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듯 강렬한 치킨라이스
아보카도에 시럽 더한 음료들
밀려드는 외국문화와 절묘한 조합
“껌과 담배를 소지하고 계신 분은 비행기에서 내리시기 전에 모두 버려 주시기 바랍니다.”
싱가포르에 여행을 가 본 사람이라면 비행기에서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공항에 내리기 전부터 껌과 담배의 반입을 공식적으로 철저히 막는다. 거리의 청결과 질서를 위해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외국인 방문자들의 실수까지도 미리 막는 것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준법정신이 뼛속까지 밴 수준 높은 시민으로 자라난다. 거리는 놀랄 만큼 잘 정돈되어 있고 그 깨끗한 이미지는 누구에게나 인상 깊게 남는다.
싱가포르의 원래 이름 ‘플라우 우종(Pulau Ujong)’은 끝자락에 있는 섬(End Island)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말레이반도 끝에 위치하여 면적은 작지만 지리적 장점을 누구보다 잘 극대화시킨 나라다. 항구도시로서 모든 것을 품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결코 작지 않은 나라이다. 그만큼 “다름”에 대한 수용이 아주 유연하다. 이민자의 나라 싱가포르는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인도인 그리고 유라시아인들로 구성되어 언어도 중국어ㆍ말레이시아어ㆍ영어ㆍ타밀어 4가지 언어를 공식언어로 지정하고 있다. 언어에 능숙하여 그만큼 받아들이는 문화의 폭이 넓어 경제와 문화의 발달이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다. 잘 짜인 질서 안에서 각각의 다름은 오히려 아름다운 융화로 자리 잡는다. 그렇기에 이런 유연한 수용은 음식문화에도 풍성함으로 빛을 발한다.
조화로운 싱가포르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 여기 서울 마포구 홍대와 신촌에 자리 잡고 있다. 동서양의 조화를 그대로 보여 주는 싱가포르의 다양한 디저트와 단순함 속에 깊은 맛을 자랑하는 고소한 한 끼를 소개하려 한다.
입 안에서 톡 터지는 달콤한 꿀떡, 라이스볼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동상이 있다. 얼굴은 사자(Lion), 몸은 인어(Mermaid)의 형상을 하고 있는 큰 사자가 물을 뿜고 있는, 바로 머라이언이다. 국가 공식 마스코트는 아니지만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곳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근처에 위치한 ‘디저트 머라이언’은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달콤한 디저트와 음료를 선보인다. 달콤함 속에 서양과 동양의 조화를 이룬 싱가포르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공간은 한국인 김유씨와 싱가포르인 켄 응(Ken Ng)씨 두 남자의 손에서 탄생했다. 3년 전 한국에 레스토랑 시장조사차 왔던 켄은 싱가포르의 식문화가 없는 한국에서 터를 잡기로 했다. 작은 재료부터 싱가포르의 맛을 전하기 위한 세심함이 돋보인다. 전통적인 것에서부터 요즘 현지에서 유행하는 것까지 놓치지 않고 다양한 메뉴와 25가지 이상의 음료를 선보인다.
디저트 머라이언 카페의 대표적 메뉴는 코피(Kopi)다. 코피는 싱가포르 호키안어(중국 푸젠성 지방에서 내려온 민족이 쓰는 언어)로 커피라는 뜻이다. 커피잔은 머그컵의 반 정도 크기에 에스프레소 잔보다 약간 크고 두껍다. 대부분의 집이나 카페에서 푸르스름한 꽃무늬가 프린트된, 같은 모양의 잔을 사용하는데 이걸 사용해야 제대로 된 싱가포르 코피라 할 수 있다.
