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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DEEP 딥] 드라마 스태프 “주 52시간은 드라마 같은 얘기”

입력
2018.04.20 04:4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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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근로 허가 업종 제외 불구

현장엔 85%가 프리랜서 계약직

하루 평균 19.5시간 장시간 노동

여전히 법적 보호 받지 못해

4대 보험도 안되는 방송작가들

“노동성 인정해 달라” 성명서

독립제작사 평균 종업원 수 14명

사업장 규모 작으면 법 적용 늦어

2021년에야 변경 근로시간 적용

지난 2월 국회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방송업’과 ‘영상ㆍ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 이 특례업종에서 제외됐다. 기존 주당 68시간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단축됐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2월 국회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방송업’과 ‘영상ㆍ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 이 특례업종에서 제외됐다. 기존 주당 68시간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단축됐다. 게티이미지뱅크

2016년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이한빛 PD 자살 사건으로 방송제작 현장의 노동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PD는 유서를 통해 하루 2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휴게 시간의 절대적 부족 및 부재,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등을 고발했다. 하지만 방송 제작환경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자 지난해 4월 이 PD의 유가족과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뜻을 모아 ‘고 이한빛 PD의 사망사건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tvN을 운영하는 CJ E&M은 결국 고개 숙여 사과했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방송계가 달라질 것이라는 실낱 같은 희망이 비쳤다.

하지만 사고는 이어졌다. 지난해 12월 tvN 드라마 ‘화유기’ 세트장에서 미술 스태프가 3m 높이 천정에서 조명을 설치하는 작업을 새벽에 하다 추락했다. 하반신마비로 이어진 충격적인 사고였다.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새벽까지 ‘생방송 촬영’을 이어가다 무리하게 세트(인테리어)를 바꾸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사고를 당한 스태프는 ‘화유기’ 촬영 두 달 동안 매일 오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17시간 가량을 일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강준구 기자

생방송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촉박한 촬영 일정을 강행하며 일주일에 70분짜리 드라마 2회분을 제작하는 국내 방송 현장에서 드라마 스태프들에 대한 처우는 열악하기만 하다. 최근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과 청년유니온,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다산인권센터는 ‘드라마제작환경개선TF’를 만들어 드라마 제작현장의 노동실태를 조사했다. 드라마 제작 종사자 110명을 대상으로 지난 2월 설문을 한 결과 하루 기준 노동시간이 ‘20시간 이상 24시간 미만’이라는 응답자가 60.9%(67명)에 달했다. 10명 중 6명이 하루 20시간 이상 일했다는 내용이었다. ‘15시간 이상 20시간 미만’ 일했다는 응답자도 30%(33명)였다. 응답자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9.5시간, 휴식시간은 2.7시간에 불과했다.

지난해 12월 tvN 드라마 ‘화유기’의 한 스태프가 3m 높이의 천정에서 조명을 설치하다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고용노동부가 경기 안성의 ‘화유기’ 촬영 현장을 감식하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제공
지난해 12월 tvN 드라마 ‘화유기’의 한 스태프가 3m 높이의 천정에서 조명을 설치하다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고용노동부가 경기 안성의 ‘화유기’ 촬영 현장을 감식하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제공

‘지옥 같은’ 방송계 노동시간, 개정 근로기준법이 답일까

방송 제작현장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데도 스태프들은 법적 보호를 받질 못해 왔다. 근로기준법에 따른 법정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일주일간 40시간, 1일 8시간을 초과할 수 없지만, 방송업과 같은 ‘특례업종’은 법망을 피해갈 수 있다. 근로자대표자와 사용자간의 서면 합의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연장근로의 한도를 초과해 근로하거나 휴게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 합법적으로 장시간의 노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촬영 현장에서 벌어진 스태프들의 사건사고가 국회를 움직였다. 주당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줄이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방송과 영화업계에 해당하는 ‘방송업’과 ‘영상ㆍ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이 특례업종에서 삭제됐다. 1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300인 이상 사업장은 2019년 7월부터, 50~299인 사업장은 2020년 1월부터, 5~49인 사업장은 2021년 7월부터 주 52시간의 근로시간 제한이 적용된다. 기업규모에 상관없이 7월부터는 모든 사업장이 주 68시간을 초과해 근무할 수 없게 된다. 드라마 등 방송 제작에 종사하는 300인 이상 사업장은 내년 7월부터 개정된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의 규제가 적용된다.

법으로 근로시간을 제한하면 방송 스태프들에게도 저녁 있는 삶이 보장되는 것일까. 지상파 방송 한 관계자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됐다고는 하지만 정해진 건 하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방송사의 정규직 직원들의 업무량 또는 근로시간을 줄이는 방안 등은 추후 더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사내 정책을 재정비해야 하는 마당에 협력업체나 비정규직 프리랜서 등과의 계약관계까지 들여다 볼 여력이 없다는 의미다.

