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가루 집안 호세아, 욕쟁이 아모스
우울한 예레미야, 당돌한 이사야
하늘의 소명을 이루는 과정서
그 단점이 귀한 자산이 돼
사람은 ‘장점’을 더 귀하게 여겨
자신을 개조하려 자존감에 상처
지금의 자기 모습이 최적 조건
어느 날 하나님은 예언자 호세아에게 무척 곤란한 명령을 내렸다. 결혼을 하되 꼭,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라는 것이다. 당시 예언자란 지금의 목사와 같은 신분인데, 사모가 바람둥이였으니 목회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멜이란 이름의 이 사모님은 결혼 후에도 바람 피우기 일쑤였다. 왜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바람난 아내를 두어 그와 같은 모욕을 겪게 하셨을까?
호세아, 괴로운 예언자
왜 고멜과 계속 사는지, 호세아는 자주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설교가 담긴 호세아서는 이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그는 바람난 아내를 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하나님의 처지와 비교하였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비교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바람난 아내라 질타했던 것이다. 자기 아내로부터 겪은 고통을 통하여, 바람난 백성을 둔 하나님의 같은 고통을 처절하게 토로하였다. 하나님의 고통을 정말 실감 있게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그의 설교는 대히트였다. 이후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이 그의 예언을 전수 받아 자신의 예언서에 잘 활용하기도 했다.
아모스, 분노의 예언자
같은 시대에 활약하던 무척 과격한 예언자, 아모스가 있었다. 배부른 정치 지도자와 그들과 결탁했던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히 비판하던 인물이다. 그가 늘 하던 설교의 핵심 메시지는 나라가 이대로 가다간 다 망한다는 것이었다.
아모스는 처음부터 예언자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었다.(아모스 7:14) 빈익빈 부익부가 극에 다다랐던 기원전 8세기에 아모스는 농장을 경영하였고, 타락하고 부패한 시장 경제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장사 경험이 많았기에, 시장에서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는 사기행각을 잘 발견할 수 있었다.(8:5) 불의한 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독기를 품은 아모스는 후에 예언자가 되어 입에서 불을 품듯 사회 정의와 개혁을 외쳤다.
이사야, 당돌한 예언자
같은 시기 이사야는 호세아나 아모스와는 다른 분위기의 예언자였다. 한마디로 잘난 사람이었다. 공부도 잘했고 집안도 좋았다. 늘 진취적이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왕궁에서 왕을 보좌하던 엘리트였다. 그의 자신감은 당돌하기까지 했다. 다른 예언자들처럼 그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calling)’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목하여 부르면 처음에는 겸손히 고사하고 주저하는 것이 전통이었는데, 이사야는 부름이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을 보내달라고 소리쳤었다.(이사야 6:8) 학교에 이런 학생이 있으면 대게들 싫어한다.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잘사는데, 나서기 까지 하니 말이다. 이사야는 잘났기에 그의 글은 언제나 진취적이고 당당하며 화려했다. 예언자 중 처음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묘사했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예언은 주로 그의 글이다. 후에 그의 예언은 장차 영광 속에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것으로 널리 인용되었다.
예레미야, 우울한 예언자
이사야와는 정반대 성격의 소유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예레미야다. 늘 소극적이고 불평불만이 많았으며,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자주 울었는지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다. 나의 옛 스승 한 분은 짓궂게도 그를 ‘우울증 환자’라고 불렀다. 그가 울 때마다 하나님은 다른 예언자들에게는 보이신 적이 없는 격려로 그를 위로하시곤 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예레미야 1:8) 그런데도 맨날 울었으니, 예레미야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스럽고 미웠을까?
사실 그의 우울은 당시 이스라엘의 우울이기도 했다. 예레미야가 사역하던 때에 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져 백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로 살아야 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 살면서 의로워지길 바랐었다. 그러니 쉽지 않았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의 종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었으나 그에겐 예언자의 사명이 가혹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우울한 예레미야를 통하여 기독교 신학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어려운 율법의 시대는 지나갈 것이며, 새로운 법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져 모두 쉽게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예레미야 31:31-34) 기독교는 이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예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울했기에 희망도 간절했다. 그 마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자가 바로 우울한 예레미야였다. 그는 이 말씀을 가장 생생하게 전할 수 있었던 예언자였다.
예언자의 단점이 곧 자산
자신의 ‘소명(召命ㆍvocation)’을 생각해 본적이 있으신지. ‘부름(calling)’에서 비롯된 개념이며, 영어로 vocation은 직업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에게는 하늘이 불러 이루고자 하는 인생의 과업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관찰한 네 명 예언자의 인생은 흥미롭다. 그들의 인생 경험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두 합하여 선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인생은 어떠할까? 혹 아모스처럼 사회의 불의에 이를 갈고 계시는 분이 있는지. 그 칼 버리지 말고 잘 갈아두시면, 언젠가 불의와 타락을 한 칼에 날려버릴 일에 쓰임 받을지 모른다. 너무 잘나고 자신감이 넘쳐 주위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시는지. 자신감이 넘치시니 하는 일도 진취적으로 잘 하실 것이다. 나는 성격적 결함이 있어서 사회 부적응자이며 쓸모없는 인생이라고 말하지 마시라. 예레미야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예언자들의 일생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인생의 장점이 아니 단점이 인생의 귀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울한 예레미야, 당돌한 이사야, 콩가루 집안의 호세아, 욕쟁이 아모스 모두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 우리는 보통 인생의 미래를 위해 자기의 ‘장점’만을 귀하게 여긴다. 자기 인생에 닥쳤던 어둡고 암울한 경험은 저주라고 여겨 갖다 버리려고만 한다. 하지만 예언자들에게는 그 악몽이 사실 악몽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선을 이루리라
창세기의 요셉은 타고난 꿈쟁이였다. 그는 한 때 꿈 때문에 망했다. 어릴 적에 철없이 자기가 꾸었던 꿈을 떠벌리고 다니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샀고, 결국 머나먼 땅 이집트에 팔려가 노예가 된 것이다. 얼마나 자기의 꿈을 원망했을까? 그러나 그는 이집트에서 다시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발휘하여 인생역전에 성공한다. 그의 꿈꾸는 버릇은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였던 것이다. 한 때 자신을 망쳤다고 여긴 꿈꾸기가 후에 자신을 살릴 줄은 요셉도 처음엔 몰랐을 것이다.
인생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계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의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개조하려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며, 자존감에 상처만 줄 수 있다. 위 예언자 중 단 한 사람도 자기 인생의 단점을 고치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가 하늘의 소명을 이루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의 개성 또한 비웃을 필요 없다. 각 사람을 각기 난 그대로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이다.
과거는 묻지 말아야 하지만, 과거를 묻을 필요도 없다. 바울처럼 우리도 인생의 어느 한 정점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참 행복한 인생을 산 것이리라.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 8:28)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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