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독점이라는 국가 본성을 민주주의 가치 위에 두는 권력은 파시즘 권력으로 변질한다. 국가범죄가 횡행하는 파시즘 권력 하에서 사적 범죄와 폭력은 기를 못 펴는 경향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1960,70년대 군사정권의 폭압 ‘덕’에 한국의 조직범죄가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탈리아 1,000년 전통의 범죄집단 ‘마피아’가 가장 왜소해진 때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통치기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 이탈리아 마피아들이 대거 미국으로 도피, 미국 마피아가 급성장했다.
이탈리아 마피아는 하지만 2차 대전 직후의 혼란기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며 복원됐고, 60~70년대를 거치며 국가권력에 대항할 만큼 성장했다. 소상인부터 중소기업인까지 마피아의 등쌀에 시달렸고, 부패와 지하경제로 유출되는 국부도 엄청났다. 차라리 무솔리니 시절이 나았다고 푸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전후 이탈리아 국가권력이 마피아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결정적 계기는 1984~87년의 ‘대재판(Maxiprocesso)’, 즉 의회의 ‘반 마피아법’에 근거해 젊은 법조인들이 벌인 대규모 마피아 소탕작전. 당시 주역이던 판ㆍ검사들은 전시나 다를 바 없는 보안과 경호 속에 그 작전을 이끌었고, 마피아의 보복 테러를 피하기 위해 교도소에서 숙식한 이들도 있었다. 그 선두에 선 게 시칠리 팔레르모의 치안검사 지오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 1939~1992)였다. 그는 86년 2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342명의 마피아 단원을 검거해 총 2,665년 형을 선고 받게 했다. 그는 92년 5월 23일 승용차 폭파 테러로 별세했다. 두 달 뒤 동료였던 파울로 보르셀리노(Paolo Borsellino, 1940~1992)도 같은 수법으로 살해 당했다. 둘의 죽음의 배후, 즉 부패권력의 방조 의혹은 아직도 남아 있다.
‘맥시재판’이라고도 불리는 대재판의 동력은 그들의 죽음으로 크게 줄었지만, 마피아를 ‘숙명’으로 여겨 체념하던 시민들의 의식이 달라졌다. ‘아디오피초(addiopizzo)’라는 대(對)마피아 시민저항운동이 대표적인 예다. ‘피초’(마피아 상납금)와의 ‘작별’(아디오)을 뜻하는 저 운동에 동참하는 상인들이 늘어났고, 정치권 부패ㆍ결탁에 대한 시민 감시활동도 활발해졌다. 마피아와의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그 양상은 팔코네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팔레르모 공항은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으로 개명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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