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신비한 각성의 순간이 있다. ‘아 그랬지, 그런 거구나.’ 해묵은 제각각 사건들이 하나로 뭉쳐 파드닥 살아난다. 그 화학 반응의 촉매는 대개 사소하다. 그날 부부의 대화처럼. “조현민(이 물컵 던진 사건 관련 기사 처리) 때문에 늦어요.”(나) “다 내 탓인 거 같아 미안해요.”(아내)
인과를 살피려면 2006년 7월 25일 사내 사건이 먼저다. 전날 사건 팀 후배가 쓴 사회2면 톱(머리기사) 때문에 난리가 났다. 새 대한항공 북극항로의 안전 문제를 짚는 기사였다. “이러면 나 (오너한테) 죽는다”는 업체 임원이 다녀갔다는 전언. 기사에 문제가 있다면 기업이든 개인이든 언론사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정정을 요구하는 일은 마땅하다. 다만 도와 선을 넘게 되면 탈이 나는 법인데, 그날 감정이 또렷이 기억날 정도로 황당했다. 게다가 그런 기업은 대한항공이 거의 전무후무했다.
마카다미아(땅콩) 회항 사건 때만 해도 잊고 있었다. ‘아버지의 죄가 더 크다’ 자식 교육의 반면교사로 삼자고 다짐했을 뿐 사건의 다른 본질을 헤아리지 못했다. “조현아가 사실 3남매 중 가장 착해”, “진짜배기는 그 엄마야”, “오너가 상상초월 들볶아” 같은 얘기는 과장이 깃든 우스개라 여기며 흘려 들었다. 그게 죄다 사실에 가깝다니 내가 품은 기사 관련 억울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전모는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다. 누구 목소리가 큰지 모녀가 갑(甲)질 경연을 하더니 상속세 탈루, 조세 포탈, 횡령 및 배임, 밀수, 미술품 은닉, 부정 편입학, 필리핀 가사도우미 불법 고용, 폭행 등 가족 전체가 의혹 대잔치를 선보이고 있다. 박정희ㆍ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선대 창업주의 기발한 영업 수완과 무책임 경영 행태까지 폭로되는 마당이다. 재벌 3세의 일탈을 넘어 3대에 걸친 악행의 연대기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 없는 조양호 회장 일가의 안하무인은 결국 적폐다. 사면초가는 한낱 물컵 탓이 아니다. 교만과 탐욕을 입힌 성냥개비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탑에 물컵이란 개비를 얹다 와르르 무너진 꼴이다. 사필귀정이다.
환골탈태는 기대할 수 없겠다. 18개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우기는 A4용지 5장 분량 ‘사죄 빙자’ 해명, 진에어 대표이사 ‘책임 빙자’ 퇴진만 봐도 그 꼼수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직원 무시도 모자라 변명으로 일관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회사 자금을 횡령하고 신문사를 걸어 잠근 뒤 가짜 신문을 찍던 5년 전 옛 한국일보 사주와 빼쐈다.
엄단은 결국 을의 특권, 연대의 힘이다. 쫓겨난 기자들은 당시 똘똘 뭉쳤다. 내 아내도 힘을 보탰다. 지지 방문한 교회 담임목사와 더불어 남편 회사 건물 둘레를 폭우 속에 일곱 바퀴 돌았다. ‘믿음으로 7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히브리서 11장 30절)’. 우리는 승리했다.
단단한 성채도 무너진다. 진심끼리 어우러지면 못 이룰 일이 없다. 글머리 아내의 ‘내 탓’ 타령은 이렇다. “그때 정의를 세워주라고 기도했거든요. 그런데 그 바람이 그 건물에 속한 모든 기업에 이뤄졌나 봐요. 그 사람들이 다 벌을 받게 됐으니.” 당시 한국일보가 입주한 건물은 한진빌딩, 사실상 조양호 회장의 것이다. 아내는 이미 5년 전 한진 직원들과 연대하고 있던 셈이다. 신앙과 이성을 버무릴 생각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공교로운 일이다.
‘하나가 꾸는 꿈은 그냥 꿈이지만 만인이 꾸면 현실이 된다.’(칭기즈칸) 어쩌면 조 회장 일가 관련 의혹은 경영권을 내놓을 만큼 중죄가 아닐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조양호 일가 아웃’을 외치는 한진그룹 진짜 주인들의 촛불집회를 지지하고 연대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내 아내의 기도발은 의외로 세다.
자, 끝으로 오월에 잊지 말아야 할, 바라는 꿈도 담아본다. 첫 글자를 모아.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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