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7일 오후 8시 서울 강북구 미아동 한 다세대주택. 2층 사는 남성이 늦은 외출을 하려고 집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오늘은 왜 안 보이지?” 경험상 그 시간이면 반지하층 방에 사는 소모(당시 78) 할머니가 나와 있어야 했다. 하루 종일 동네를 돌면서 모아온 폐지를 한창 정리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다른 일이 있겠지’ 하면서도 왠지 예감이 안 좋았다. ‘몸이 어디 안 좋은 건가?’ 마침 주택 담벼락 안쪽으로 나 있는 안방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으로, 할머니가 나체로 누워 있었다. 얼굴 위로는 베개가 올려져 있었고, 얼핏 봤지만 숨이 멈춰 있는 듯 했다.
질식사로 추정됐다. 누군가 그의 얼굴을 베개로 짓누르는 동시에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검시 결과가 나왔다.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문에는 열쇠가 그대로 꽂혀진 채 열려 있었다. 별다른 침입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단서라고는 숨진 할머니 몸에서 검출된 체액과 혈흔에서 발견된 남성 DNA였다. 성폭행을 동반한 살인 범죄였다.
관할 강북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차려졌다. 범죄 현장 인근에 사는 남성들, 그 중 유사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들 위주로 탐문 조사가 시작됐다. 탐문 중 조금이라도 태도가 미심쩍거나 명확한 알리바이를 대지 못할 경우 곧바로 DNA를 채취해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것과 대조해 나갔다. 물론 성과는 쉬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형사들이 직간접 조사한 인원만 1,000명에 달했다.
그나마 폐쇄회로(CC)TV 분석에서 수사에 도움이 될 단서가 나왔다. 시신이 발견된 그날 오전 양복을 말끔히 차려 입은 한 남성이 할머니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 전후로 집을 출입한 외부 사람은 없었다. 다만 화질이 좋지 않았다. 얼굴이 또렷하지 않아 누군지 특정할 수 없었다.
수사 착수 3일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전화가 왔다. “DNA를 추가로 검사해보니까 한국인 유전자형이 아니더라고요. 남아시아계 남성으로 판단됩니다.” 남아시아에서 국내에 들어와 살고 있는 남성이 한둘이 아닐 테고, 걔 중에는 주거지를 제대로 등록하지 않은 경우가 많을 터. 그래도 경찰은 조금이나마 탐문과 조사대상 범위를 좁혀 준 DNA 결과가 반갑기만 했다. 형사들은 끊임없이 가가호호, 의심되는 곳을 찾아 다녔다. 남아시아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모인다는 경기 김포시도 수시로 찾았다. ‘의심→DNA 채취→DNA 불일치’가 반복되면서 시간은 쇠털처럼 흘러갔다.
실마리는 우연히 찾아왔다. 사건 발생 2주가 지나서였다. 그날도 현장 인근에 형사 한 명이 잠복 중이었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아이들이 하교 시간에 맞춰 한꺼번에 주택가로 몰려 들었다. 그날 따라 유난히 형사 눈에 띄는 남자아이 둘이 있었다. 혼혈로 보였다. 둘은 형제인 듯 손을 꼭 붙잡은 채 걷고 있었다. 감이 왔다. 형사가 아이들 뒤를 밟았다.
예상대로 두 아이는 같은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침 집주인이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고 해서 조사를 하지 못했던 곳이다. 할머니 시신이 발견된 집과 5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문 앞에서 범행 현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근거리였다. 찾고 있는, 용의자의 아이들 같다는 직감이 퍼뜩 들었다.
현장 인근에서 용의자가 찍힌 CCTV 캡쳐 화면을 보여주자 두 아이 중 머리가 큰 쪽이 “아빠다!”라고 외쳤다. “아빠 진짜 맞니?” 형사가 재차 물었다. “아빠가 평소에 출근하면서 입고 다니던 옷이랑 똑같은데요.” 작은 아이 역시 “걷는 모습도 비슷해요”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 엄마는 표정이 달랐다. “남편이 안 들어온 지 꽤 됐고 연락도 없어요.” “(아이들 아빠가) 지금 어디 있는지 우리도 모르겠어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 건 아니었지만, 의심은 짙어졌다.
‘들어온 지 오래됐고, 연락도 안 된다’는 아이들 엄마 말은 거짓이었다. 형사가 집을 떠나자마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찰이 찾아왔어요. 무슨 일 있어요?” 남편은 ‘별일 아니라’라면서 적당히 답을 둘러대고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 사람은 왜 찾아요?” 며칠 후 수사본부 내 강진엽 강북경찰서 강력2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수도권 내 한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형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예전에 저희 서에서 통역 업무를 해주던 사람이 있는데요. 자기를 강북서에서 찾고 있다고 하던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런 건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들어보니, 며칠 전 형사가 찾았던 그 집 아이들 아빠였다. “별 거 아닙니다.” 왠지 사건이 거의 풀려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쪽에 작은 사건이 하나 있는데, 그거 관련해서 혹시 아는 게 있나 참고 삼아 물어보려고 그랬습니다.” 슬쩍 웃음이 났다.
