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사로잡힌 사회
동양인 25~30%는 탈모 겪는데
외모지상주의 탓 무시 비하 불이익
동료 욕설에 충동 범죄 발생도
#커지는 경제적 부담
탈모 치료제 보험급여 적용 안돼
한 번 약값만 15만~30만원
부분가발도 100만원 훌쩍 넘어
#더 고통받는 여성들
스트레스에 여성 탈모 늘었지만
사회적 시선 더 삐딱하게 바라봐
빈 곳 감추려 ‘머리카락과의 전쟁’
서울 한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이모(36)씨는 지난 3월 친구 소개로 소개팅에 나갔다가 ‘또’ 좌절했다. 여성이 만난 지 30분 만에 일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이다. 다음날 친구에게 슬쩍 물어보니 여성이 “아무리 직장이 좋아도 탈모가 심해 호감이 가지 않아 먼저 나왔다”고 했단다. 소개팅 전에 탈모 증세가 있다는 것을 밝혔는데도 괜찮다고 해서 나간 자리라 마음의 상처는 더욱 컸다.
2010년부터 병원에서 탈모치료제를 처방 받아 복용해 온 김모(48)씨는 상태가 많이 호전됐는데도 계속 약을 복용하고 있다. 아들 걱정 때문이다. “탈모 치료를 받기 전, 아들이 나와 외출하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아 속상한 적이 많았다”는 김씨는 “혹시라도 예비 며느리가 내 머리를 보고 아들도 대머리가 될까 두려워 결혼을 포기하면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 적어도 아들이 결혼할 때까지는 계속 탈모치료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연애는 물론, 자식의 결혼에까지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탈모인들의 비애다.
조롱ㆍ경멸과의 전쟁
7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병원서 탈모 치료(비급여 제외)를 받은 적이 있는 탈모환자는 2015년 20만8,534명, 2016년 21만2,916명, 2017년 21만5,025명으로, 매년 증가 추세다. 연령대로 보면 남성은 30대(3만2,839명), 여성은 40대(2만1,172명)가 가장 많다. 병원 치료를 받는 탈모인이 전체의 4%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탈모인구는 수백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탈모 관련 논문들에 따르면 백인 남성의 탈모비율은 45%, 흑인도 40% 정도다. 서양인 50대 인구의 50%는 탈모를 겪는다는 연구조사도 있다. 하지만 동양인의 경우 25~30% 정도로 상대적으로 적다. 소수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이 대비돼 눈에 잘 띄기 때문일까. 탈모에 대한 편견과 조롱은 우리나라에서 유독 심하다.
미국 보스턴에서 20년 넘게 생활하다 지난해 귀국한 김기환(47)씨는 “미국인들은 탈모가 심하면 아예 머리를 밀고 다닌다”며 “미국인들도 탈모에 관심이 많지만 우리나라처럼 노골적으로 대머리라고 무시하거나 심하게 조롱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탈모에 대한 조롱과 경멸이 심지어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마저 있다. 올 3월 전주 완산구의 환경미화원 이모(50)씨가 구속됐다. 지난해 4월 자신의 원룸에서 동료 Y씨(59)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다. 이씨는 경찰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Y씨가 내 가발을 잡아당기며 욕을 해 홧김에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대머리하고는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듯, 우리사회는 탈모인들을 경멸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탈모는 자연적 현상인데도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범죄는 정당화할 수 없지만,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갖가지 불이익을 받아 온 탈모인이 충동적으로 범죄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치솟는 경제적 부담
이들은 심적 고통에 시달릴 뿐 아니라, 탈모 관련 상품에 상당한 비용을 지출하는 경제적 부담까지 지고 있다. 심적 고통이 심해질수록 그만큼 지출 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30대 후반부터 탈모가 시작된 정모(42)씨는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탈모방지 샴푸는 거의 다 써봤다”며 “미용실에서 효과가 뛰어나다고 권한 탈모치료제도 6개월 가량 발라 봤지만 이마저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탈모방지 제품구입에 든 비용만 300만원이 넘는다“며 ”탈모인들의 심리를 자극해 이익을 추구하는 업자들이 탈모인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내 탈모시장 규모는 약 4조원 정도로, 해마다 시장규모가 확대되고 있다.
탈모인들에게 병원 치료는 그야말로 ‘마지막 카드’다. 하지만 탈모가 너무 심하면 치료효과를 장담할 수 없어 치료조차 받지 못한다. 피부과 전문의들은 “탈모 초기에 치료를 받아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상태가 악화된 후 마지막에 병원을 찾는 이들이 많다”고 말한다.
다행히 치료에 돌입한다고 해도 약값 부담이 만만치 않다. 하루 한 알 복용하는 탈모치료제는 보험급여가 적용되지 않는다. 6년 넘게 대학병원 피부과에서 탈모치료제를 처방 받아 복용하고 있는 김모(39)씨는 “시장에서 원단장사를 하고 있는데 한번 병원에 갈 때마다 15만~30만원 정도 약값을 내야 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된다”고 토로했다.
가발 비용도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이다. 브랜드와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다르지만 TV광고도 하는 유명 브랜드 제품은 남성 부분가발이 100만~120만원, 여성은 130만~140만원이나 된다. 전체가발은 부분가발보다 20만~30만원 더 비싸다. 3년 전 전체 가발을 쓰기 시작한 박모(45)씨는 “가발을 한 개만 쓰면 2년 정도밖에 쓰지 못한다고 해 2개를 맞췄다”며 “2개를 번갈아 사용해도 3년이 지나니 가발 상태가 좋지 않아 올 여름 다시 가발을 맞춰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런 비용을 들이고도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발이 혹시 벗겨지지는 않을까, 상대가 가발을 쓴 것을 눈치채지는 않을까, 가발 안에 맺히는 땀과의 전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더 큰 고통 안고 지내는 여성
남성보다 수가 적긴 해도, 여성 탈모인도 적지 않다. 더 적극적으로 감추다 보니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주로 유전과 노화현상으로 탈모가 발생하지만, 직장과 가정에서 스트레스가 축적돼 일찍 탈모가 생긴 여성들도 많다. 2017년 기준 전체 여성탈모환자 9만6,170명 중 20~40대 탈모환자가 5만7,015명으로 59%에 달한다. 이들은 “여자가 대머리가 어디 있느냐”는 잘못된 상식에 더욱 심한 고통을 받는다.
박모(47)씨는 2015년 가을 시험관아기 시술을 하면서 급격한 탈모증세가 생겼다. 난자배양을 위해 호르몬주사를 맞는 등 임신과 관련된 스트레스가 누적됐고, 파견근무로 직장생활마저 어려움을 겪은 것이 원인이었다. 매일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자 박씨는 시술을 중단했지만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이제 상당한 수준으로 탈모가 진행된 박씨는 “출근 전 빈 머리를 감추기 위해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1시간 정도 머리손질을 한다. 비바람에 손질한 머리카락이 날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 화장실에서 몰래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다”고 했다. 심우영 강동경희대병원 피부과 교수는 “여성 탈모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너무 안 좋기 때문에 병원을 찾은 여성 환자들의 정신적 충격은 상당하다”고 말했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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