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이면 전 세계의 눈과 귀가 프랑스 남부 작은 해변 도시 칸에 쏠린다. 월드컵과 올림픽에 이어서 ‘세계 3대 빅 이벤트’라 불리는 칸국제영화제(칸영화제) 때문이다. 세계적인 스타와 유명 감독들이 한달음에 찾아오고, 새로운 예술 지향을 반영한 신작 영화들이 세계 최초로 스크린에 걸린다. 인구 7만 4,000여명에 불과한 그곳에 영화제 기간 무려 21만명이 방문한다. 전 세계 매체에서 파견한 취재 인원만 해도 4,000여명에 이른다.
올해로 71회를 맞은 칸영화제는 지난 8일(현지시간) 개막해 한창 열기를 더해 가고 있다. 마틴 스코시지 감독과 배우 줄리안 무어, 페넬로페 크루즈, 이자벨 아자니, 판빙빙 등 수많은 별들이 개막식 레드카펫을 밟았다. 한국에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이 경쟁부문에 초청돼 19일 폐막식까지 관심을 내려놓을 수 없다.
칸영화제는 영화인들에게 꿈의 무대다. 그 명성과 위상은 ‘세계 3대 영화제’로 함께 묶이는 베니스국제영화제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비할 바가 아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칸영화제와 그 나머지 영화제’라는 평판이 나올 만큼 압도적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최고상)이 한국영화계 ‘숙원사업’으로 여겨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계 3대 영화제’는 이제 없다
칸영화제는 영화 종주국인 프랑스의 자존심과 명예를 상징한다. 1946년 출범한 직후엔 제2차 세계대전에 상처 입은 프랑스 국민의 자긍심을 북돋으며 사회 통합 기능을 했고, 70년이 흐른 지금은 자본의 논리에 맞서 예술영화의 가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를 자임하고 있다. 관객보다 영화인이 우대되고 언론도 등급별로 관리하는 탓에 때때로 보수적이고 오만하다는 비판도 받지만, 그 권위만큼은 부인하기 힘들다. 미국영화협회(MPAA)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는 영화제 수만 3,000개가 넘는다. 칸영화제는 어떻게 정상의 자리에 올랐고, 당당한 위세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칸영화제는 예술영화의 가치를 수호하면서도 변화를 발 빠르게 수용해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유럽을 휩쓴 68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아 진보적 작품을 선보이는 감독주간을 1969년 신설했고, 1978년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을 신설해 경쟁부문에 포함되지 못한 신진 감독과 작품을 발굴했다. 공식부문과 비공식부문 간의 건전한 경쟁 체제를 통해 칸영화제는 전통을 예우하면서도 새로운 미학적 흐름을 제시하며 세계 영화계의 제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때문에 칸영화제 초청장은 더할 나위 없는 명예이면서 그 자체로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칸영화제는 감독과 배우에게 가장 좋은 프로모션 플랫폼”이라며 “안 팔릴 영화도 팔리게 하는 곳이 바로 칸영화제”라고 말했다.
칸영화제가 성장한 데는 필름 마켓(영화 거래 시장)의 영향력이 무엇보다 컸다. 칸영화제는 3대 영화제 중에 가장 먼저 필름 마켓을 운영한 곳이다. 1959년 설립돼 벌써 6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필름 마켓은 세계 영화계 큰 손들을 불러들였다. 예술영화부터 거대 자본이 투입된 대작들까지 판권 거래와 투자 유치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지난해엔 118개 국가에서 3,820개 영화가 필름 마켓에 참여했고, 등록된 참가자만 1만2,324명에 달했다.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필름 마켓은 비유럽권 영화가 전 세계로 진출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며 “특히 상업성이 약한 예술영화들에 대중적 관심과 배급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지리적 장점과 탄탄한 인프라도 빠질 수 없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지중해 휴양지이면서 빅 이벤트를 치러낼 만한 행사 시설과 숙박 시설 등이 갖춰져 있다. 칸에서는 영화제 말고도 광고제와 방송영상견본시 같은 국제 행사가 1년 내내 끊이지 않고 열린다. 물가 비싼 관광지인 베니스나 오랜 세월 분단돼 있던 베를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점이다.
이창동 감독의 수상 가능성은?
