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대신 무조건 따르라는 압박 어법
종교적 신념체계와 닮아가는 대중의식
독선과 떼거리문화 결합은 늘 경계해야
어릴 적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염불을 자주 따라 읊었다. ‘이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께서 천이백오십 비구들과 더불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셨다···(如是我聞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與大比丘僧千二百五十人俱···,여시아문일시불재사위국기수급고원여대비구승천이백오십인구···)’로 시작되는 ‘아미타경’이 대표적이다. 그저 “이리 들었다”는 말인 듯하지만, 실은 “딴소리 말고 가르침에 따르라”는 고압적 주문이다. 지식보다 믿음, 합리적 설명보다 강요적 설득에 기운 어법이다. 불경을 철학서가 아닌 경전, 불교를 지혜의 가르침이 아닌 종교로 여기게 된 까닭이다.
불경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전이 비슷한 어법을 쓴다. ‘예수 가라사대’ ‘공자 가라사대’를 던질 뿐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어법이야말로 인간 정신활동을 신념과 지식으로 갈라온 높고 두꺼운 벽이다. 아득한 옛날 얘기에 그치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이 눈앞이라는 지금도 그렇다.
인간의 지식과 판단이 합리적 이성의 작용에 따른 것이라는 르네상스적 인식이 깨어진 지는 오래다. 행동과학(심리학)이나 뇌ㆍ신경과학의 발달로 새로운 발견이 잇따르면서 인간 인식과 판단의 불합리성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긴 호흡으로 코끼리의 온몸을 더듬은 결과를 종합하기보다 한 두 군데 더듬고는 곧바로 어림짐작으로 흐르는 ‘휴리스틱’이나 과소한 주관적 경험에만 근거한 고정관념이 위세를 떨친다. 진화과정에서 유전자에 각인된 탓이든, 문화의 산물이든 현재의 인간과 사회의 모습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비이성적이다.
이런 오류의 이유로 흔히 두 가지가 거론된다. 첫째는 누구에게나 그릇된 방식으로 증거를 찾고 판단하는 성향이 있고, 둘째는 이런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 본연의 성향을 상쇄할 비판적 사고 능력과 올바른 판단 기술을 배우지 못한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통계보다는 이야기에 감동하고, 어떻게든 서둘러 확인하고 싶어 하고, 운과 우연의 일치를 엉뚱하게 이해하고,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하려 하고, 잘못된 기억에 의존하려 하기 때문(토마스 키다 ‘생각의 오류’)이다.
현실의 세계가 그럴진대 상상과 해석에 크게 의존하는 문학과 역사야 말할 것도 없다. 한때 수많은 사실 가운데 선택된 사실을 엄밀한 객관적 사실과 동일시하는 역사관이 떠돌았지만, 오래 전에 “역사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 수용된 판단의 연속”이고 “사실은 자루 같아서 그 속에 무언가 집어넣어 주기 전에는 절대로 세울 수 없다“(E.H. 카 ‘역사란 무엇인가’)는 견해에 떠밀렸다. 그런 판단, 자루 속에 집어넣을 내용물의 선택이 다름 아닌 사관(史觀)이고,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편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수없이 엎치락뒤치락해 온 ‘역사 바로 세우기’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비록 관념으로라도 이런 편향에서 벗어나려면, 칸트의 ‘판단중지’나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 정도로 흐르게 마련이다. 언론 현실에서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느긋하게 판단하거나 좌우 양쪽과 적당한 거리를 둔 회색지대에 머물 수 있을 뿐인데, 그 회색지대조차 날로 좁아지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삶의 조건이 달라져도, 개인의 주관적 확인을 결여한 역사ㆍ사회 발전은 있을 수 없음을 어렴풋이 알아챈 뒤로는 ‘판단하고 편드는 일’이 자꾸만 불편해졌다. 인터넷포털과 SNS에 넘치는 의견 상당수가 대중조작의 결과일 수 있음이 분명해진 마당에도, 사실상 ‘의사 조종’을 받는 로봇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생각까지 배려해야 하는 현실도 답답하다. 과거 독재정권의 대중조작이 얼마나 청춘의 염증을 불러 일으켰던가.
남북ㆍ북미 대화에 쏠린 섣부른 열광과 환호도 걱정스럽다. 결과가 어떻든, 일방주의나 독선을 떼거리 문화와 결합시킬 게 너무 뻔해서다. 세태가 이런데도 ‘장자(莊子)’에 나오듯, “그건 덕을 속이는 것(是欺德也ㆍ시기덕야)”이라고 일갈할 선지식(善知識)도 날로 드무니, 이를 어쩔꼬?
논설고문 innerflood@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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