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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 스토리] 축 처진 퇴근길, 나를 위로하는 '가성비 갑' 동네 스시

입력
2018.04.28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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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젊은 요리사 독립선언

점심 2만~3만원대로 문턱 낮춰

6석 규모 스몰 럭셔리 지향

정직한 백반집 같은 친근감

우리 집 앞에도 하나 있었으면

준비된 젊은 요리사들의 독립 선언이 스시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 은평구 ‘스시 이마’의 김창규 셰프가 스시를 만들고 있다. 강태훈 사진작가
준비된 젊은 요리사들의 독립 선언이 스시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 은평구 ‘스시 이마’의 김창규 셰프가 스시를 만들고 있다. 강태훈 사진작가

스시는 단 한 번도 토착화되지 않았던 유일한 음식이다. ‘초밥’이라는 한국화된 표현이 있다지만, 언제고 어디까지나 스시는 일본의 스시였다. 소바도, 우동도, 돈카츠도 메밀국수가 되고, 역전 우동이 되고, 돈까스가 되었지만 스시만이 유일하게 한국화되지 않았다.

한국의 독특한 어종을 사용하는 한국적 스시가 있지 않느냐고? 일본과 한국의 바다엔 거의 비슷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 한 때 외식업계를 주름잡았던 프랜차이즈 저가 초밥 전문점들도 있었으나 딱히 한국화되어 생활 속에 유입됐다기 보다는 일본풍 인테리어와 일본풍 식기에 일본식 반찬이 놓인 외국 음식점이 그 본질이었다. 호텔 일식당을 중심으로 한 하이엔드 정통 스시, 그리고 공장식 초밥 전문점과 마트 스시 코너의 양극단 사이에서 스시는 한국 음식에 스며들기보다는 따로 존재하는 물 위의 기름 같았다.

스시의 보편화가 진행된 것이 불과 몇 해 전이다. ‘미들급 스시’ 또는 ‘엔트리급 스시’라는 표현으로 불리는 점심 3만~5만원, 저녁 4만~7만원대의 스시집들이 대거 등장했다. 젊은 일식 요리사들이 지난하고 권위적인 하이엔드 스시의 도제식 사다리 타기를 거부하고 독립을 서둘러 눈높이를 낮춘, 그러나 내실과 정통을 지킨 스시를 선보였던 것이 두세 해 전이다. 주로 ‘홍대’ 앞이나 한남동 같이 취향을 중시하는 젊은 상권에 터를 잡고 스시 입문의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했다.

점심 2만5,000원, 이제 ‘하한가’ 스시로

최근엔 이 스시의 바람이 더욱 낮은 곳으로 불고 있다. 이제 ‘초저가 스시’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점심은 2만~3만원대, 저녁은 3만~5만원대로 가격대가 형성됐다. 질에서 내실, 형식에서 정통을 지키고 공장식 스시와 구별되는 한에서는 더 이상 내려갈 가격대가 없는 ‘하한가 스시’다. 얼마 전 스시 코너를 새단장한 이마트는 개당 몇 백원 하는 낱개 판매 스시를 없앤 대신 18쪽에 1만5,900원 하는 스시를 메뉴에 넣었다. 일회용기에 담겨 집에 오는 동안 미지근해진 마트 스시를 묵묵히 먹는 대신, 스시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다치(바)에서 요리사와 소통하며 스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 차이가 5,000원 이내로 좁혀진 것이다.

‘미들급 스시’ 열풍에 이어 더 가격대가 낮아진 ‘저가 스시’ 열풍이 불고 있다. 사진은 스시를 쥔 ‘스시 려’ 오봉학 셰프의 손. 강태훈 사진작가
‘미들급 스시’ 열풍에 이어 더 가격대가 낮아진 ‘저가 스시’ 열풍이 불고 있다. 사진은 스시를 쥔 ‘스시 려’ 오봉학 셰프의 손. 강태훈 사진작가

양천구, 마포구, 은평구, 관악구 등 외곽 지역의 낮은 임대료 덕분에 가능한 일인데, 이들 스시집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단지 임대료 때문에만 변두리로 찾아 든 것은 아니다. 당장의 이윤은 적더라도, 직원일 때보다 일을 더 하더라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음식을 내기 위해 새벽 시장을 가고 잠을 줄이더라도,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동네 친화적인 스시집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야말로 ‘서러운 퇴근 길, 고단한 나에게 선물로 줄 수 있는 3만원짜리 스몰 럭셔리’ 같은 동네 스시집. 입성부터 신경 써야 하는 도산공원과 청담동 ‘스시 벨트’의 20만원짜리 최고급 스시가 아니더라도 편안한 옷차림으로 집 앞에서 부담 없이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는 동네 스시집. 소박하지만 정직한 집 앞 백반집처럼 친근감 드는, 우리 집 앞에도 딱 하나 있으면 고마울 것 같은 그런 스시집.

