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X세대가 거침없는 보폭으로 캠퍼스를 활보하던 시절. 이 수업은 학교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낡고 오래된 강당에서 시작됐다. 한창 ‘연애’가 고픈 청춘들에겐 뜬구름 같았을 이 강의의 이름은 바로 ‘부모 되기 교육’. 20년이 흘렀다. 일찍이 ‘부모 되기’를 포기해버린 학생들이 태반이건만, 강의실은 여전히 가득 찬다. 삐걱대던 간이 칠판이 스크린과 빔프로젝터로 바뀌는 동안, 듬성듬성 보이던 남학생들이 어느새 절반에 가까워졌다. 학생들은 변함없이 애타게 묻는다. “나는 왜 이렇게 키워졌을까?”
# 2003년, 엄마들은 점심상을 차리기 전 TV 앞에 앉았다. 채널 13번에서 열리는 ‘한 시간 짜리’ 부모 학교에 출석하기 위해서였다. 매일 오전 11시 반, EBS에선 방영됐던 <60분 부모>였다. 그렇게 시작된 ‘부모 교육’ 다큐멘터리의 계보는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아이의 밥상>(2010)부터 <가족 쇼크>(2014)에 이르기까지. 부모들은 변함없이 애타게 묻는다. “내 아이는 왜 이렇게 자랐을까?”
지난해 우리나라에선 역사상 가장 적은 수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런 소식이 딱히 놀랍지 않은 이유는, ‘또 최저치가 깨졌다’는 이야기가 거의 매년 들려오기 때문. 그만큼 저출산은 이제 호들갑 떨며 염려하기에도 민망한 현실이 돼 가고 있다. 놀라운 것은 대다수가 부모 되기를 포기하는 시대에 ‘부모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는 여전히 뜨겁다는 것이다. 부모 되기를 배우는 강의가 무려 22년째 대학생들의 부름을 받고 있고, 누가 볼까 싶은 육아 TV 프로그램의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대에 난감하다. ‘부모 되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말한다. “꼭 부모여야만 부모의 존재를 고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20년 넘게 ‘부모 되기 교육’ 수업을 해 온 정순화(63) 고려대 가정교육과 교수와 <마더 쇼크>(2012), <파더 쇼크>(2013), <가족 쇼크>(2014) 시리즈를 연이어 만든 육아 다큐 전문 감독, 김광호(49) EBS PD를 만났다. 오래된 고민 위에 끊임없이 새로운 고민을 더해가는 이들에게서 이 시대의 ‘부모론’에 대해 들어봤다.
나는 어째서 그토록 증오했던 당신의 모습을 닮았을까
“저는 비혼 주의자입니다.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어요. 단순히 ‘내 부모’가 궁금해 선택한 이 수업이 결국 ‘저 자신’을 향하며 끝맺어졌습니다. 저처럼 부모가 될 생각이 없는 학우들도 꼭 한번 들어보길 바라요.”
강의 평가란엔 ‘간증’이 넘친다. 대학에 오는 순간까지도 갈등뿐이었던 부모와의 관계가 마침내 ‘해빙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는 극적인 증언도 종종 등장한다. 가장 많은 소감은 역시 ‘나 자신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것. “매 학기 같은 과제를 내줘요. ‘나는 어떻게 커 온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내 부모의 육아를 평가하게 하는 거예요.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낱낱이 적어 내린 학생들이 많아요. 독이 된 기억들을 토해내고 드러내 보이면서 스스로를 치유하는 거죠.” 필요 이상으로 소심하고, 나이답지 않게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키워져 온 것임’을 깨닫는다. 저만치 앞서 나간 부모가 그물처럼 던져 놓은 기대가 사실은 ‘오랜 속박’이었음을 고백하고 나면 눈물이 솟는다. 여기서 정순화 교수는 질문을 던진다. ‘부모님은 왜 그랬을까. 너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착각해요. 유달리 가난해서, 자존감이 낮아서, 남들과는 다른 마음의 병이 있어서 뒤틀린 부모가 되는 거라고. 아니에요. 생각보다 평범한 사람들도 생각보다 쉽게 괴물 부모가 됩니다. 주로 원부모와의 갈등과 응어리를 청산하지 못한 채 부모가 된 사람들이죠.” 결국 자신이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내 부모의 끔찍했던 모습만 답습하게 된다. 이에 정 교수는 말한다. 부모의 어떤 말과 행동이 나를 일그러지게 했는지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엄마, 아빠도 결국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비슷한 ‘부모 전형’을 물려받았을 확률이 높아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해까진 힘들더라도 인정할 순 있게 돼요.” 더불어 지금 내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일단 번듯한 대학에 가라’는 부모의 일방적 요구에 응하기 위해 전전긍긍해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남들 똑같이 다하는 걸 하고 대신 절대 실패하지도 말라는 요구였죠. 그게 학습된 무기력이었을 뿐, 나의 무능력이 아니었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원망을 뛰어넘어 자신을 만난다. 부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 된다.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니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완벽한 부모’는 있다고?
