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초년 진정성, 개혁성향 사라지고
한반도 대전환 맞서 냉전틀 방어 앞장
불안과 공포 딛고 보수 재정립 나서길
일선 정치부 취재기자 시절 몇몇 기자들과 홍준표 의원을 만나 속닥하게 식사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 때마다 튀는 말투에 괴팍하다는 일반 평판과는 달리 매력 있는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자리에서도 여전히 말은 거칠었으나 나름 진정성과 개혁성향, 통찰과 유머가 있었고, 친근감이 느껴졌다. 대학 때 운동권이었고, 검사 시절 외압에 굴하지 않는 성역 없는 수사로 훗날 ‘모래시계 검사’의 실제 모델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요즘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에게는 거칠고 괴팍스러운 면모만 도드라질 뿐 정치 초년 시절 보여줬던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빈농의 아들인 그는 추운 겨울 밤 바닷가 모래밭에 모닥불 피워놓고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에 앉아 밤새 경비를 서고 일당 800원을 받는 현대조선소 경비원 아버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불공평한 세상을 바꿀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불공평한 세상의 한 축인 수구 냉전체제 붕괴를 막으려는 대열의 최선봉에 서 있다.
홍 대표는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 예의 ‘위장 평화쇼’라는 딱지를 붙였다. 판문점 선언 내용 중 ‘자주적 해결’ 표현 등을 문제 삼아 “김정은과 우리측 주사파들의 숨은 합의”라며 수용 불가 입장을 천명했다. 이런 식이라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2년 채택한 7·4남북공동성명은 “김일성과 우리측 남로당 출신의 숨은 합의”가 될 것이다. 홍 대표는 남북정상회담을 지지하는 건 좌파뿐이며 다음 대통령은 김정은이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말도 했다.
국민 80%이상이 이번 정상회담을 지지하는데 그 80% 국민이 좌파라고 한다. 종북좌파의 규모를 부풀리는 건 결국 우리 사회에 김정은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이보다 더 김정은 체제를 고무찬양하는 행위가 있을까. 다수 국민의 생각, 정서와 동떨어진 인식은 국민과 스스로를 격리하는 자폐 행위다. 오죽하면 당 내부, 특히 6·13지방선거 주자들로부터 너무 나간다는 원성을 살까. 4선 중진인 강길부 의원은 홍 대표와 설전을 벌이다 끝내 탈당하고 말았다.
홍 대표의 경직된 자세가 한반도에서 진행 중인 3차원 입체적 대전환을 이해하지 못하는 2차원 평면적 사고 탓만은 아니다. 눈앞 현실을 결코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확증편향적이고 인지부조화적인 심리 기제가 작용하는 게 더 문제다. 홍 대표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 특히 60대 이상 연령층의 보수 인사들을 만나보면 불안과 두려움을 호소한다. 문재인이 주도하는 비핵화와 평화 체제가 정착되면 좌파세력은 더욱 강해지고 자신들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보는 탓이다. 재산과 생명에 대한 불안까지 느끼는 것 같아 보인다. 무의식에 각인된 6·25의 집단 트라우마 탓일 것이다.
홍 대표는 자유한국당 핵심지지층인 이들의 정서와 입장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고, 어물어물하다가 6·13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자유한국당이 소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처럼 대응한다고 달라질 게 없다. 오히려 중도보수세력으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해 당세를 더욱 약화시킬 뿐이다. 그리 되면 정부여당을 견제할 주요 야당 세력이 없어진다는 게 큰 문제다. 이건 문재인 정부를 위해서도,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문 대통령이 어떻게든 홍 대표가 이끄는 한국당과 보수적 국민까지도 보듬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홍 대표에게 조선일보 7일자 ‘최보식이 만난 사람’ 란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인터뷰 대상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상징적 인물, 강철 서신’의 김영환씨다. 북한 수령체제에 염증을 느껴 전향한 주사파 출신 활동가로, 그간 보수진영의 아낌을 받아온 인사이기도 하다. 인터뷰 질문은 요즘 당혹스러운 보수진영이 알고 싶은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보수진영이 듣고 싶어 하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보수 괴멸을 막고 재정립을 위한 답이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논설고문· 한반도평화연구소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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