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담 늘어놓은 간디 자서전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에 공감
소설 ‘쇼코의 미소’ 최은영의 광팬
선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좋아
소크라테스 ‘변명’도 다시 읽을 것
인터뷰를 마치고 초밥을 먹자는 그에게 그럼요 선생님 초밥 백 개 사드릴게요, 했다. 꼬박 두 시간 가까이 나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꼬박 두 시간 가까이 나는 그의 학생이 되어보는 체험 공부의 현장을 경험했다. 내가 날것으로 비린 말의 소유자라면 그는 익힌 것으로 간이 밴 말의 소유자였다. 씹기에도 좋고 삼키기에도 좋고 소화에도 좋고 포만감에도 좋은 다분히 건강한 그의 말.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의 책 속 문장을 고스란히 빼어 닮은 투였다. 좋은 글이라면 널리 잘 읽히게 만들수록 더 좋은 거잖아요. 그날 저녁 그는 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친구 신청에 응해주었다. 몇 날 며칠 훔쳐보며 나는 그가 올려놓은 책을 족족 구입했다. 읽고 있다.
김민정(민정)=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꽤 많이 팔렸지요? 프로필 사진 보고 이분 참 선량한 백성이겠다, 나름 추측하고 그랬어요.”
김승섭(승섭)= “아이고 그건 아니고요(웃음), 책은 10쇄 찍었어요. 학교 다닐 때 서점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책을 낸 것 자체가 일단은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힘들었어요. 글 속에 들어가서 글을 쓰는 스타일이거든요. 아픈 얘기 속으로 다시금 들어가려니 버겁더라고요. 안팎으로 얻은 것도 많았어요. 특히 출판사와는 여러모로 합이 잘 맞았어요.”
민정= “사회역학자로 첫 책이셨잖아요. 사회역학은 어떤 학문이라 요약할 수 있을까요.”
승섭= “데이터를 통해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서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주는 일이죠. 제 책이 소방공무원, 세월호 생존 학생, 성소수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등등을 만나고 그들의 건강에 관해 연구한 기록을 담아낸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요즘 뭐가 많이 밀려오고 있어요(웃음). 저는 순발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의 가장 큰 장점은 축적하는 능력이에요. 1년짜리 싸움은 못 이기는데 20~30년짜리 싸움하면 되게 잘해요. 그렇게 해서 이기는 스타일이에요.”
민정= “목차를 보면 외면하고플 만큼 아픈 문제투성이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이 연구를 해준다니까 또 막 안도가 되는 거예요.”
승섭= “저는 독자들이 상처받는 게 싫었어요. 제 글이 너무 아프지 않았으면 했어요. 제가 서 있는 전선들이 어쩔 수 없이 예민하고 아픈 면면일 수밖에 없잖아요. 어쩌다 내가 이런 걸 경험해봤는데 이렇게 생각할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우리 각자 위치에서 힘닿는 만큼씩만 이런 부분에 이런 걸 하면 좋겠다, 설사 그게 안 되어도 우리 죄책감을 가지지는 말자, 제가 하고픈 말은 그거였어요.”
민정= “매번 상처 입어 아픈 사람들을 마주해야 하는 삶 속에 놓여 있잖아요.”
승섭= “결국 ‘태도’의 문제인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나도 서두르지 않으려고 해요. 남의 고통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데 묵묵히 들을 수만도 없어요. 그러기에 시간이 항상 없거든요. 그래서 이 연구를 왜 하려고 하는지 아주 솔직히 얘기해요. 그게 어설프면 안 돼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보면 양동근이 ‘다른 사람 위해 살지 말라’고 하거든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이유로 이 싸움에 들어가 있는 거지, 하고 항상 정리하려고 애를 써요. 상대방이 아니라 나한테 맞추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민정= “그나저나 서점에서 알바를 한 의대생이라… 분명 흔치는 않아 보여요.”
승섭= “연세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오늘의 책’에서 오며 가며 일했어요. 동아리방처럼 매일 드나들던 곳이었어요. 그냥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이 좋았어요. 책을 보는 시야가 그때 많이 넓어진 건 분명하죠. 하루는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두 권짜리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할인해서 파네 마네 그러는 거예요. 서점이 망해갈 즈음이었는데 그때 그걸 누가 가져갈 것이냐, 서로 눈치를 보다 제가 서점 문 열자마자 가져온 기억이 나요. 20년 됐는데 아직도 안 읽었어요. 말하자면 그런 식의 ‘탐’이 책에 있었다는 거죠. 임지헌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가 화제 속에 팔렸던 것 같고 박노해의 책들은 두루 잘 나갔던 시절이었어요.”
민정= “어릴 적부터 책 엄청 읽어버릇하셨구나!”
승섭= “중2 때 어머니가 한국문학전집을 사놓으셨어요. 왜 소설에서 가끔 야한 장면이 나오기도 하잖아요. 손이 까맣게 되도록 그거 찾아 읽기도 하면서 책 읽는 재미를 알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소설 읽는 거 좋아해요. 오정희의 ‘새’,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한강의 ‘소년이 온다’ 등 여성 작가들 소설 읽는 세미나도 하고 그랬어요. 어느 날 보니까 제 감성이 너무 고갈되어 있는 거예요. 감정적 에너지가 바닥나서 고통을 바라보는 언어들이 너무 딱딱해져 있는 거예요. 순전히 제 필요에 의해서였어요.”
민정= “소설의 필요라… 뭐든 혼자 알아서 하는 스타일인 걸 보니 맏이 같아요.”