코피는 일반 커피원두와는 로스팅부터 다르다. 디저트 머라이언에서 맛보는 코피는 싱가포르에서 볶은 원두를 직접 수입해 온다. 설탕과 마가린 혹은 버터를 살짝 넣고 볶은 아라비카 원두를 싱가포르 전통방식인 융드립으로 내린다. 일반 드립커피와 달리 ‘코피 삭(Kopi Sock)’ 이라는 융으로 만든 작은 필터 주머니에 대여섯 번 반복해서 내리는 전통방식이다. 코피뿐만 아니라 밀크티의 티를 우릴 때도 융드립 방식을 하면 더욱 깊은 맛이 우러난다. 싱가포르에서는 코피에 일반 우유가 아닌 연유를 많이 사용하여 진한 맛이 특징이다. 코코넛이 들어간 달달한 코코넛 커피도 새롭다.
싱가포르에서 반숙한 계란과 카야잼을 바른 카야 토스트에 갓 내린 고소한 코피 한 잔이면 완벽한 아침 식사다. 카야잼은 코코넛우유로 만든 잼으로,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 등 이웃나라에서도 많이 먹는다. 머라이언에서는 사흘에 한 번씩 소량만 만들기 때문에 신선하고 건강한 카야잼을 먹을 수 있다. 토스트한 식빵에 버터와 카야잼을 발라 먹거나, 반숙 계란 노른자에 찍어 먹으면 든든한 아침 식사로 안성맞춤이다.
라이스볼(흑임자 라이스볼, 피넛 라이스볼)은 따뜻한 생강차 안에 하얀 찹쌀떡이 들어가있다. 마치 우리나라 동지 때 먹는 팥죽 속 새알 같은 모양에 흑임자 혹은 땅콩소가 들어 있다. 라이스볼이 입 안에서 몽글몽글 녹으며 톡 터지면 고소하고 달콤한 소가 입 안을 행복하게 해준다. 달콤한 꿀떡에 생강차가 더해지면 행복도 두 배가 된다. 추운 겨울에 라이스볼 하나면 동장군도 무섭지 않다.
연중 기온이 25도 이상인 더운 나라이니만큼 시원한 음료도 다양하다. 포멜론 아이스빙수는 달콤한 망고를 그대로 갈아 얼음 빙수보다 진한 맛에 아이스크림, 망고 과육, 자몽, 새고(Sago)를 곁들인 싱가포르식 빙수다. 포멜론은 자몽과 비슷한 열대과일인데 한국에서 구할 수 없어 맛볼 수 없는 게 아쉽다. 대신 비슷한 식감의 자몽이 포멜론의 자리를 대신한다. 새고는 동남아시아 음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타피오카(카사바의 뿌리에서 얻는 전분) 알갱이인데 목으로 쏙쏙 미끄러지며 넘어가는 감촉이 재미있다.
요즘 싱가포르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보카도 셰이크는 생아보카도만을 갈아 만든 음료로, 샐러드로만 먹던 아보카도의 색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초콜릿 시럽 대신 코코넛 시럽을 넣어 건강한 달콤함이 한층 매력적이다.
싱가포르의 국민음식, 치킨 라이스
푸릇푸릇 새싹으로 가득한 봄날, 발랄한 신입생들로 생기가 넘치는 이화여대 앞에는 다양한 모습의 크고 작은 식당들이 빼곡하다. 그중 유난히 작아 눈을 크게 떠야 찾을 수 있는 ‘까이 식당’은 특히 ‘혼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여덟 자리 남짓한 바테이블이 전부인 이곳은 싱가포르의 ‘하이난 치킨라이스’ 하나로 승부를 보는 뚝심 있는 식당이다.
싱가포르의 ‘국민 음식’ 하면 단연코 치킨라이스다. 중국 남쪽의 섬, 하이난 사람들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하면서 가져온 선물 같은 음식이다. 원래는 하이난 지방의 도시 웬창에서 시작된 음식으로, 중국에서는 도시의 이름을 따 웬창 치킨(Wenchang chickenㆍ文昌雞)이라고도 한다. 현재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에서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뽀얗고 부들부들한 닭고기살에 고소한 밥을 다른 반찬 없이 먹는 것은 같다. 싱가포르에서도 치킨라이스를 하는 식당은 마치 우리나라 삼계탕 전문 식당같이 오로지 단일메뉴로 성공하는 곳이 많다. 그만큼 하나의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만족도를 최고로 끌어 올려야 하는 까다로운 음식이다.
