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가장 동쪽 땅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독도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백령도는 대한민국 최서단이다. 동경 125도 32분, 태안군 근흥면 가의도리 격렬비열도는 충청남도 최서단으로 독도와 백령도 못지않게 중요한 서해 영해기준점이다. 큰 섬 3개와 부속도서 9개로 이뤄진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는 새가 열을 지어 날아가는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체 면적은 51만4,603㎡로 독도(18만7,554㎡)보다 2.7배 크다. 해양수산부는 사실상 국토의 최서단 막내인 서격렬비도를 ‘5월의 무인도서’로 선정했다. 지난달 충남도와 국토교통부는 북격렬비도에 ‘통합기준점’을 설치했다. 통합기준점은 지적과 중력 측량은 물론 토지의 정확한 위치를 정하고, 각종 시설물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기준으로 활용된다. 지난달 20일 태안군의 협조로 격렬비열도를 다녀왔다.
55km 뱃길 점점이 이어진 서해의 실크로드
격렬비열도로 가기 하루 전, 태안군청 관계자는 귀 뒤에 붙이는 멀미약을 꼭 챙기라고 신신 당부했다. 앞바다는 대체로 잔잔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먼바다 날씨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기자 정신’으로 호기를 부린 한 방송사 취재진이 섬에 닿기도 전에 초주검이 됐다며 겁을 준다.
격렬비열도는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근흥면 신진항(안흥외항)에서 직선으로 약 55km 떨어져 있다. 태안군 행정선 ‘충남 202호’는 내부에 10명 정도가 앉아 쉴 수 있는 작은 배다. 평균 시속 17노트(약 28km) 속도로 이동하면 약 2시간 30분이 걸린다. 그래도 격렬비열도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독도처럼 외롭지는 않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여정에 한두 개 섬은 꼭 시야에 들어온다. 인터넷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20여개의 섬이 끝없이 이어져 이 뱃길은 일명 ‘서해의 실크로드’라고도 부른다.
항구를 벗어나면 가장 먼저 가의도를 지난다. 태안의 119개 섬 중 가장 크고 유일하게 사람이 거주하는 섬이다. 동서로 길쭉하게 뻗은 능선 끝으로 올망졸망하게 붙은 기암이 방향에 따라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조금 더 전진하면 정면으로 봉긋한 산꼭대기에 하얀 등대가 아름다운 옹도가 보인다. 위에서 보면 옹기를 엎어놓은 모양이어서 이렇게 부른다. 옹도까지는 신진항에서 하루 한 차례 유람선이 운항한다. 선착장에서 등대까지 계단과 산책로가 놓였고, 꼭대기 등대전망대에 오르면 가의도를 비롯해 단도 정족도 목개도 등 주변의 작은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옹도를 벗어나면 섬들 간 거리는 다소 멀어진다. 배가 이동함에 따라 궁시도 난도 병풍도 석도 우배도 등이 겹쳐졌다 벌어지기를 거듭한다. 지금은 모두 무인도가 됐지만, 활시위처럼 생겼다는 궁시도에는 초등학교가 있을 만큼 주민들이 제법 살았다. 주변 바다는 해삼 전복을 따는 해녀들에게 풍성한 어장이었다. 지금도 허가 받은 일부 어민들이 궁시도와 석도 주변에서 물질로 해산물을 건져 올리고 있다.