“좋은 부모가 되고 싶으니까, 닥치는 대로 정보를 찾아요. 전문가 선생님들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래요. 그래야 좋은 부모라고. 무슨 공식 대입하듯이 잡다한 방법론을 다 써 보죠.”
사방에서 육아 지식이 넘치는 시대, 아는 것이 이렇게나 많아졌는데도 아이를 키우는 건 여전히 힘들다. 첫 딸이 다섯 살을 넘길 무렵인 2005년, <60분 부모>의 담당 프로듀서가 된 김광호 PD는 의욕 넘치는 아빠였다. 내 아이가 맞닥뜨린 문제라고 생각하니 열의가 솟았다. ‘아는 것이 힘! 무슨 문제든 제대로 공부해 거뜬히 해결해 보리라’. 그런데 웬 걸, 어떤 방법을 적용하든 그때뿐이었다. 이쪽에서 막으면 다른 쪽이 터져 나왔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만난 대부분의 부모들이 같은 어려움을 호소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아이는 바뀌지 않을까요. 나에겐 부모로서의 소질이 없는 걸까요.” 처음에는 그저 공감했지만,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 말은 곧 내 아이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나한테 그럴 권리가 있나? 오만이었죠. 애한테 문제 일으키지 말라는 건, 성장을 멈추라는 뜻이에요. 그건 아이가 크면서 던지는 메시지인데 말이에요.” 내 아이의 문제는 어떤 것이든 완벽하게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이었던 셈. 부모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건 ‘좋은 부모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결국 문제는 아이보다 부모에게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해주려는 부모들, 아이의 작은 흠에도 ‘내 탓이오’ 자책하는 부모들, 숨막혀 하면서도 완벽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그들은 결국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졌다. 김 PD는 말한다. 당당하게 ‘80점짜리 부모’가 될 용기를 가지라고. “<마더 쇼크>에서 9살 한국 아이와 7살 영국 아이의 아침 일상을 비교한 적이 있어요. 완전 딴판이었죠. 부모 역할만 비교하면 한국 엄마는 2만점이었어요. 대신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나가는 순간까지, 한국 엄마는 아이의 모든 걸 대신해준다. 깨워주고, 입혀주고, 심지어 밥까지 떠먹여준다. 영국 아이는 알람을 듣고 제 때 일어나는 것부터 모두 ‘제 몫’ 이었다. “우리 애들한텐 스스로 한 선택에서 쓰라린 실패도 맛보고, 다시 도전하며 이뤄가는 경험이 없는 거죠. 자기 효능감이 사라질 수밖에요.” 2만점 짜리 부모는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를 만든다. 80점짜리 부모가 되라는 건 그 이유다. 아이는 당신의 생각보다 강하기 때문에.
80점 부모가 될 용기로 “미안해하지 마세요.”
하지만 맞벌이 부모는 늘 불안하다. 80점은커녕 50점도 안 될까 봐서다.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기 일쑤. 김 PD는 단호하게 고한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미안해하는 순간 당신의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촬영 중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엄마의 하루를 통째로 따라가는 건데 워킹맘들은 회사 촬영이 힘드니 약 7시간 정도를 찍어요. 전업주부들은 13시간 정도고요. 시간은 두 배나 차이 나는데 두 엄마가 하는 일들을 보면 다 똑같아요. 1시간을 쏟냐 2시간을 쏟냐 차이인 거죠." 육아에 관심 있는 부모들이라면 으레 만드는 체크 리스트가 있다. “보는 앞에서 숙제시키고, 틈틈이 전문가들이 하라는 대로 놀아주기도 하고, 그 와중에 훈육 시간도 가지고… 시간도 부족한데 너무 많은 일들 해 내려고 해요.” 제한된 시간 안에 모든 미션을 ‘클리어’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결국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아이가 잘 따라주지 않을 때엔 짜증이 폭발한다. “이것도 못해?” 금방 후회한다. ‘같이 있는 시간도 부족한데, 화까지 내다니 나는 정말 나쁜 부모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 절대불변 법칙이 여기서도 등장해요.” 양보단 질로 승부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라는 것. 김 PD는 말한다. “휴대폰은 잠깐 덮어놓고 아이의 눈을 보며 나누는 15분의 대화가 한 공간 안에 의미 없이 공존하는 15시간보다 나아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이들은 당신의 생각보다 강합니다.” 완벽한 부모가 되기 위한 필수 체크 리스트는 버리고, 지금 당장 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에 집중한다. 오늘 아이의 말동무가 됐다면, 그 다음 날은 선생님, 또 다른 날엔 그냥 기댈 언덕이 되어 주면 된다. 아무리 짧아도 부모와 ‘오롯이 단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아이는 절대로 불안하지 않다.
“아빠들, 육아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겁니다”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 그리고 아빠의 무관심.’