음식을 받으면 ‘우와~’하는 느낌보다는 약간 심심한 느낌이다. 온갖 화려한 소스와 ‘단짠’의 맛에 익숙한 우리의 혀와 입에 밍밍한 듯한 이 맛은 마치 하얀 캔버스 종이 같은 느낌이지만 몇 숟갈 떠 먹은 후엔 이내 중독이 될 것이다.
치킨라이스에서 최고의 포인트는 부드럽게 삶아 내는 고기다. 한 마리를 통으로 삶아 내 조각을 내어 올리므로 뻑뻑하거나 부드러운 부위의 차별 없이 부드러운 식감만 줘야 한다. 싱가포르 현지에서는 한 마리를 통으로 구워 부분부분 조각을 내어 뼈째 상에 올라온다. 까이 식당은 먹기 편하도록 뼈를 모두 발라 부위별 고기가 조금씩 밥 위에 올라간다.
치킨라이스에서 라이스는 조연이 아니다. 밥알의 탱탱한 식감과 닭육수의 고소함이 느껴져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꿀떡꿀떡 넘어간다. 위에 살짝 올라가는 튀긴 마늘 조각은 씹는 맛을 더해 준다. 한 입 한 입 접시에서 사라질수록 왜 치킨라이스가 싱가포르 사람들의 솔(soul) 푸드인지 이해가 된다.
이곳은 단 2개의 메뉴가 전부다. 치킨 누들은 원래 싱가포르 음식은 아니지만 닭국물에 면을 말아 응용해 낸 이 집만의 별미다. 국물이 진하지만 걸쭉하거나 누렇게 기름이 뜨지 않아 탱탱한 면발에 마지막 국물까지 기분 좋게 싹 먹을 수 있다.
까이 식당은 주방부터 서빙까지 김영덕 대표의 원맨쇼다. 10년을 넘게 일식의 주방을 책임져 온 일식 조리사였던 그의 경력에 싱가포르 식당은 누가 봐도 의외의 선택이다. 태국 치앙마이 여행 중에 먹었던 치킨라이스의 맛에 반해 남은 일정 내내 치킨라이스만 먹고 돌아온 그는 요리사로서 궁금함을 못 이기고 여러 번 이 요리 만들기를 시도해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식의 다양한 재료를 다뤄 왔던 그에게 치킨과 라이스, 단 두 개의 단순한 재료로 최고의 맛을 찾는 여정은 오히려 쉽지 않았다. 다시 싱가포르로 떠나 유명 식당에서 맛을 보고 비결을 물었으나 그 누구도 쉽게 답을 주지 않았다. 뒷골목 허름한 가게로 가서 궁금한 점을 물어 허전한 맛을 채우는 비밀을 알아갔다.
노력의 결과 싱가포르 여행객뿐 아니라 대사관 사람들도 인정하는 맛을 찾았다. 하루에 100인분만 만들고 더 이상은 손님을 받지 않는다. 작은 가게의 환경에서 최고의 맛을 낼 수 있는 최대의 양이라고 한다. 충분히 깊은 국물을 뽑아 내 밥을 지어야 하는 음식이기에 서두르고 욕심 내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하려 한다.
다양함에서 조화를 이루는 싱가포르의 모습은 하루하루 외국문화가 밀려드는 우리나라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비록 전통음식은 아니지만 단순함에서 깊이를 알아 가고 자기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입혀 내는 싱가포르의 모습을 우리나라 식문화에서도 기대해 본다.
타드 샘플ㆍ박은선 잇쎈틱 공동대표(@toddsample_e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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