손님에게도 감사한 일이지만, 이들 스시집 사장 겸 요리사의 마음도 손님들과 이심전심이다. 모두가 호텔 요리사가 되어야 하고 스시 벨트의 유명 스시집에서 ‘실장’을 달아야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어쩌면 가장 용기 있게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들이다. 물론 그것을 감당할 실력과 준비를 갖췄기 때문이지만.

젊은 요리사들의 독립선언으로 시작

하한가 스시의 돌풍의 핵으로 꼽히는 것이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스시 오오시마’, 은평구 응암동 ‘스시 쇼부’, 역촌동 ‘스시 이마’, 관악구 봉천동의 ‘스시 려’, 마포구 상암동 ‘스시 키노이’ 등이다. 가격을 놓고 보면 ‘스시 오오시마’가 점심 식사 2만5,000원, 저녁 식사 3만5,000원으로 가장 자애롭다. 신라호텔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20여년 요리사 경력을 갖고 있는 박상하 오너셰프의 스시집이다. 스시 이력은 스시 효, 스시타쿠, 스시 마츠모토 등 강남 ‘스시 벨트’의 스시집에서 쌓았다.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면서 새벽 4시엔 반드시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장을 보고, 혼자서 신정동 구석 후미진 곳에 자리한 6석(보조석까지 하면 7석) 규모의 스시집을 뚝딱뚝딱 운영한다. 월급을 받을 때보다 수입은 줄었지만 식당의 지속가능성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손해’ 대신 ‘투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박 셰프는 “가격을 최대한 낮췄기 때문에 흔히 사는 오해가 재료의 질이 낮을 것이라는데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비쌀 때나 쌀 때나 가장 좋은 재료를 쓰는 하이엔드 스시집처럼 할 수는 없지만 좋은 재료를 쌀 때 선택하고 다루는 것은 경험과 기술로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 그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해봤더니 털게에, 제철을 맞은 줄무늬 전갱이나 요즘 가장 몸집이 큰 피조개 등 아쉬움 없는 구성으로 코스가 짜여 있었다. “손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나라도 거품으로 느끼지 않을 만한 가격선을 지키는 것이죠. 전문가이기 때문에 오히려 손님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손님에게 만족을 줘야 장기적으로 단골 손님이 생기고, 식당이 힘을 얻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식당이기 때문에 항상 만석으로 채워지면 적더라도 필요한 만큼은 수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분점을 내는 것도 아니고, 동네에서 성공해 스시 벨트로 금의환향하는 것도 아니다. 쭉 동네 사람들, 그리고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들과 서로 행복한 ‘거래’를 해나가는 것이다. 7월 개업 1주년을 맞는 그의 식당은 26일 현재 6월까지 예약이 모두 차있는데, 인스타그램을 통해 월 단위로 예약을 받고 있다. 예약 공지와 동시에 한 달치 예약이 또 끝날 것이므로 그의 ‘지속가능한’ 스시를 맛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을 꾸준히 들여다 볼 일이다.

굳이 제일 비싼 재료로 스시를 먹어야 할까?

2호선 서울대입구역 ‘스시 려’의 오봉학 오너셰프. 강태훈 사진작가
2호선 서울대입구역 ‘스시 려’의 오봉학 오너셰프. 강태훈 사진작가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바로 앞 한 오피스텔 건물 1층에 자리한 오봉학 오너 셰프의 ‘스시 려’는 미들급 스시가 봇물을 이루기 시작하던 시기 진작에 등장한 식당이다. 지금은 없어진 리츠칼튼 호텔에서 일식을 하다가 퇴사하고 동네에서 오래 가는 식당을 목표로 집 근처에 자리를 튼 케이스다. 점심 식사는 3만1,000원, 저녁 식사는 4만8,000원부터인데 개업했을 때보다는 다소 인상된 가격이다.

“아무래도 임대료 부담이 적고 강남보다는 여건이 여유롭고, 주변이 베드 타운이다 보니 고정적으로 와주는 손님들이 많아요. 서울대 학생, 대학원생, 졸업생들도 큰 비중을 차지하죠.” 마치 스시 벨트에 온 듯 히노키(편백나무)로 짠 다치를 사이에 두고 오 셰프가 말한다. “호텔에서는 가격 제한 없이 재료를 썼지만, 하던 바가 있어서 재료의 질을 거의 떨어트리지 못하고 있어요. 같은 도미, 광어라도 자연산을 가져오는 식이죠. 알아봐 주는 손님이 있어서 지속할 수 있는 겁니다.”

