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땅의 한국학자, 배형일 교수가 별세했습니다. 탁월한 학자였음에도 한국식 민족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그의 연구가 한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한 심재훈 단국대 교수가 고인에 대한 추모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고인이 생전에 행한 연구의 의미를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전문(全文)을 그대로 싣습니다.
국내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구미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한국에서 출간된 연구를 잘 읽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 반대의 경우가 더 크지 않을까 한다. 요즘 구미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한국어를 읽는 데 별 문제가 없다. 반면에 국내의 한국사 연구자들 중 영어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이들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미국 현지에서의 호평과 달리 한국에서 저평가된 대표적인 연구자가 바로 배형일(1958~2018) 교수가 아닐까 한다. 1990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산타바바라 캠퍼스에 부임해 한국학 분야의 큰 업적을 남긴 고인께서 지병으로 28일(현지시간) 오전 0시 25분 별세했다.
민족주의적 고대사 연구 비판으로 외면당한 학자
나는 1996년 1월 시카고대학에서 고인을 처음 만났다. 고인의 초빙 강연이었는데, 강연 제목은 ‘한국인 정체성의 식민지 기원(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Identity)’이었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배태된 강한 민족주의가 단일민족 위주의 한국 고대사를 과장되게 창출해 냈다는 게 그 강연의 골자로 기억한다. 좌중을 압도하는 당당한 발표와 솔직한 태도가 아주 인상적이었지만 아직 민족주의의 옷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던 나는 몇 가지 비판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고인의 연구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 그로부터 몇 년 후에는 지나친 민족주의적 한국사 연구의 문제점을 절감하게 되었다.
고인은 1981년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하버드대학에서 장광즈(K.C. Chang) 교수의 지도를 받아 ‘한국 선사시대에서 낙랑과 그 ‘상호영향권’(Lelang and the ‘Interaction Sphere’ in Korean Prehistory)’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학위논문을 수정 보완한 ‘‘한국’ 기원의 구성: 한국 국가 형성 이론에 있어서 고고학, 역사학, 민족 신화의 비판적 재검토(Constructing "Korean" Origins: A Critical Review of Archaeology, Historiography, and Racial Myth in Korean State-Formation Theoriesㆍ하버드대ㆍ2000년)’는 구미 학계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이 연구는 지난 세기 한국에서 진행된 민족주의적 고대사 연구의 문제점 및 그 원인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나름대로의 대안까지 제시한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고인이 강조한 두 가지 측면을 주목하고 싶다.
“청동단검 같은 고고학 자료로 민족을 입증 말라”
첫째, 한민족과 국가(고조선)의 형성을 오래 전 선사시대에서 찾으려는 국내 학자들이 문헌 기록보다는 고고학 자료를 결정적인 근거로 활용한 문제이다. 고인이 파악하기에 고조선은 기원전 1세기에야 문헌에 언급되어 나타나는데, 한국 학자들이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기원전 2,000년, 혹은 그 이상으로까지 추정하고 있는 고조선에는 분명히 커다란 괴리가 존재한다. 나아가 청동단검이나 지석묘 같은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문화를 통해 민족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현재 서구 고고학계의 일관된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낙랑군, 한반도ㆍ일본 초기 국가 성립에 영향”
둘째, 고조선이 아니라 삼국이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한반도 최초의 발전된 형태의 국가라는 믿음을 지닌 고인은 한반도에서 초기 국가형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사회 문화적 변동을 촉발한 낙랑군의 역할에 주목한다. 따라서 ‘문화변용(acculturation)’ 혹은 ‘문화접촉(cultural contact)’이라는 분석 틀로 한의 낙랑과 토착 세력 사이의 접촉과 변화의 조건, 과정, 결과 등을 구명하려고 시도하면서, 소위 ‘낙랑 상호 영향권(Lelang Interaction Sphere)’을 설정하여 한반도와 일본의 초기 국가 형성에 끼친 낙랑군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주로 고고학 자료를 활용하여 고조선을 멀게는 기원전 20세기, 늦어도 기원전 10~7세기에서 찾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낙랑에 대해서도 그 토착성을 강조하는 한국 학계의 관점에서는 너무나 파격적인 내용이다.
