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설립돼 세계 최고의 장난감 회사로 군림해 온 레고 블록도 한 때는 무너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비디오게임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 확장을 시도하다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2003년의 일이다.
무너져 가던 레고를 살린 사람은 설립자인 크리스티안센 가문이 처음으로 집안 바깥에서 최고경영자(CEO)로 발탁한 요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50) 회장이었다. 36세의 어린 나이였던 2004년 CEO에 오른 그가 회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비결은 주력이 아닌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핵심인 레고 블록에 다시 집중한 전략이었다. 파이낸셜타임즈는 “어떤 리더는 무너지기 직전의 회사를 구하고 어떤 리더들은 좋은 기업을 더 훌륭한 기업으로 성장시키지만 지난 12년간 레고의 크누스토르프처럼 두 가지를 다 해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평가했다.
난파선을 구한 34세 컨설턴트
“우리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2003년 6월 덴마크 빌룬에 있는 본사에서 열린 레고 이사회에는 도발적이고 단호한 내용의 보고서가 제출됐다. 당시 레고는 꾸준히 이익을 내고 있었지만 기회비용을 감안하면 사실상 적자 기업이나 다름없었다. 보고서는 2003년 매출이 30% 감소할 판인데도 운영 비용으로만 2억5,000만달러를 들여야 한다는 점, 2004년에는 순손실이 두 배로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레고는 ‘혁신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1958년 발명한 레고 블록은 30년이 지난 1988년 특허가 만료돼 여러 기업들이 생산할 수 있게 됐다. 비디오 게임 시대가 오면서 아이들이 더 이상 레고를 가지고 놀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커졌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당시 2000년 레고의 상황을 다룬 기사에서 “아이들은 등만 두드리면 가상의 애완동물이 살아나는 환경에서 수백개의 플라스틱 벽돌로 뭔가를 쌓는 수고를 원하지 않는다”며 “예전보다 더 어린 나이에 전통적인 장난감에서 벗어난다”고 진단했다.
1990년대 중반 매년 5가지 새로운 테마를 선보이면서 장난감 종류를 늘려가던 레고는 이 전략이 실패하자 다른 방향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비디오 게임과 연계한 새로운 장난감인 ‘갤리도어’ 라인을 만들고 조립형 영화 스튜디오인 ‘무비메이커’를 만들기도 했다. 본사가 있는 빌룬에만 있던 레고랜드를 영국과 미국, 독일에 차례로 세웠다. 스타워즈, 해리포터를 주제로 한 레고 키트는 영화 흥행에 힘입어 2001~2002년 예상보다 큰 성과를 회사에 안기기도 했다.
문제는 무리한 사업 확장이 회사의 토대를 흔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2003년 6월의 보고서는 수익에 비해 과도한 비용 지출이 회사에 독이 될 것으로 비판했지만, 이사진은 스타워즈 시리즈의 성장에 취해 있었다. 2003년 실적 발표 결과 레고의 손실은 1억6,000만달러, 부채는 8억달러에 이르렀다. 보고서의 예언대로 파산 직전까지 몰린 상황이었다.
보고서를 쓴 사람은 2001년 9월 레고의 전략 개발 책임자로 입사한 34세의 컨설턴트 크누스토르프였다. 덴마크 오르후스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를 거친 그는 이사회에서 쓴소리를 뱉은 이듬해 레고의 첫 외부 출신 CEO에 올랐다.
핵심으로 돌아가라
크누스토르프 회장이 CEO로 취임할 당시 레고는 성장은커녕 생존을 고민해야 할 시기였다. 바비인형 제조사인 마텔에 인수를 당할 뻔한 시기도 있었다. 크엘 키르크 크리스티안센 당시 회장은 2004년 2월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올해 목표는 손익분기점을 되찾는 것”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젊은 CEO가 내놓은 생존 계획은 핵심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비용을 줄이고 사업을 매각하는 등 회사의 몸집을 가볍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레고랜드의 지분 70%를 사모펀드 운용사인 블랙스톤에 팔고 이익이 나지 않는 제품을 폐기하는 등 비주력 사업을 정리했다. 전체 인원의 3분의 1을 구조조정하고 인건비가 많이 드는 공장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다. 자체 유통망인 레고 스토어를 확장하는 대신 기존의 유통 채널을 살리는 데 힘썼다.
