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ㆍ재계 고민 헤아린 판결” 자평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이른바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 의혹을 낳고 있는 주요 사건들이 공개되면서 사법부가 전례 없는 후폭풍을 겪고 있다. 사건 당사자들은 최종 판결까지 난 사건의 재판을 다시 열 것을 요구하는 등 강력 반발하면서 대법원의 해법이 주목되는 상황이다. ‘재판 거래’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은 모두 15개로, 판결 대부분은 1,2심 결론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이 가운데 일부 사건들은 청와대와의 교감 내지 청와대 의중을 따른 것으로 보이는 법원행정처 기록이 발견돼 논란이 증폭됐다. ‘대외비’라 적힌 ‘현안 관련 말씀자료’ 일부에 별지로 첨부된 대법원 판결 사건 목록은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독대를 앞두고 2015년 7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이 작성했으며 “사법부는 그 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과거사정립 ▦자유민주주의 수호 ▦국가경제발전 ▦노동개혁 ▦교육개혁 등 박근혜 정부의 핵심 현안에 사법부가 기여한 사례로 이 사건과 관련한 대법원 판결이 제시돼 있다. 2011년 9월 양 전 대법원장이 취임한 뒤 이듬해 2월부터 문건 작성 시점 직전인 2015년 6월까지 대법원이 선고한 판결들이다.
1,2심 판결 뒤집고 고용관계 부정
비관한 해고 승무원 목숨 끊기도
▦KTX 승무원 해고 무효소송
2008년 11월 KTX 해고 승무원 34명은 법원에 “코레일이 정규직 전환을 약속해 놓고 2년 만에 편법으로 해고했다”며 ‘근로자 지위보전 및 임금지급’ 소장을 냈다. 2010년 8월에 나온 1심은 승무원의 완승이었다. 법원은 위장도급을 인정하고 해고된 승무원들을 코레일 직원이라고 판결했다. 또 코레일이 승무원 별로 그 동안 지급하지 않은 30개월치 임금을 주고, 복직 때까지 월급 150만~180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이듬해 열린 2심 선고도 결과는 같았다.
하지만 대법원 1부(주심 고영환)는 2015년 2월 원심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KTX 승무원과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 업무가 구분돼 있고, 홍익회 등이 독립적으로 승객 서비스업을 경영하면서 승무원을 직접 채용하고 인사권까지 행사해왔다”고 밝혔다. 코레일과 KTX 승무원 사이 직접 근로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1·2심 승소 후 밀린 급여를 지급받았던 승무원들은 이자를 포함해 1억원 넘는 돈을 한꺼번에 뱉어내야 했고, 이를 비관한 한 해고 승무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사측에 유리한 판결, GM에도 적용
반대 대법관 “너무 낯선 논리” 반발
▦갑을오토텍 통상임금 소송
2013년 재계 최대 화두는 통상임금 관련 소송이었다. 노동자 주장대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킬 경우 기업이 추가 임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5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제너럴모터스(GM) 회장을 만나 “통상임금 문제를 꼭 풀어나가겠다”고 답해 논란이 일었다. 당시 GM은 노동자들이 낸 통상임금 소송 1·2심에서 잇따라 패소한 뒤여서 대법원 판결에 개입하는 발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석달 후 대법원은 갑을오토텍 노동자 294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같은 해 12월 대법원은 노동자들이 승소한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한 노사 합의가 무효라면서도, 기업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면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고 했다. 이상훈·이인복·김신 대법관은 반대의견에서 “다수의견의 논리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당혹감마저 들고 논리에서 합리성을 찾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특조단에 따르면 대법원 선고 하루 뒤 작성된 ‘통상임금 판결 선고 후 각계 동향 파악’이란 제목의 행정처 문건에는 “(청와대가) 대법원이 정부와 재계의 고민을 잘 헤아리고 이를 십분 고려하여 준 것으로 받아들임”이라 적혀 있었다. 2014년 5월 GM의 통상임금 사건도 갑을오토텍 사건과 마찬가지로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됐다.
고용부 재항고 인용, 법외노조 환원
“대법원ㆍ靑 양측 모두에 이득” 언급
▦전교조 법외노조
고용노동부는 2013년 10월 해직교사 9명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합법적 노조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전교조에 ‘법외노조’ 통보를 했다. 2014년 6월 1심 법원은 고용노동부 손을 들어줘 원고 패소 판결을 했지만, 같은 해 9월 2심은 전교조 측 주장을 받아들여 처분 효력을 정지시켰다. 이에 노동부가 재항고를 하자 행정처 기획심의관은 임종헌 기조실장 지시로 같은 12월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문건을 작성한다. 이 문서에는 “재항고가 기각될 경우 대법원의 상고법원 입법 추진 등에 대한 견제, 방해가 있을 것이고, 재항고 인용은 양측(대법원ㆍ청와대)에 모두 이득이 될 것”이라는 문장이 있다.
2015년 6월 대법원은 재항고를 인용하는 결정을 내린다. 다시 1심 판결처럼 전교조를 법외노조 상태로 되돌려놓은 것이다. 대법원은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판단한 근거가 된 교원노조법 조항을 헌법재판소가 합헌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필요한 심리 다 안 해” 원심 파기
“국가안보 위협 행위에 제동” 평가
▦’빨치산 추모제’ 참가 교사
전북의 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김형근씨는 2005년 5월 학생·학부모 180여 명과 ‘남녘통일 애국열사 추모제’ 전야제에 참석했다. 학생들과 6·15 공동선언을 외우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노래를 부른 그에게 한 언론사는 1년 6개월 후 ‘빨치산 추모제에 학생 데려간 전교조 교사’라고 보도했다. 이 추모제가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남한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빨치산 무장 투쟁을 미화하는 행사였다는 것이다.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김씨를 기소됐으나 2010년 2월 1심 재판부는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고 구호를 외친 행위는 자유민주주의 전통성을 해칠 만한 실질적 해악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9월 2심도 같은 결론을 유지했다.
하지만 2013년 3월 대법원 2부(주심 김용덕)는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전주지법에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행위는 반국가단체의 활동에 호응 가세한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한 것”이라며 “원심은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같은 해 9월 열린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다.
법원행정처는 대통령에게 보고된 ‘말씀자료’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체제도전 행위에 제동을 걸었다”고 자평했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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