“근로자성 인정되지 않으면 ‘그림의 떡’”

“주 52시간 근로 단축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20년 넘게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세트설치 작업을 해온 한 스태프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나는 근로기준법에서 명시하는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재 드라마, 예능, 교양프로그램 제작 등에 종사하는 스태프의 상당수가 근로기준법상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드라마 제작의 경우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협력업체 같은 위계 구조가 형성돼 있다. 대부분의 방송 스태프들은 협력업체나 프리랜서 등으로 구분돼 방송사나 외주제작사와 다단계 하청 계약을 맺고 있다. ‘제작비 절감’이라는 이유로 수십 년 간 이어온 관례다. 이들이 근로자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근로자성 문제’가 앞으로 적용될 근로기준법 개정안의 숙제다.

드라마제작환경개선TF에 따르면 드라마제작 노동자(112명)들의 고용형태를 조사한 결과 프리랜서 계약이 67%(75명)로 가장 많았고, 계약직도 19.6%(22명)였다. 85% 이상이 프리랜서 및 계약직의 고용형태이기 때문에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적용되더라도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게 현실이다. 김동현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실제 많은 방송 종사자들이 프리랜서 계약을 체결해 근로기준법의 적용 범위에 포함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근로기준법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작하는 자를 근로자라고 규정(근로기준법 제2조 제1호)하고 있다. 즉 사용종속적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얻는 사람을 뜻한다. 김 변호사는 “방송제작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자의 지시감독 하에 있음을 고려하면, 형식적으로 프리랜서에 해당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할 여지가 높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프리랜서들이 실질적인 사용종속관계에 놓여 있다고 해도 근로기준법이 직접 적용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도 최근 “방송작가의 노동성을 인정해 달라”며 양승동 KBS 새 사장에게 성명서를 보냈다. 대다수 방송작가들이 기자 및 PD의 업무지휘와 감독을 받고 일상적으로 방송사에 출근해 근무하고 있지만,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프리랜서로 지칭되고 있다. 이들은 “노동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게 방송작가들의 현실”이라며 “기초적인 사회보장제도인 4대 보험의 적용에서조차 배제돼 있다”고 주장했다.

방송사나 제작사 등이 스태프로 프리랜서(계약)를 선호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김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상 사용자로서 부담해야 할 법적인 책임을 부담하지 않고 고용형태를 유연화하게 때문에 방송종사자들은 프리랜서 등 계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9일 국회에서 ‘드라마 제작현장 노동인권개선을 위한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문화체육관광부, 방송통신위원회, 고용노동부 등 정부 관계부터 담당자들과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관계자가 자리했다. 강은영 기자
지난달 9일 국회에서 ‘드라마 제작현장 노동인권개선을 위한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문화체육관광부, 방송통신위원회, 고용노동부 등 정부 관계부터 담당자들과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관계자가 자리했다. 강은영 기자

희망보다 부작용이 더 우려

“새벽 5시에 나와 버스를 타고 촬영 현장에 도착하면 몇 시까지 촬영을 하는지 아시나요? 미니시리즈(16부작)는 기본이 디졸브(밤샘 촬영)라 찜질방 가서 씻고만 나옵니다. 일일드라마도 1, 2회는 (시청률 때문에) 힘을 줘야 하니까 새벽 3시까지 찍는 일도 많아요. 찜질방에서 잠깐 잡니다. (자는 건) 그게 다입니다.”

지난달 9일 국회에서 열린 ‘드라마 제작현장 노동인권개선을 위한 대토론회’ 말미에 터진 한 여성 방송 스태프의 호소는 눈물겨웠다.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없는 제작 현장에서의 고된 노동에 대한 분노였다. 근로기준법 개정안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개정 근로기준법은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적용 시기가 늦춰지는데, 영세업체가 많은 방송업의 특성상 방송 스태프 상당수에게 주 52시간 근무는 아직 남의 이야기다. ‘2016년 방송영상산업백서’의 통계에 따르면, 방송영상독립제작사의 평균 종업원 수는 14인에 불과하다. 방송영상독립제작사의 96%가 50인 미만으로 운영된다.

방송업의 특수성을 악용한 편법이 횡행할 수 있다. 당장 내년 법이 적용되는 방송사들은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 인력을 충원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개정 근로기준법 적용 시점이 연기된 독립제작사들 인력을 활용하게 될 전망이다. 결국 ‘근로자성’을 부정 당하는 방송 종사자들이 더욱 늘어나게 되는 부작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노동계는 우려한다.

고 이한빛 PD 대책위 출범 1년을 맞아 드라마제작환경개선TF는 18일 고용노동부에 “계약 형식만 놓고 노동자냐 아니냐를 따지지 말고 현장 노동의 실질을 중심에 놓고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방송사와 제작사의 촬영 스케줄, PD의 지휘와 지시에 따라 일하는 스태프들의 실상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방송 제작 현장을 노동법의 사각지대로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는 일갈이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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