승섭= “맞아요, 앞에 누가 있어서 인도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논어’나 ‘불경’을 즐겨 읽었어요. 세속에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출가할까? 그런 고민도 그때 했었고요. 저는 사춘기를 계속 유예시키면서 살았거든요. 막 이렇게 참았어요. 그러다 대학 가서는 지금이다, 내가 지금 마음껏 방황하지 않으면 평생 사춘기가 없이 그냥 지나가는 거다, 하고 해제시켰지요.”
민정= “스스로 사춘기를 유예시켰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듣습니다만.”
승섭= “수업 빼먹거나 시험 안 치르고 부산으로 여행 다녀오거나 뭐 그런 정도의 일탈이었어요. 대신 내가 하고픈 공부를 많이 찾아 다녔어요. 사설 아카데미 같은 게 잘 되어 있을 때거든요. 칸트의 ‘판단력 비판’, 플라톤의 ‘국가’, 라깡과 하이데거도 그때 다 공부했고요, 연세대 비교문학 대학원생들과 프로이트 전집을 함께 읽기도 했고요. 역사, 미술사, 시를 포함한 문학 등등도 닥치는 대로 읽고 쓰고 그랬어요. 아마도 그 즈음부터 글쓰기가 저한테 왔던 것 같아요. 통일성이 있지는 않죠. 다만 지식보다는 이 모든 데서 얻고 싶어 하는 어떤 ‘감정’이 저에게 있는 거예요. ‘애틋함’ 같은 걸 얻을 수 있는 길을 많이 확보하려고 애쓴 거예요. 저요, 슬픈 한국 발라드 많이 들어요. 가라 앉아야 일을 하거든요. 저는 그게 무지 중요한 사람이에요.”
민정= “5월에 나온 신간 ‘오롯한 당신’은 지도 학생들과 공동저작으로 펴내신 거잖아요. 학생들에게 교수님은 어떤 스승인 것 같으신지요.”
승섭=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엄한 선생이에요. 대학원 지도의 핵심은 글쓰기잖아요. 같이 고쳐요. 왜 이렇게 썼는지 고치게 만들어요. 논문을 다 쓰면 소리 내어 읽게 해요. 학생들과 글 놓고 자주 싸워요. 되게 처참하게 싸워요. 저는 이 친구들이 10년 뒤 한국에서 이 분야를 이끌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그러려면 지도교수와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를 대하는 태도가 세상 밖의 권위를 대하는 태도가 될 것 아니에요. 그래, 나한테 이렇게 하면 밖에 나가서도 안 밀리겠지. 좋은 선생이 아니라 꿈이 커서 그래요. 자신 있게 얘기하는데 이 친구들이 제 가장 큰 성과가 될 거예요.”
민정= “무지 바쁜 스케줄 속에 사시잖아요. 와중에 어떤 책을 읽고 계시나요?”
승섭= “저는 책 한 권을 대번에 관통해내는 힘이 없는 사람이라 한 번 읽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요. 저 최은영 작가의 광팬이에요. ‘쇼코의 미소’, 짝짝짝!!! 선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랄까, 비교할 수 없겠지만 글 쓰는 유전자가 저랑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힘냈으면 좋겠어요. 혹시 만나시거든 제가 응원한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참, 소크라테스의 ‘변명’도 곧 다시 읽을 거예요.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님이 그 책을 20대에 읽고 30대에 읽고 40대에 읽으면 다 다르다고 하셔서 계속 실천해오고 있거든요. 저 마흔이라서요.”
민정= “특별히 아끼거나 선호하는 책의 장르랄까요, 물론 잡식성의 독서를 하실 거라 짐작은 하지만요.”
승섭= “자서전을 좋아해요. 특히 간디 자서전이요. 훌륭한 사람들이 쓴 자서전은 사고의 결이 달라요. 문장의 결이 달라요. 간디 자서전 제목이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잖아요. 간디는 자기의 실패담을 계속 늘어놔요. 어떻게 실패하고 어떻게 착오가 있었는지 어이없는 실패들을 아주 정직하게 얘기해요. 바로 그 지점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신화는 없다’ 같은 책과의 차이겠죠. 그리고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요. 연애하던 시절 아내에게 처음 선물한 책인데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최선을 다해 죽고 싶다”는 니어링의 말을 화두처럼 삼고 있어요.”
민정= “머잖아 책이 한 권이 더 나올 거라면서요.”
승섭= “’공중보건의 역사’라는 수업을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녹취한 뒤 정리하고 있어요. 재밌어요. 아내도 그 책이 가장 좋을 거라고 하고요. 글 쓸 때 저는 아내에게 얘기 많이 해봐요. 내 아내를 설득할 수 있는 지점에서 논리의 전선을 치고 거기서 안 물러나려는 거죠. 학자가 전선을 쳤는데 밀리면 싸움에서 지는 거잖아요.”
민정=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며 제가 할 수 있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저 이 부분에 밑줄 쫙 그었잖아요.”
승섭= “몇 번을 태어나도 제 삶에 이런 조건이 내게 올 것 같지는 않아요. 아내와 세 딸들과 그래서 이번 생을 잘 살고 싶어요. 제가 아는 사랑의 정의는 노력하는 거예요.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박상원이 한 대사에요.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잘 사라지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말하자면 저 같아요.”
김민정 시인∙난다출판사 대표
※ 한국일보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2018 책의 해’를 맞아 ‘책의 해’ 조직위원회와 함께 ‘무슨 책 읽어?’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김민정 시인이 각계 명사들을 만나 책에 대해 나눈 대화를 매주 금요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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