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장에 떴다 하면 모두의 시선을 한눈에 끄는 이가 있다. 라켓을 잡고 몸을 풀기 시작하자 주변 동호인들은 일제히 숨을 죽인다. 몸이 풀리고 제대로 된 스윙이 나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누른다. 잠시 쉴 땐, 사진촬영 요청이 쇄도한다. 전국대회 115회 우승, 랭킹 1위 12년. 여성 테니스 동호인계의 ‘셀럽’ 고미주(51)씨를 9일 인천 송도국제어린이도서관 테니스코트에서 만났다.
남편 따라 입문…이젠 남편보다 테니스가 더 좋아
고미주씨가 처음 테니스를 접한 건 28년 전,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 남자친구를 만나면서부터다. 부업으로 사설 테니스코트를 운영할 정도로 테니스 마니아였던 남편을 따라 라켓을 잡았다. 그는 “옆에서 보니 재미있어 보여서 쳤는데, 금방 실력이 늘었다. 그렇게 스물일곱 살 되던 해에 본격적으로 테니스에 빠지게 됐죠”라고 회상했다. 그러더니 “지금은 제가 남편보다 훨씬 더 잘 쳐요. 테니스가 남편보다 더 좋아요”라고 농담처럼 말하며 활짝 웃었다.
학창시절부터 육상, 탁구 등을 즐기며 몸에 벤 운동신경 덕이었다. 재미가 붙자 실력이 금방 늘었다. 하지만 대회는 나갈 수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만 30세가 돼야 참가 자격이 주어졌어요. 30세 생일 넘기자마자 바로 개나리부(신인부) 문을 두드렸죠. 두 번째 참가 만에 우승해버리고 국화부(개나리부 우승한 동호인들이 겨루는 대회)로 넘어갔어요.”
최연소 나이로 당당히 입성했지만 국화부의 벽은 높았다. 첫 1년은 예선탈락을 면치 못 했다. 오기가 발동했다. “저는 무엇인가에 필이 꽂히면 한 없이 빠져드는 성격이에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종일 테니스장에 있었죠. 밥도 테니스 장에서 먹었어요. 그땐 정말 테니스가 저의 모든 것이었어요. 살벌한 국화부 언니들을 상대하려면 그렇게 해야 했어요.”
한창 칠 때에는 일주일의 대부분을 테니스 코트에서 살았다. 아들과 딸도 테니스 코트 흙에서 뒹굴며 자랐다. 지방을 다니며 대회를 다녔다. “국내를 가든 해외를 가든 여행 갈 때에도 항상 라켓을 들고 다녔어요. 아무리 멋진 휴양지에 가서도 그 곳에 테니스 코트가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했죠.”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집에 들르지도 않고 비행기를 갈아타 제주도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그는 테니스에 빠졌다.
복식 파트너에게 절대 얼굴 붉히지 않는 팀워크가 승리의 일등비결
그러는 사이 2002년, 처음으로 동호회 랭킹 1위도 차지했다. 2007년부터는 10년 연속으로 1위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면서 동호인들 사이에서 최고로 우뚝 섰다. 연말 랭킹 1위를 12년 동안 차지했다. 전국 대회 우승 횟수는 115번으로 독보적이다. 우승 숫자만으론 세리나 윌리엄스(37ㆍ미국), 로저 페더러(37ㆍ스위스)와 비견될 만 하다. 지금은 코트에 나가면 모두들 그를 알아본다. 그가 스트로크 하는 장면은 동영상으로 찍혀 연습 교본이 됐다. 동호인 계의 ‘셀럽’이 된 그에게 용품 협찬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15년 정도 전부터는 의류, 신발, 라켓을 모두 협찬 받기 시작했어요. 몇 년 전에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라켓 브랜드를 사용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사람들이 저를 따라서 전부 그 라켓을 쓰기 시작하더라고요. 이 쪽 세계에서는 나름 훌륭한 광고모델이 된 셈이죠.” 한국테니스진흥협회(KATA)에 따르면 국내에서 용품 협찬을 받아 대회에 나서는 동호인들의 숫자가 30명에 달한다.
그가 이렇게 동호인 테니스를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이 따로 있을까. 고미주씨는 “특별한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타고난 운동신경과 복식 파트너를 배려하는 팀워크 덕분에 좋은 경기를 펼치는 것 같다고 그는 자평했다. “저는 단 한번도 제 파트너에게 싫은 표정을 지어 본 적이 없어요. ‘져도 괜찮으니 자신 있게 치자’고 늘 말하죠. 그러다 보니 제가 속한 팀의 성적도 잘 나오는 것 같고요.”
지난 세월 돌아보니 테니스 말곤 남은 게 없네
끝으로 고미주씨에게 테니스는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저는 테니스 빼곤 한 게 아무것도 없네요. 그게 저에게 테니스예요”라고 답했다. “제가 대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 올해가 20년이에요. 일주일에 2번은 동호회에 나가고, 2번은 대회에 나가고, 그게 제 지난 삶의 전부네요. 대신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아요. 테니스 덕분에 세계 안 가 본 나라가 없고, 좋은 사람도 너무 많이 만났으니까요.”
언제부턴가 그는 매년 새해가 되면 ‘올해만큼은 테니스를 줄이자’고 굳게 다짐한다. 테니스 말고 다른 걸 좀 해보자고 결의를 다진다. 하지만 이 각오는 단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 올해는 좀 줄여볼 수 있을까 했더니, 뜻밖의 복병이 등장했다. “정현(21ㆍ랭킹19위) 선수 돌풍이 부니깐 제 딸이 갑자기 테니스 레슨을 받기 시작하더라고요. 어렸을 땐 그렇게 테니스장에 가는 걸 싫어하더니. 딸이 저한테 ‘엄마, 저랑 모녀 페어로 나가서 복식 우승 한 번 해요’ 하는데, 상상만 해도 멋있지 않나요. 테니스로는 이미 다 이룬 줄 알았는데,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인천=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