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차가 보관소에 놓은 짐 운반
월 50만원 수입 만족… 주민도 안심
아파트 자체 고용도 늘어나는 추세
“어이 김씨, 그건 203동 거. 어이 박씨, 이건 301동!”
봄바람에 벚꽃이 날리는 낮 12시, 우렁찬 목소리들이 고요한 아파트를 쩡쩡 울린다.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선 택배차량에서 5m 길이 컨베이어벨트가 깔리면, 그 위로 멀리 제주에서 온 제철 비트부터 산지직송 대게까지 담긴 크기도 무게도 제각각 박스들이 줄지어 나온다. 바로 그때, 매서운 눈길이 택배 송장에 적힌 주소를 확인하고, 재빠른 손길이 상자를 낚아채 동별로 쌓는다. 주홍 모자 아래 희끗희끗 보이는 머리카락이 아니라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날랜 동작이다. 노인들이 집까지 물건을 배달해 주는 ‘실버(Silver) 택배’ 현장이다.
남양주 다산신도시 ‘택배 대란’ 논란에 실버 택배가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차 없는 아파트를 표방한 신축 아파트 주민들의 ‘집 앞’ 배달 요구와 택배 기사들의 거부로 요약할 수 있는 분란을, 실버 택배로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버 택배는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는 아파트 단지에 설치된 보관소에 물건을 부려 놓으면 단지 내 센터에 고용된 노인들이 전용장비를 이용해 집까지 배달해 주는 시스템이다. 현재 CJ대한통운 관계사인 실버종합물류에 1,300명(65세 이상)이 있고, 실버 택배원을 자체 고용한 아파트도 생기고 있다.
12일 기자가 방문한 서울 은평구 백련산힐스테이트 아파트에는 7명이 일하고 있었다. 택배 차량이 도착하는 낮 12시쯤 출근→차에서 물건 하역→각 단지별 분류→개별 집까지 배달 작업에 평균 3~4시간 든다. 배달(송장 제출) 건당 550원, 여기에 각 지방자치단체 보조금을 더하면 한 달에 약 50만원이 손에 들어온다.
“‘세발(지팡이)로 들어왔다가 두발로 나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고 앞다퉈 말할 정도로, 실버 택배원 만족도는 높다. ‘노동의 감각’이 유지되는 걸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대개 해당 아파트나 인근 지역민이 고용되기 때문에 지역구성원으로서 소속감도 느낄 수 있다. 염모(70)씨는 “월급쟁이로 평생 살다 은퇴한 2015년 이후에도 여전히 일할 수 있어 기쁘다”라며 바삐 움직였다.
주민들도 좋아한다. 이날 염씨로부터 청바지를 건네받은 주부 김진아(41)씨는 “여섯 살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틀에 한 번꼴로 아기용품을 주문하는데, 친할아버지처럼 배달해 주니 오히려 젊은 택배 기사보다 더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물론 실버 택배가 이번 택배 대란의 완벽한 대안이 되기는 쉽지 않다. 단지 내에 택배 보관소를 설치할 면적이 확보되는 아파트가 많지 않을뿐더러, 배달 중 분실이나 파손의 책임 소재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도 주민들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부분이다.
다만 차 없는 아파트를 표방하는 신축 아파트들이 늘어나는 추세에, 주차장 높이를 2.3m로 한정해 택배 차량 진입을 어렵게 만든 관련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실버 택배는 한동안 최선의 대안으로 각광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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