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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넘어 술방… 19세 배우가 폭탄주 제조 연기

입력
2018.05.30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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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라디오 로맨스’ 주의 제재

술 광고 모델 연령 등 규제 느슨

‘인생술집’ 등 음주예능 인기

규제 사각 웹예능은 술 게임까지

19세 배우 김소현이 15세 이상 시청가인 KBS2 드라마 ‘라디오 로맨스’에서 폭탄주를 만들고 있다. 방송화면 캡처
19세 배우 김소현이 15세 이상 시청가인 KBS2 드라마 ‘라디오 로맨스’에서 폭탄주를 만들고 있다. 방송화면 캡처

‘악마의 속삭임, 유혹의 음료들’ ‘낯선 술잔에서 프로의 향기가 난다’ ‘남편보다 달콤한 한 잔’ ‘엄마만의 피로회복제’… 환락가 주점에서나 볼 수 있는 문구는 아니다. 케이블채널 예능프로그램들이 최근 음주 장면을 내보내면서 붙인 자막이다. 지난달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통심의위) 소위원회는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이 같은 자막을 사용한 Sky ENT 예능프로그램 ‘직진의 달인’에 권고를, MBC every1·MBC MUSIC 예능프로그램 ‘비디오스타’에 의견제시 제재를 내렸다. 두 프로그램은 청소년 시청보호 시간대에 방송됐고, 15세 이상 시청가였다. 청소년이 보기에 부적절한 내용이 담겼는데도 무신경한 듯 방송이 이뤄졌다.

자막을 통한 ‘음주예찬’은 그나마 약과다. 지난 1월 방송된 KBS2 ‘라디오 로맨스’에서는 거한 술판이 벌어졌다. 20대 라디오 작가 송그림(김소현)이 톱스타를 DJ로 영입하기 위해 마련된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를 제조하는 장면이 방송됐다. 맥주잔 6개가 일렬로 도열했고, 그 위로 양주잔이 놓였다. 등장인물들은 폭탄주를 환호하며 단숨에 들이켰다. 이 과정에서 주류 상표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배우 김소현은 올해 19세다. 주류를 구매할 수 없는 연소자(18세 미만)를 막 넘어선 나이라지만 성인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연령이다. 아역배우 출신으로 앳된 이미지가 아직 강한 김소현이 연기하기엔 적절치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라디오 로맨스’ 역시 15세 이상 시청가다. ‘라디오 로맨스’는 28일 방통심의위 소위원회에 주의 제재를 받았다.

방송만 보고 있으면 한국은 영락 없이 ‘술 권하는 사회’다. 음주 장면이 수시로 등장하고 특정 주류 상표까지 은근슬쩍 노출한다. 규제가 상대적으로 엄격하게 적용되는 기존 방송의 음주 묘사는 그래도 애교 수준이다. 웹예능·웹드라마 등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영상콘텐츠는 규제 사각지대다. 탈규제를 통해 창작 의욕을 부추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음주에 대한 불감증이 지나치다는 지적과 함께 규제 강화 목소리가 나온다.

2016년 12월부터 방송되고 있는 tvN 예능 ‘인생술집’. 음주를 조장한다는 논란도 일었으나 매회 화제를 낳으며 방송 중이다. 인생술집 페이스북 계정 캡처
2016년 12월부터 방송되고 있는 tvN 예능 ‘인생술집’. 음주를 조장한다는 논란도 일었으나 매회 화제를 낳으며 방송 중이다. 인생술집 페이스북 계정 캡처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까지… 모방학습 효과 불러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 ‘미디어 음주 장면 모니터링 현황’에 따르면 2016년 상반기부터 2017년 상반기까지 드라마에 회당 평균 1회 이상 음주 장면이 등장하고, 예능프로그램에선 회당 평균 0.98회 음주 관련 대사가 나온다. 음주 없이는 방송이 구성될 수 없는 셈이다.