‘스시 려’의 실내 전경. 소박하지만 다치(바)는 히노키로 짰다. 강태훈 사진작가
‘스시 려’의 실내 전경. 소박하지만 다치(바)는 히노키로 짰다. 강태훈 사진작가
‘스시 려’의 스시 중 일부. 왼쪽부터 광어, 참다랑어 붉은살, 청어, 피조개, 단새우, 갯가재. 강태훈 사진작가
‘스시 려’의 스시 중 일부. 왼쪽부터 광어, 참다랑어 붉은살, 청어, 피조개, 단새우, 갯가재. 강태훈 사진작가

점심을 예약하고 가봤더니 자연산 광어와 도미, 줄무늬 전갱이와 피조개, 금태, 병어, 청어, 왕우럭조개, 갯가재와 부채새우 등 계절감을 살린 알찬 구성의 코스가 나왔다. 굳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그리고 가장 비싼 재료로 만든 스시를 항상 먹어야 할까? 스시를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을 얻기 위해 모두가 그럴 수 있어야 할까? 아니다. 최고에 약간 못 미칠지언정 최선의 재료를 지혜롭고 노련하게 내 놓는 그의 점심 코스를 먹으며 나는 큰 만족감을 느꼈다. ‘단돈’ 3만 1,000원을 지불하며 감사할 수 있는 곳이다. 적어도 일상의 특별함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충분하다.

은평구 ‘스시 이마’의 김창규 오너셰프. 강태훈 사진작가
은평구 ‘스시 이마’의 김창규 오너셰프. 강태훈 사진작가
합리적인 소재로 말끔하게 짠 ‘스시 이마’의 내부 모습. 강태훈 사진작가
합리적인 소재로 말끔하게 짠 ‘스시 이마’의 내부 모습. 강태훈 사진작가

은평구를 지나는 6호선 지하철의 어느 역에서도 먼 역촌동 한 골목에는 올해 초 ‘스시 이마’가 개업했다. 오오시마와 려의 사장이 그런 것처럼, 이 식당 오너셰프 역시 집 근처에 자리를 정했다. “집에서 2분 거리에 가게 자리가 나와서 바로 잡았죠” 김창규 오너셰프의 말이다. 그렇다. 불필요하게 긴 출퇴근시간은 모두의 적이다. 특히나 셰프, 주방 막내, 서비스, 식당 경영까지 혼자 1인 4역을 하는 스시 요리사에겐.

스시 이마는 점심 식사 3만원, 저녁 식사 4만원으로 가격을 책정해 ‘가성비’를 중시하는 스시 마니아들의 새로운 원정지로 떠올랐다. 이곳 역시 빼놓지 않고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장을 보러 다니고, 그간 갈고 닦은 안목으로 최선, 최적의 재료를 꾸려 온다. 김 셰프는 스시 이마로 독립하기 이전에 홍대 앞 지역에서 미들급 스시로 손꼽히던 ‘스시 시로’에 오픈 때부터 근무한 바 있다. 이전엔 같은 회사의 이자카야 겐지에서도 일했으니 일식 경력은 충분 이상이다.

퇴근 시간, 나를 위로하는 스시 한 접시

그 계절에 무엇을 먹어야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크기에서 가장 맛이 좋고 저렴한지, 어떻게 해야 손님이 지불하는 돈, 즉 정해진 예산 안에서 만족스러운 경험을 줄 수 있을지를 성심껏 고민한 결과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는다. 대여섯 배의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아깝지 않게 먹을 하이엔드 스시는 특별한 경험이지만, 지금 서울에 더 필요한 것은 이렇게 일상적인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되어주는 적정가, 또는 하한가의 스시일지도 모른다.

젊은 일식 요리사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독립 의지가 강해진 요즘이니 앞으로도 이런 일상식으로서의 스시는 꾸준히 등장할 것으로 내다 보인다. 동네에 스시 식당이 생겼을 때, 기대감을 갖고 문을 열어봐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스시 이마’ 코스 중 일부. 왼쪽부터 도미, 한치, 금태, 참다랑어 붉은살, 피조개, 고등어, 청어. 강태훈 사진작가
‘스시 이마’ 코스 중 일부. 왼쪽부터 도미, 한치, 금태, 참다랑어 붉은살, 피조개, 고등어, 청어. 강태훈 사진작가

스시 이마에 저녁 식사를 예약하고 가서 앉았더니 “혹시 자리 있나요?”하며 홀로 들어온 직장인 손님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축 쳐진 걸음으로 집에 가던 길, 작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노란 불빛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들른 손님일 것이다. 깔끔한 도미 스시 한 입, 달달한 한치 스시 한 입, 고소한 청어 스시 한 입에 그의 고단함이 밝음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소박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맛있는 스시가 화려한 옷과 최고를 향해 달려가던 속도를 내려 놓고 동네로 찾아왔다. 올해는 스시의 하한가, 그 지속가능한 행복이 더 많은 동네에 퍼져나갈 것 같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강태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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