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혼혈 이혼녀를 새식구로 맞아
순혈ㆍ백인우월주의 과거와 결별
성공회 흑인 주교가 설교하고
美 흑인 가수 노래 울려 퍼져
“인종 불평등 깨는 밑거름 계기
열린 영국 이미지 되살려”평가
영국 왕실이 지난 1,000년간 유지해 온 오랜 왕실 관습에 종언을 고하는 ‘세기의 의식’을 치렀다. 영국 왕실은 미국계 혼혈 30대 이혼녀를 새 식구로 맞이하는 결혼식을 통해 ‘왕실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이어져 온 백인ㆍ남성우위 관행이 21세기와 공존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영국 왕실의 달라진 결혼식은 ‘순혈주의, 백인ㆍ남성우월주의가 인류사의 뒷길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인 셈이다.
영국 해리(33) 왕자와 혼혈의 할리우드 여배우 메건 마클(36)이 2년여간의 교제 끝에 19일(현지시간) 런던 인근 윈저 성에서 결혼했다. 이날 결혼식은 틀에 박혔던 과거 영국 왕실의 결혼식과는 사뭇 달랐다. 과거와 결별하려는 왕실의 의지를 보여주는 파격이 곳곳에서 넘쳐났다.
실제로 나이지리아 출신 영국 소설가 이레노센 오코지에는 가디언 기고문에서 “성공회 최초 흑인 주교 마이클 커리 목사의 설교와 영국 왕실 합창단이 흑인 민권운동 가수 벤저민 얼 킹의 ‘스탠드 바이 미’를 부른 장면은 압권”이라고 평가했다. 또 “이 특별한 순간이 인종 불평등을 해소하는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과거와 결별한 파격적 결혼식으로 영국 왕실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왔다. 왕실 역사학자 케이트 윌리엄스는 FT에 “1990년대 하반기 왕실의 인기가 최악이던 어두운 시절이 지나가고, 최장기 국가원수로 오랜 세월을 견뎌 낸 여왕에 대한 존경심, 변화를 상징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기대감이 왕실의 인기를 되살려내고 있다”고 말했다. 인기 높은 다이애나빈이 1996년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고 1997년 사고로 사망하며 왕실에 대한 반발이 극에 달했지만, 바로 그 다이애나의 자식들인 윌리엄과 해리가 왕실의 이미지를 개선했다는 설명이다.
또 마클이 영국 왕실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은 물론,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 이후 퇴색해 가는 ‘통합되고 열린 영국’의 이미지를 되살리고 있다는 언론 분석도 잇따랐다.
하지만 유명무실하더라도 계급을 전제로 하는 왕실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는 반발도 여전했다. 결혼식과 같은 날인 19일 런던에선 영국 왕실 폐지 운동 단체 ‘리퍼블릭’ 주도로 ‘국제 공화주의자 회의’가 열렸다. 리퍼블릭은 “18세에서 34세 사이 절반 이상이 왕실에 무관심하며, 대부분은 여왕이 죽고 찰스 왕세자가 즉위하면 왕실에 대한 지지를 거둘 것”이라고 주장했다. 총 3,200만파운드가 소요된 왕실 결혼식에 밀려난 빈자들의 삶도 논란거리였다. 16일에는 경찰이 결혼식장인 윈저성 근방의 노숙자 소유물을 수거하는 방식으로 노숙자를 쫓아내려 한다는 주장이 나온 바 있다. 경찰과 시민단체 ‘윈저 노숙자 운동’은 “결혼식 날 경비 강화로 인해 특정 물건을 지닌 노숙자들이 쫓겨날 수 있어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일시 보관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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