한낮에도 희뿌연 바다안개가 감싸고 있어 멀리서 아련하고 신비롭게 보이는 섬들도 가까이 다가가면 생명의 활기로 가득하다. 대부분 바위절벽이 수직으로 우뚝 솟아 배를 대기 어렵다. 대신 인적이 없는 섬은 먼 길을 오가는 새들의 중간 기착지자 갈매기 천국이다. 그중에서도 난도(卵島, 일명 알섬)는 괭이갈매기 서식지로 유명하다. 번식기에 들어간 괭이갈매기가 4월 말부터 모여들어 5월 말경이면 무려 2만 마리까지 불어난다. 물위로 살짝 드러난 작은 갯바위는 물론이고, 경사 급한 절벽에도 발붙일 공간만 있으면 어김없이 갈매기가 쉬고 있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능선에 빼곡하게 둥지를 틀어 초록이 짙어가는 섬에 하얀 점이 흩뿌려진 것처럼 보인다. 영토를 침범한 데에 항의하듯 “꺄악~꺅” 목청 높여 따라오던 갈매기 무리는 배가 섬에서 멀어진 뒤에야 안심하듯 되돌아간다. 다행히 물살은 한없이 부드러워 갈매기 날갯짓이 수면에 아른거린다.
중국 산둥에서 260km, 서해지킴이 격렬비열도
우배도와 석도를 지나면 드디어 최종목적지 격렬비열도가 뱃전에 모습을 드러낸다. 격렬비열도는 북격렬비도를 기준으로 서격렬비도와 동격렬비도가 날갯죽지 모양으로 각각 1.8km, 0.8km 떨어져 있다. 면적은 동격렬비도가 가장 넓다. 높이는 해발 133m에 불과하지만 바다에서 솟구친 모습이 제법 웅장하다. 섬이 분리될 듯 갈라진 산등성이 사이로 상승기류를 타고 날아오르는 갈매기들이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온몸으로 보여 준다.
격렬비열도는 대한민국 바다 영토의 시작점을 대외적으로 명확히 알리는 서해 영해기점이다. (영해기점은 전국 23곳에 있다.) 중국 산둥반도(260㎞)와 가깝고 주변 해역에 수산자원이 풍부해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이 잇따르는 곳이기도 하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영해를 침범한 중국 어선 중 70%가 격렬비열도 인근에서 불법으로 조업했다. 중국 측에서 우회적으로 이 황금어장을 손에 넣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현재 동ㆍ서격렬비도는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데, 2012년 무렵에는 중국인들이 브로커를 앞세워 서격렬비도를 사겠다며 거액을 제시하기도 했다. 중국에는 넘기지 않겠다는 소유주의 뜻이 확고해 다행히 거래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아직 국가에서 매입하지 못해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감안해 정부는 21년간 무인도로 방치했던 북격렬비도에 2015년 7월부터 대산지방해양청 소속 등대관리원을 배치했다. 4명이 2교대로 15일씩 근무하는데, 섬에는 이들을 위한 숙소와 태양광발전소, 헬기장을 조성했다. 그렇다고 불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생활용수는 빗물을 모아 쓰는 형편이고, 무엇보다 접안시설이 없어 배를 대기 어렵다.
취재진도 행정선에 매달고 온 작은 고무보트로 옮겨 탄 뒤, 보트를 바위에 바짝 붙인 후 섬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자칫하면 해초가 붙은 바위에서 미끄러질 형편이었다. 이름뿐인 선착장에서 꼭대기까지는 등대 근무자를 위해 지그재그로 길이 나 있다. 생필품은 모노레일로 실어 올린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노란 유채가 듬성듬성 피어 있고, 키 작은 동백이 빨간 꽃송이를 소담스럽게 매달고 있다. 100년 이상 된 군락이라는데, 웃자란 가지를 잘 다듬은 것처럼 가지런하다. 가지치기에 사용하는 전지가위 대신 세찬 바닷바람이 말쑥하게 정돈한 때문이다. 잠시 머무는 일정이라 외롭다기보다 작은 섬이 주는 낯섦이 평온하다. 바로 앞바다에 떠 있는 동격렬비도를 배경 삼아 10여분을 오르면 정상에 닿는다. 꼭대기에는 1909년에 세운 등대 외에 기상청의 ‘서해종합관측기지’와 케이티(KT)의 통신기지국이 들어서 있다. 기상청 관측기지에는 파고와 지진을 감지하는 계측기와 황사관측장비가 설치돼 있다. 매년 봄 이곳에서 황사가 관측되면 3시간 뒤 수도권에 황사가 시작된다고 하니 기상관측의 전초기지 역할도 담당하는 셈이다.