1996년 고인의 시카고대 강연 내용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내 자신을 생각해보면 고인의 저서에 대한 한국 학계의 무반응은 충분히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국내의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단언한다. 앞에서 언급한 영어 문제와 함께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에 대한 고인의 강한 비판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인에 따르면 국내 일각에서 식민사학자로 운위되는 이병도까지 포함한 모든 역사학자들이 민족주의 사학자였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지금 내가 고인의 주요 논지를 십분 수용하듯 점차 다른 연구자들도 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지금쯤 출간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앞으로 분명 재조명하는 후학들이 나오리라고 기대한다.
“한국의 유물, 일본이 문화재로 발견했다”
박사학위 논문과 첫 번째 저서 출간 이후 고인은 한국에서의 무반응 혹은 어느 정도는 감정 섞인 혹평을 접하고 상당히 당황했던 것 같다. 언젠가 그 때의 실망감 때문에 한국 고대사 분야를 떠났다고 얘기한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상황이 1998년 팀 탱걸리니(Tim Tangherlini)와 공동 편집한 ‘민족주의와 한국인 정체성의 구성(Nationalism and the Construction of Korean Identityㆍ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동아시아연구소ㆍ1998년)’의 출간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평을 담은 이 책은 구미의 한국사 연구자들로 하여금 식민지시대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데 기여했다. 식민지 근대성이 주요 주제로 다루어진 이 책 역시 한국에서 호평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주로 한국과 일본의 고대 유산 관리와 그 정치성을 검토하는 연구에 집중했는데 그 결실이 ‘한국과 일본의 유산 관리: 고대성과 정체성을 둘러싼 정치성(Heritage Management in Korea and Japan: The Politics of Antiquity and Identityㆍ워싱턴대ㆍ2013년)이다. 이 연구에서 고인은 자신의 장점을 살려 광범위한 자료를 활용했는데, 특히 19세기 말~20세기 초 우편엽서와 관광 안내서 등이 새롭게 빛을 보았다.
고인은 당시 일본 학자들의 일본 문명에 대한 대륙적 뿌리 찾기와 일본 여행객들의 “이국적” 경험 추구가 결합하여 한국인들의 한국 문화유산에 대한 근대적 비전 형성을 추동했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현행 한국 문화유산 관리 정책의 뿌리를 식민지시대까지 소급하여 오늘날 한국인들이 조상들의 창의성에 대한 증거로 자부심을 지니는 많은 건축물이나 유물이 일본인들에 의해 최초로 문화재로 발견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인을 불편하게 했던 연구자
고인이 추구했던 한국 고대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나 식민지 근대성, 한국 문화유산 관리의 식민지 기원 등은 연구자들까지 포함한 한국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주제이다. 한국에서의 저평가가 일면 이해되지만 그게 바로 고인의 강점일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경구를 일깨워주고 있으니 말이다.
두 권의 저서와 한 권의 편서, 많은 논문에 다 담지 못한 많은 연구들이 고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의 이른 죽음은 구미나 국내 한국학 연구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고인을 사랑했던 가족과 동료, 친구 모두에게 그가 남긴 연구뿐만 아니라 밝은 미소와 유머까지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나는 고인의 첫 저서 ‘한국 기원의 구성’에 대한 서평을 2001년 ‘역사학보’ 172집에 게재한 이후 친분을 유지해왔다. 나에게 고인은 당돌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당당하고 열정적인 연구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수년 전 한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상당히 부드러워진 모습이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 연륜이 쌓여서 그랬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이미 건강에 적신호가 오지 않았을까 싶다. 부드러워진 고인이 생경하면서도 오히려 누나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가끔씩 내 페이스북에 들어와 좋은 댓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 마지막이 지난달 16일 포스팅한 내용의 댓글로, 내 딸이 미국서 선물로 가져온 트레이더 조스(Trader Joe’s)의 피스타치오가 최선의 선택이라는 칭찬이었다. 어쩜 기호가 자신과 같을 수 있냐는 반가움과 함께.
나는 인생의 가장 고귀한 일로 새로운 안식이 시작되는 죽음을 꼽고 싶다. 그 동안 열심히 일한 만큼 이제 마음껏 즐기며 안식할 자격이 충분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렇게 불러본다. “형일 누님 잘 가세요.”
심재훈 단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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