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바닥나는 연말 미지급 관행
병원 “고정지출 감당 어렵다” 호소
올해 부족금 7670억원 예상
예년 발생분의 2배 이상 규모
매년 추경 활용 부족금 타거나
이듬해 예산으로 돌려막기 반복
“의료급여 환자 기피 발생” 우려
“세금은 납부 기한보다 하루만 늦게 내도 예외 없이 가산세를 붙이면서, 줘야 할 돈을 두달씩 밀리고는 이자는커녕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없는 정부의 태도가 바로 갑질 아닌가요?”
경기도에서 200병상 규모의 정신과 병원을 운영하는 원장 A씨의 하소연이다. A씨는 매년 11, 12월이면 정부에서 줘야 할 의료급여 진료비 수억원이 입금되지 않아 약값, 의료기기 임대료, 인건비 등 고정 지출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11월에는 종합소득세 중간예납금(전년도 소득세의 절반가량을 미리 내는 것)도 내야 해 부담이 더 크다. A씨는 “몇 년 전에는 연말에 직원 월급을 못 준 일도 있다”고 전했다.
의료급여는 건강보험에 가입하기 어려운 형편의 저소득층과 국가유공자 등 150만여명에게 국가가 예산으로 의료비를 지원하는 제도다. 병원이 의료급여 환자를 먼저 진료한 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통해 정부에 진료비를 청구하는데, 평상시엔 보름 안에 진료비를 주지만 예산이 바닥을 드러내는 연말 무렵에는 진료비를 못 주고 이듬해 1월이나 2월 말에나 뒤늦게 진료비를 지급한다.
매년 반복되는 문제지만 보건당국은 예산 돌려막기를 하며 버틸 뿐 제도 개선에 소극적이다. 특히 올 연말에는 무려 7,600억여원의 미지급금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데도 최근 추가경정(추경) 예산 편성에서 의료급여 미지급금 지원 예산은 겨우 3.5%만 찔끔 반영되는 데 그쳤다. 이에 따라 올해 말 유례 없는 대규모 미지급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28일 보건복지부와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의료급여 진료비 예산은 7,673억원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올해 발생할 진료비 부족분 5,727억원(추정)과 지난해 발생한 전체 미지급금(3,334억원)을 해소하기 위해 올해 의료급여 예산에서 가져다 쓴 1,946억원을 더한 돈이다. 이는 최근 수년 간 100억~3,000여억원의 미지급금이 발생한 데 비해 훨씬 큰 규모다.
의료급여 연내 미지급은 2000년도 이후 거의 매년 빠짐없이 발생하고 있다. 정확한 추계가 어려워서라는 게 복지부 설명이지만, 다른 사업과 달리 예산이 남는 때는 없고 매년 부족하기만 한 탓에 의도적으로 과소 추계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사고 있다. 복지부의 한 외부 출신 인사는 “의료급여는 법에 명시된 의무지출이어서 이듬해 예산당국(기획재정부)에서 부족한 돈을 전액 받아낼 수 있는 구조”라며 “이 때문에 의무지출인 의료급여 예산을 적게 신청하고 대신 재량지출인 사업예산을 더 타내려고 이 같은 관행이 이어져 온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매년 본예산이 아닌 추경 예산을 활용해 부족금을 일부 타내거나, 미지급금을 발생시킨 뒤 이듬해 예산으로 지급하는 ‘돌려막기’식 편법 예산 운용이 이어진다. 지난 2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추경안 역시 의료급여 미지급금이 예상 부족액의 3.5%에 불과한 266억원만 편성됐다. 복지부는 예비비를 활용하겠다는 입장이나, 예산당국이 일반예비비(1조2,000억원)의 절반 이상을 특정 사업에 몰아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복지부는 올초 ▦지연 지급시 병원에 이자를 주거나 ▦건강보험 재정으로 진료비를 선지급한 뒤 이듬해 예산으로 건보 재정을 메우는 방안 ▦국채를 발행해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 등을 검토했으나 전부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채 손을 놓은 상태다.
미지급 피해는 궁극적으로 환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어 해결이 시급하다.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는 “의료급여 미지급은 병원들로 하여금 의료급여 환자를 기피하거나 소극적 진료만 하도록 만들 개연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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