방송 매체의 빈번한 음주 장면 노출은 음주문화에도 영향을 끼친다. 술을 권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게 되고, 많은 주량이 자랑거리로 인정된다. TV나 영화, 광고를 통해 음주 장면을 많이 접하는 사람일수록 술을 마실 가능성이 크다는 가설은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음주와 취중 행태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면 폭음은 물론이고 술로 인한 불법 행위 등에 관대한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음주 장면은 특히 청소년의 모방 심리를 자극하고 성인도 예외는 아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음주 장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따라 하고 싶은 ‘모방학습’ 효과를 일으킨다”며 “어릴수록 더 잘 발생하지만, 우울증 환자 등 심리적 약자인 성인도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폭음 장면을 보며 잘못된 음주 습관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방송 뿐 아니라 주류 광고에도 관대하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는 방송 주류 광고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미국, 영국은 주류광고에 25세 이하 모델을 기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20세 언저리 모델이 술 광고에 나선다. 피겨스케이팅 스타 김연아는 2012년 22세 때 맥주광고에, 유명 가수 아이유는 21세이던 2014년 소주 광고에 출연해 논란을 일으켰다. 24세 이하는 주류광고 출연을 금지하도록 하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이 발의됐다가 국회 본회의까지 가지 못하고 폐기됐다. 우리나라는 한국주류산업협회가 정한 자율규제로 19세 이상 모델이 출연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만 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음주로 인한 사회 갈등과 범죄가 많은데, 책임의식 없이 너무 쉽게 음주 관련 창작물을 제작한다”며 “(창작물로 인해) 술을 마시면 뭐든 게 해결될 것 같은 긍정적 프레임이 씌워진다”고 꼬집었다.

지난해 방송된 제작사 모모콘의 웹예능 ‘여기한잔’. ‘주량 소주 15병’이라는 자막으로 출연자의 주량을 과시하는 내용이 방송됐다. 방송화면 캡처
지난해 방송된 제작사 모모콘의 웹예능 ‘여기한잔’. ‘주량 소주 15병’이라는 자막으로 출연자의 주량을 과시하는 내용이 방송됐다. 방송화면 캡처

온라인판 ‘인생술집’, 규제 사각지대서 번창

TV는 방송법에 따라 규제의 영향이라도 받지만, 온라인은 사실상 무법지대다. 2016년 첫 방송된 tvN 예능프로그램 ‘인생술집’이 술을 매개로 유명 출연자들의 솔직한 대화를 이끌어내며 인기를 끌자 온라인에서는 ‘유사 상품’이 쏟아졌다. 온라인 콘텐츠는 통신상의 표현물로 분류되고, 방송법이 적용되지 않아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하다.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소재와 내용은 더 독하고 세졌다. 지난해 방송된 카카오M의 모바일 영상 제작소 크리스피 스튜디오의 웹예능콘텐츠 ‘취중젠담’은 일반인 커플들이 술게임을 벌이며 수위 높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담았다. 모바일 콘텐츠 기업 모모콘이 제작한 웹예능콘텐츠 ‘여기한잔’은 중년 남성 연예인들이 실제 술집을 방문해 시민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내용을 다뤘다. 출연자 소개에는 ‘연예계 소문난 주당’, ‘주량은 소주 15병’이라는 등 주량을 과시하는 자막이 붙었다. ‘인생술집’에서 뻗어 나온 tvN 제작 웹예능콘텐츠 ‘겜생술집’도 아이돌 가수, 모델 등이 출연해 술게임을 벌인다. 방통심의위의 한 관계자는 “먼저 웹예능·웹드라마도 공영성을 지닐 책임이 있는 방송이라는 사회적 공감이 형성돼야 한다”며 “사회적 인식이 있더라도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하는 부분이라 (해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유통경로와 형식, 내용이 다른 온라인 콘텐츠를 TV와 같은 규제에 따라 획일적으로 심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도 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매체별 다른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며 “규제를 하느냐 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일괄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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