몇 년 전, ‘아이를 성공적으로 키우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며 우스갯소리로 떠돌았던 말이다. 통념은 금세 뒤집혔다. “아빠들이여, 명심하세요. 숨은 공로자가 아니라, 주역입니다. 육아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겁니다.” 정 교수는 힘주어 말한다. 맞벌이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는 시대, 엄마의 독박 육아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이다. 다 같이 모여 살던 시대에는 어머니 대신 할머니나 숙모가,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나 큰아버지가 양육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공동체가 무너진 지금, 아이가 처음으로 사회성을 깨우칠 수 있는 상대는 엄마와 아빠가 전부다. “아빠는 제2의 엄마가 아니에요, 엄마의 보조자도 아니고요. 아빠는 ‘아빠라서 더 잘할 수 있는 역할’이 있습니다. 그 역할을 다해주지 못하면, 아무리 어머니가 노력해도 딱 그만큼의 결핍이 발생할 수밖에 없어요.”
2013년 방영된 EBS <파더쇼크>에는 엄마와는 다른 아빠의 양육법이 등장한다. 엄마와의 놀이가 정서적인 교감이 통한다면, 아빠와의 놀이는 함께 몸을 움직여 발생시키는 실체적 에너지가 통한다. “근데 아빠들은 혼란스러워요. 가타부타 아는 척 말고 관심은 말끔히 꺼주되, 돈만 잘 벌어다 주면 그걸로 족했던 구시대 아버지상이 남아 있는 거예요. 아무리 자상하고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어 보려고 해도 어깨너머로 본 게 없는 거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상 알고 보면 방법은 쉽다. 엄마보다 잘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조금만 찾아보면 전문가들이 방법까지 세세히 짚어준다. “퇴근해서 피곤하다고 바로 눕지 말고, 10분만 아이 몸에 로션을 바르며 마사지라도 해주세요. 주말엔 30분만이라도 몸을 확 움직이며 흠뻑 같이 땀 흘려주시고요.” 결국 문제는 의지다.
“문제성 행동을 보이는 원아들 몇 명을 대상으로 놀이치료를 한 적이 있어요. 남자아이가 자꾸 어린이집의 친구들을 물어뜯더라는 거죠. 알아보니 아빠는 매일 야근해 아이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미처 다 발산되지 못한 신체 에너지가 그런 식으로 표출된 거였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어땠냐. 일 끝내고 와서도 살림해야 되니까 대화 이상의 놀이를 해주기엔 역부족이었죠.” 사례를 설명하며 정 교수는 조심스레 ‘파파쿼터제’(남성 육아휴직 사용을 의무화하는 법안)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들 얘길 들어보면요. 가장 바라는 건 휴직 기한 연장이니 파파쿼터니 하는 거창한 게 아니더군요. ‘거기까지 안 바란다. 여자들 1년 쓰고 돌아오는 것만이라도 눈치 주지 말아달라.’”
20점의 힘은 나를 위해 남겨둬라
“부모가 되는 것이 기대되지 않아요.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부모라는 무거운 책임 아래 숨 막히고 싶지 않고요. 물론 좋은 부모가 될 자신도 없습니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쪼들리는 건 통장 잔고뿐이 아니다. 부모의 과한 욕심을 먹고 무섭게 자라난 기대의 무게에 짓눌려 왔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감정적으로는 빈곤하다. 연애, 결혼, 출산, 그렇게 하나씩 포기했다. ‘삼포 세대’의 등장이다.
“대학에 오는 것도, 직장을 구하는 것도 필요 이상으로 힘들어요. 요 근래 강의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의 표정은 패잔병 같아요. 그러니까 더 힘들고 싶지 않은 거겠죠. 게다가 머릿속엔 자식을 위해선 모든 걸 포기하고 매달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부모 세대가 물려준 ‘부모 각본’이죠. 자식으로서 너무 힘들었음에도 나 또한 그런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럼 그걸 깨 보면 어떨까.”
정 교수는 말한다. 한껏 부푼 완벽한 부모상의 거품을 터뜨리면 ‘부모’라는 두 글자에서 느껴지는 이 거대한 무게도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부모가 되는 순간 나를 잃게 될 것이 두려운 학생들에겐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결국 평생 영원히 나와 헤어지지 않는 사람은 오로지 ‘나’ 뿐이라고. 자식은 머물렀다가도 떠나는 존재라고. 그러니 나를 돌보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80점짜리 부모가 되라고 말한 김 PD도 힘주어 말한다. “왜 80점일까요? 남는 20점은 나를 위한 거니까.”
‘나에게 자식은 ( )다.’
<마더쇼크>와 <파더쇼크>에 출연한 엄마, 아빠들은 이렇게 빈칸을 채워 넣었다. ‘나의 삶’, ‘나의 모든 것’, ‘나의 전부’. 이번엔 기자가 마지막으로 김광호 PD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자식은?”
“덜 떨어진 나를 어른으로 성장시킨 존재요. 아빠가 되지 않았더라면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고민들. 그 고민들을 통해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모 되기를 포기하는 삼포세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지만 여건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고민하고 있다면, 단언컨대 부모가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에요.” 그는 어딜 가나 자주 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육아(育兒: 아이를 키우는 것)’란 ‘육아(育我: 나를 키우는 것)’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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