유력한 용의자의 등장이었다. 신원 파악은 금세 끝났다. 방글라데시에서 귀화한 노모(39)씨. 수사팀은 노씨 최근 통화내역 분석에 들어갔다. 현재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영등포 지하상가 안에 있는 휴대폰가게. 그곳으로 출동한 강 팀장을 만난 노씨는 기다렸다는 듯 순순히 임의동행에 응했다. 하지만 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경찰은 노씨 입 안 세포를 긁어 채취한 뒤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틀 후 DNA 분석 결과가 수사팀에 전해졌다. 예상대로 현장에서 나온 것과 노씨 것은 ‘일치’했다. 더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그날 경찰은 동대문역 2번 출구 앞에 있던 노씨를 긴급체포했다.
노씨는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이 내민 CCTV 화면을 두고는 그 시간대 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아내도 “남편 말이 맞다”라면서 전날 저녁 안방에서 잠든 뒤 다음날 오전까지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고 거들었다. 노씨는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면서 휴대폰 두 대를 내밀었다. 범행 당일 휴대폰에는 통화기록이 전혀 없었다. “자고 있었다니까요.”
그러나 알리바이는 쉽게 깨졌다. 통화기록을 다시 확인해 보니, 노씨에게는 휴대폰이 한 대 더 있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두 대만 경찰에 제출한 것이다. 게다가 숨긴 건 대포폰이었다. 그곳에는 8월 26일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수 차례 통화를 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선 노씨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 시간 수십 차례 오간 문자메시지 흔적도 있었다. 그가 연락했던 상대는 강모(당시 42)씨. 노씨의 내연녀였다. 강씨를 경찰로 불러들였다.
강씨는 노씨를 4년 전 서울의 한 곰탕집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대포폰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목적으로 마련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노씨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겉으로 보자면 분명 노씨는 범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취업을 위해 1992년 한국에 들어왔다. 12년 정도 지나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는 한국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아 건실한 가정을 꾸렸다. 그런 그를 두고 가족과 이웃은 “성실하고 자상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외모도 호남형이어서 유독 주변 사람에게 인기도 많았다고 했다.
노씨는 영등포 지하상가에 휴대폰 가게를 열었다. 가게 한쪽에는 산업훈장이 전시돼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 고위직 관료와 악수를 나누는 대형사진도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게는 휴대폰을 사고 팔기 위해 온 동남아시아계 외국인들로 언제나 문전성시였다.
내연녀 강씨 입을 통해 노씨의 범행 퍼즐은 더욱 단단히 맞춰져 갔다. 범행 전날 저녁 술에 취한 강씨는 노씨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고 한다. 가정이 있는 남자와 만나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노씨는 결별 통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화와 문자메시지가 여러 차례 오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별에 대한 울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동네를 배회했다. 그때 보인 피해 할머니 집, 마침 열려 있던 문. 그렇게 할머니는 이유도 모른 채 노씨에게 목숨을 잃었다.
경찰은 노씨의 철저한 이중생활에도 혀를 내둘렀다. 그의 휴대폰가게는 사실 동남아시아 외국인들에게 대포폰을 판매하는 등 불법의 온상이었다. 장물아비에게 분실 휴대폰을 구매해 외국에 판매하기도 하는 등 거래 규모도 상당했다. 2005년에는 강도상해, 인질강도미수, 특수강도로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고, 성매매를 했던 전력도 여럿 있었다.
노씨는 범행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DNA가 중간에 뒤바뀐 것”이라는 계속된 항의에 경찰은 DNA 분석을 두 번이나 더 진행했다. 물론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경찰은 살인 혐의를 적용해 노씨를 검찰로 넘겼다. 경찰 관계자는 “노씨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자신의 대포폰으로 ‘강북할머니 살인사건’ ‘강북 미아동 할머니 살인사건’ 등을 검색했고 심지어 ‘살인사건 공소시효’도 찾아본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1심 법원은 2013년 1월 노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성욕 충족과 화풀이를 위해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고령의 피해자 주거에 침입해 범행을 하는 등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며 “그러면서도 노씨는 유족들의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를 하기는커녕 범행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꾸짖었다. 노씨는 국민참여재판까지 신청하면서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시민 배심원 9명 중 대부분이 유죄로 판단하고 재판부에 무기징역을 권고했다. 심지어 한 명은 사형이 적절하다고 봤다. 노씨는 2013년 11월 대법원이 무기징역으로 확정 판결을 할 때까지도 무죄를 주장했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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