등대 앞마당에 서면 지나온 태안의 섬들이 신기루처럼 까마득하게 보이고, 뒤편으로 이동하면 서격렬비도가 길쭉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섬 북측 수직으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에는 세로줄이 선명한 주상절리 주변을 갈매기들이 무리 지어 쉬거나 날고 있다. 격렬비열도는 7,000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화산 폭발로 생성된 화산섬이다. 독도가 460만년, 제주도가 100만년 전에 생성된 것을 감안하면 격렬비열도는 훨씬 오래전부터 한반도의 바다 지킴이였다.
독도처럼 유람선이 뜨는 것도 아니어서 공식적으로 격렬비열도에 가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낚시꾼들에게는 대형 우럭과 광어를 낚을 수 있는 황금어장으로 익히 소문나 있다. 섬에 내릴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격렬비열도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신진항과 안흥항에서 출항하는 낚싯배를 타는 것이다. 비용은 1인 10만원 선이다.
5월 태안에 가면 특별한 꽃 잔치
찬란한 5월 태안에도 꽃 잔치가 한창이다. 우선 안면읍 꽃지해안공원에서 13일까지 ‘2018 태안 세계튤립축제’가 진행 중이다. ‘꽃으로 피어난 바다, 대한민국이 빛나다’를 주제로 열리는 축제에는 벤반잔덴, 키코마치, 옐로스프링그린 등 이름도 생경한 200여 품종의 튤립이 원색의 향연을 펼친다. 국내 최대인 200만송이 튤립이 화가의 정원, 으뜸 정원, 신품종 정원 등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특히 꽃 색깔로 그림을 그린 화가의 정원에는 생육기간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튤립이 피어나 꽃밭 속의 꽃밭을 연출한다. 야간에는 6만개의 LED 전구가 축제장을 밝혀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튤립축제가 열리는 해안공원은 태안을 대표하는 꽃지해변으로 이어진다. 드넓은 백사장은 언제나 여유가 넘치고, 물이 빠지면 바로 앞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까지 바닷길이 열린다. 신라시대 안면도 기지사령관 승언과 그의 아내 미도의 전설을 간직한 두 개의 바위섬은 낙조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남면 신장리 청산수목원은 매년 4월부터 6월까지 홍가시나무가 이색적인 매력을 선사한다. 홍가시나무는 장미과의 상록활엽수로 윤기 머금은 새잎이 단풍보다 붉고 곱다. 홍가시나무를 주종으로 꾸민 삼족오 미로정원은 ‘인생사진’을 찍는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밀레, 고갱, 만다라 등을 주제로 한 테마정원에는 황금측백 앵초 창포 등 600여종의 나무와 야생화가 계절별로 화려함을 뽐낸다. 곧 다가올 여름이면 수생식물원에 200여종의 수련과 연꽃이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태안반도 끝자락 소원면에 위치한 천리포수목원은 푸른 눈의 한국인 고 민병갈(Carl Ferris Miller) 설립자가 40여년 동안 일군 국내 1세대 수목원이다. 생태 관련 전문가와 후원 회원들에게 제한적으로 입장을 허용하다 2009년부터 수목원의 일부를 일반에 개방했다. 천리포수목원은 중부지역이면서도 난대식물이 월동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춰 1만5,800여 종류의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바다와 접하고 있다는 것도 천리포수목원만의 장점이다. 밀러가든을 산책하다 보면 곰솔 사이로 파도소리 청량하고, 고운 모래사장이 비밀의 정원처럼 펼쳐진다. 특히 노을쉼터나 바람의 언덕은 낙조를 감상하기 좋은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다.
태안=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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