴스 전달보다 화제를 쫓는 주객전도 현상이 벌어진다”며 “정치를 지나치게 희화화하며 문제를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시사·정치가 예능적 발랄함을 갖는 건 좋지만, 확증된 내용을 다루는 책임감 있는 자세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자극적인 시사예능프로그램에 대한 피로감으로 정통 탐사 저널리즘이 다시 인기를 끌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파업 사태를 겪은 공영방송은 KBS2 ‘추적60분’ MBC ‘PD수첩’ 등 정통 시사 프로그램 제작을 강화하며 신뢰도 회복에 나서고 있다. 이전보다 젊어진 접근 방식이 눈에 띈다. 새롭게 단장한 MBC ‘100분 토론’은 맛칼럼니스트 황교익과 최승호 MBC 사장이 음식으로 언쟁을 벌이는 모습을 예고편으로 내보내 젊은 시각을 반영할 것을 암시했다. 김헌식 교수는 “정국이 안정화되면서 신변잡기식 시사예능프로그램의 효과가 떨어지고 있다”며 “신뢰감 있는 정통 시사 프로그램을 소비하려는 욕구가 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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