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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서울역의 가능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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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서울역의 가능한 미래

입력
2018.05.10 18:4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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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프랑스는 2주 전만 해도 파리에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그는 TV를 보다가 갑자기 떠나기로 결심했다. “내일은 회사 안 가! 쳇바퀴 돌 듯 반복되던 일상에 지쳤어. 그냥 여기서 가장 먼 곳으로 갈테야. 대륙의 끝으로!” 지도를 보니 대륙 끝으로 가는 길에 여러 도시들이 있었다. 시베리아를 지나갈까, 몽골로 갈까, 중앙아시아로 갈까? 무슈 프랑스의 마음에 쏙 도는 도시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새롭고 활기차고 훌륭한 풍경을 가진 도시가 없을까? “블라디보스토크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으흠, 서울, 서울?!” 유튜브의 케이팝 뮤직비디오에 서울을 본 기억이 난다. 밝고 활기찬 곳 같았다. 그래 거기로 가자. 그는 다음날 회사로 가는 길과 반대편으로 가서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서울행 기차표를 샀다.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꼬박 일주일을 달리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인내심을 요하긴 하지만 러시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대륙을 넘는 건 일생에 한번쯤은 해볼 만하다. 이 시간에 비하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울까지는 눈 깜짝할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가는 1만 하고도 300 킬로미터의 철로가 세계에서 가장 긴 노선이었지만, 이제 서울을 지나 부산까지 가는 최장 노선이 생겼다.

무슈 프랑스가 서울역에 도착한 건 이른 아침이었다. 서울은 엷은 안개 너머로 육중한 건물들이 가득 차있다. 구글에서 찾아본 것보다 건물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넓디넓은 광장 앞으로 달리는 차들하며,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니 그도 덩달아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동안 회사에 사표를 낸 것이 못내 찜찜했지만 이미 대륙의 끝에 와있지 않은가! 여기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자고 무슈 프랑스는 생각했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드디어 끝까지 왔구나. 물론 남쪽 바다 항구도시인 부산이 사실상 끝에 있는 도시지만 무슈 프랑스의 여행은 서울에서 끝이 났다.

그는 갑자기 피곤과 허기를 느꼈다. 역 내부에 사람이 많은 식당에 있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많이들 먹길래 ‘갈비탕’ 이라는 것을 주문했다. 처음 맛보는 음식이지만 피로를 풀기에는 좋은 음식이었다. 역을 나오니 오래된 유럽풍 건물이 있다. 파리에선 흔하디흔한 옛 시절의 석조 건물이지만 서울에도 이런 건물이 있을 줄이야! 건물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니 아, 이 건물이 과거의 서울역이었던 것이다. 무슈 프랑스는 극동으로 여행을 떠나길 주저하지 않았던 조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꼬레를 다녀갔을 시절엔 서울역이 이곳이었겠지?” 무슈 프랑스는 유쾌한 상상을 하며 서울 구경에 나섰다.

다시 시작된 남북 대화 이후 서울역이 새삼 달라 보인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머지않아 끊어진 철도가 연결돼 저 북쪽의 국경을 넘어 대륙을 횡단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이 옥류관 냉면과 개마고원 트래킹과 백두산 등산에 대한 상상을 즐기고 있다. 내 주변에서 가장 많이 하는 상상은 “기차 타고 유럽가기”다. 태어날 때부터 섬나라 아닌 섬나라였던 우리나라가 대륙과 이어질 수 있다니, 이건 마치 고아인줄 알고 자랐는데 갑자기 자신이 왕족임을 알게 된, 뭐 그 정도의 충격 아닐까? 우리만큼이나 유럽 젊은이들도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할 것이다. “기차 타고 BTS 공연 보러 한국에 갈 수 있다니!”라며 행복해할지도 모른다.

요즘도 서울로를 걸으며 서울역을 내려다보곤 한다.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상상이 가능한 서울역은 그 전의 종착역인 서울역과 분명 다르게 보인다. 열차가 멈추지 않고 대륙으로 달리는 새로운 시작점이 될 서울역. 그러고 보면 1925년에 지어질 때부터 서울역은 ‘국제 기차역’ 이었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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