칸영화제는 자신들이 발굴한 감독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한다. 신작 계획과 제작 과정도 유심히 살피면서 각 부문에 초대한다.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중국의 지아장커 감독, 프랑스 영화 거장 장 뤼크 고다르 등 올해 경쟁부문에 오른 감독 대다수가 칸영화제 단골 손님이다. 이창동 감독도 마찬가지다. 2000년 ‘박하사탕’이 감독주간에 초청된 이후 ‘버닝’까지 다섯 번이나 초청장을 받았다. 20003년 ‘오아시스’는 비평가주간에 초대됐고, 2007년 ‘밀양’은 전도연에게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안겼다. 2010년 ‘시’는 각본상을 받았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8년간 작품 활동에 제약을 받은 이 감독에게 칸영화제는 명예로운 복귀 무대다. 칸영화제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한국영화계가 이 감독의 수상에 기대를 거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전찬일 평론가는 “올해 경쟁부문 심사위원 9명 중 5명이 여성으로 구성된 사실에 비춰볼 때 여성주의적 시각이 심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버닝’의 수상 가능성을 높게 봤다. ‘오아시스’에서부터 여성 캐릭터가 부각되기 시작해 ‘밀양’을 거쳐 ‘시’에 이르면서 여성이 이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해석이다. ‘버닝’은 칸영화제에서 16일에 공식 상영된다. 전 평론가는 “이 감독 작품 세계의 연장선에서 ‘버닝’을 봤을 때 여성 캐릭터의 비중과 의미가 상당할 듯하다”며 “보편성도 중요하게 따지는 최근 칸영화제의 경향을 고려하면 ‘버닝’은 칸의 선택지에 정확히 부합한다”고 평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칸영화제에서 꼭 봐야 할 작품 10편에 ‘버닝’을 선정하기도 했다.
칸 앞에 놓인 시대적 과제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칸영화제도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기술 발전과 시대 정신을 외면한다는 비판이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올해 특히 문제가 된 이슈는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업체 넷플릭스 영화 금지와 ‘미투(#Me Too)’ 운동이다.
지난해 칸영화제는 넷플릭스가 제작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와 노아 바움백 감독의 ‘마이어로위츠 이야기’를 경쟁 부문에 초청해 프랑스 극장 사업자들의 반발을 샀다. 프랑스 국내법은 극장 상영 이후 36개월이 지나야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넷플릭스는 온라인과 극장 동시 상영 정책을 내세우고 있어 양측의 입장이 충돌했다. 결국 칸영화제는 올해부터 넷플릭스 영화를 경쟁부문에서 배제했고, 이에 반발해 넷플릭스는 비경쟁부문 출품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클래식 부문 초청이 거론됐던 오손 웰스의 미공개 유작 ‘바람의 저편’ 상영이 무산됐다.
남성 편향적이라는 비판은 올해도 반복됐다. 경쟁부문 초청작 21편 가운데 여성 감독의 작품은 에바 위송 감독의 ‘걸스 온 더 선’, 나딘 라바키 감독의 ‘가버나움’, 앨리스 로르와처 감독의 ‘라자르 펠리체’ 등 단 3편에 불과하다. 영화계 성평등 요구에도 여성 영화를 발굴하는 적극성은 부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쟁부문 심사위원 9명 중 5명을 여성으로 채운 것도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전찬일 평론가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심사위원장으로 임명된 건 여성 감독 영화 두세 편이 경쟁부문에 진출한 것에 비교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이 때문에 심사 결과가 어느 때보다 주목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 영화계가 마블영화 같은 블록버스터 시리즈 중심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필름 마켓의 영향력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 브래들리 쿠퍼가 주연과 연출 제작 등을 겸한 ‘별이 태어나다(A Star Is Born)’ 등 몇몇 작품들이 칸영화제의 초청을 거절한 사실도 전해졌다. 상업적 영향력이 큰 2월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아카데미) 시상식을 노리는 작품들은 시기적으로 먼 칸영화제보다는 8월 베니스영화제와 9월 토론토영화제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베니스영화제에서 2016년 최우수여자배우상(에마 스톤)을 받은 ‘라라랜드’와 2017년 황금사자상(최고상)을 받은 ‘셰이프 오브 워터’는 아카데미에서도 각각 감독상(데이미언 셔젤)과 작품상을 받으며 화제성을 극대화했다. 영화수입사 오드의 김시내 대표는 “특히 영어권 작품들에서 칸영화제 탈피 경향이 두드러진다”며 “최근 4~5년 사이에 칸영화제의 마켓 기능이 크게 약화된 걸 체감한다”고 전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