그리고 회사 이름에 담긴 ‘재미있게 놀아라(Leg Godt)’라는 핵심 가치에 집중했다. 유아용 장난감 시리즈 ‘듀플로’ 시리즈를 되살리고 성인들을 위한 ‘테크닉’ 시리즈도 내놓았다. 매출에는 큰 기여를 했지만 브랜드 수수료 부담이 큰 스타워즈나 해리포터 시리즈를 대체하기 위해 일본의 닌자를 테마로 한 ‘닌자 고’를 자체 기획했다.
크누스토르프는 일시적으로 인기를 끌 만한 테마에 매몰되기보다는 확장 가능한 레고 생태계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단순한 블록을 자유롭게 조합하는 과정에서 어린이들의 창의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과거의 성공 DNA를 되찾는 과정에서 1990년대 초까지 레고의 핵심이었던 디자인연구소도 다시 강화했다.
또 중복되거나 불필요한 블록 생산을 중단하면서 1997~2004년 6,000종에서 1만4,200종으로 불어난 블록 종류를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 비용 절감과 레고의 본질 회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서 레고 놀이에 주로 사용되는 표준 블록 비중을 70% 수준으로 늘렸다.
크누스토르프의 혁신은 무너져 가던 레고를 세계 1위 장난감 기업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2004년 67억 크로네까지 줄어들었던 매출액은 12년 연속 증가하면서 2016년에는 379억 크로네(6조6,700억원)까지 늘어났다.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2007년 4,199명까지 감소했던 직원 수도 지난해 1만6,480명으로 불어났다.
13년 만의 매출 감소 극복할까
이달 초 레고는 실적 발표를 통해 지난해 매출액이 2016년 대비 7.7% 하락한 350억 크로네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크누스토르프 회장이 취임한 2004년 이후 이어진 매출 증가 행진이 13년 만에 멈춘 것이다. 지난해 9월에는 상반기 매출을 공개하며 전체 직원의 8%를 정리해고하기도 했다. 크누스토르프 회장은 레고가 처한 상황을 “길 위를 가던 차가 도랑에 빠진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레고의 매출 감소는 전통적인 완구 업체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숙명이다. 유튜브나 비디오게임 같은 디지털 매체가 성장하면서 어린이들의 놀이 문화도 바뀐 것이다. 세계 최대의 장난감 유통업체 토이저러스가 최근 매장 폐쇄 절차에 들어갔고 바비인형의 마텔도 계속된 실적 부진을 겪고 있다.
완구업체들이 장난감 현대화에 주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레고도 기존 블록 장난감에 모터와 센서를 탑재한 ‘레고 부스트’를 내놓는 등 장난감 현대화에 부심하고 있다. 레고 부스트는 애플리케이션(앱)과 연동해 조립한 장난감을 움직일 수 있어 ‘코딩 로봇’으로 불리기도 한다. 레고는 또 직접 만든 레고 장난감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레고 라이프’를 공개하기도 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크누스토르프 회장은 디지털화하는 놀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난해 10월 닐스 크리스티얀센을 CEO로 선임했다. 크리스티얀센은 덴마크 냉난방 설비 업체인 댄포스를 9년간 이끌면서 전통적 제조기업을 디지털 기업으로 이끈 경영자로 평가 받는다. 크누스토르프 회장은 CEO 내정 사실을 밝히면서 “크리스티얀센의 디지털화, 세계화에 대한 경험과 혁신적 전략이 레고 그룹에 이익이 될 것”이라며 “이사회는 레고 그룹이 전세계의 더 많은 어린이들에게 놀이에 대한 경험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위기의 레고를 세계 최고 장난감회사로 올려놓은 크누스토르프의 마법을 새로운 CEO가 재현할 수 있을지에 세계의 관심과 레고의 운명이 걸렸다.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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