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겨를] 캬~ 옛술, 예술

입력
2018.06.06 04:00
14면
0 0

우리 쌀ㆍ물ㆍ누룩을 재료로

108일 이상 기다림 거쳐 발효

도자기 굽듯 나만의 작품 빚어

맛 중시로 음주문화 바뀌면서

젊은층도 증류주 깊은 맛에 눈떠

"풍성한 뒷맛, 입안에 맴돌아요"

김택상(가운데) 삼해소주 명인과 제자인 김현종(오른쪽) 삼해소주가 대표가 1일 서울 종로구 삼해소주가 공방에서 소주를 빚는 첫 단계인 밑술을 만들고 있다. 김 명인은 “밑술은 쌀과 누룩, 물로만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보다 술 빚는 이의 마음가짐”이라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김택상(가운데) 삼해소주 명인과 제자인 김현종(오른쪽) 삼해소주가 대표가 1일 서울 종로구 삼해소주가 공방에서 소주를 빚는 첫 단계인 밑술을 만들고 있다. 김 명인은 “밑술은 쌀과 누룩, 물로만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보다 술 빚는 이의 마음가짐”이라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고려 후기 문인 이규보는 애주가였다. 그의 작품 ‘국선생전(麴先生傳)’은 누룩(국ㆍ麴)을 의인화해 쓴 것이다.

이규보는 ‘나는 또 특별히 시 한 수를 지어 삼해주를 가져다 준 데 사례하다(予亦別作一首謝携三亥酒來貺)’라는 시를 남겼다. 당대 최고 문인이 시를 지어 답례할 정도의 술이 삼해주였던 셈이다.

고전에서나 볼 수 있는 술 같지만 삼해주는 지금도 시대와 함께 숨 쉬고 있는 술이다. 동네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만 수고를 기울이면 어렵지 않게 삼해소주를 맛볼 수 있고 직접 빚는 법도 배울 수 있다. 맥주와 막걸리에만 ‘수제’가 있는 게 아니다. 소주에 굳이 수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건 대부분의 전통식 증류 소주가 장인의 손맛으로 만들어지고 있어서다.

1,000년 이상 민족 고유의 유산으로 이어져 오던 증류식 소주는 근ㆍ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명맥이 끊어질 뻔했으나 최근 다시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오른 문배주는 평양에서 유래한 전통 증류식 소주다. 서울을 대표하는 삼해소주 외에 안동의 안동소주, 전주의 이강주 등 지역마다 다양한 전통 증류주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간 갖은 규제로 전통주 산업 성장을 봉쇄하던 정부도 올 4월 우리 전통주를 키우겠다며 ‘술 산업 진흥원(가칭)’ 설립 추진 계획까지 밝혔으니 수제맥주에 이어 수제소주가 뜰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전통 소주, 지금 가장 ‘힙’한 술

전통주를 찾는 이들은 누굴까. 나이 지긋한 남성을 떠올리는 건 편견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해 전통주의 소비 트렌드를 분석한 결과, 30~40대의 구매비중이 50-60대보다 높았고 20~30대에선 여성이 남성을 앞질렀다.

이런 흐름은 삼해주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삼해소주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1일 찾은 서울 창덕궁 인근의 삼해소주가 사무실 겸 공방에는 20~30대 청년 세 명이 자신만의 소주를 빚고 있었다. 김현종 삼해소주가 대표는 “소주를 배우러 오는 이들 중에 젊은이와 여성이 적지 않고 외국인들도 알음알음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들을 가르치는 이는 김택상 명인이다.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8호 삼해소주 보유자인 이동복 여사의 아들이다. 그는 2016년 농식품부가 선정하는 전통식품명인 제69호로 지정됐다. 서울시 최초의 전통식품명인이기도 하다. 김 명인은 한국 대표 명주의 맥을 끊을 수 없다는 생각에 대기업을 그만두고 6형제 중 유일하게 기술을 전승 받아 40년 가까이 삼해소주를 빚고 있다.

이날 공방에서는 소주를 빚는 첫 단계인 밑술 제조가 한창이었다. 김 명인은 “밑술은 술의 어미라는 뜻으로 주모라고도 불린다”며 “술을 잘 익게 해주는 촉진제”라고 설명했다. 삼해주는 밀로 만든 누룩 외에는 오로지 쌀로만 빚는다. 밑술의 재료도 쌀, 물, 누룩이 전부다. 쌀을 불려 곱게 가루를 낸 뒤 뜨거운 물에 반죽을 해 식힌 다음 누룩을 섞어 다시 반죽해서 항아리에 모셔 놓으면 밑술이 된다. 김 명인은 “꿀처럼 끊어지지 않고 떨어질 때까지 반죽을 해야 한다”며 “쌀가루와 누룩에 손의 온도가 더해져 발효가 촉진된다”고 설명했다.

김 명인과 함께 밑술을 만들던 정우연(37)씨의 손놀림이 심상치 않다. 수입맥주 회사에 근무하는 그는 햇수로 3년째 전통주를 배우고 있다. “장차 해외로 이주해 살 계획이 있는데 거기에서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 우리 전통주를 배워 나만의 기술을 갖는 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쌀과 누룩으로 술을 만들 때는 ‘빚다’라는 표현을 쓴다. 도자기를 빚듯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뜻이다. 잘 빚은 술이 예술 작품 못지 않다는 것은 옛 문인들도 말해주고 있다.

108일 이상 기다려야 하는 시간의 열매

명인의 손재주 외에 좋은 술의 원료는 시간이다. 삼해주라는 이름도 첫술을 만든 지 108일이 지나야 첫 완성품이 나오는 양조 방법에서 땄다. 삼해주는 세 번의 돼지날(亥日ㆍ해일)을 거쳐야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매년 음력 정월 첫 돼지날(亥日ㆍ해일) 해시에 첫술을 담근 뒤 36일 후인 2월 돼지일에 덧술(첫술에 곡물ㆍ물ㆍ누룩을 혼합한 것을 한 번 더 넣어 담그는 것)을 하고, 또 36일 후인 3월 돼지일에 덧술을 한 다음 다시 36일을 기다렸다가 4월 돼지일에 항아리를 열면 삼해주를 맛볼 수 있다. 삼해주 가운데 위에 뜨는 맑은 술인 약주(청주)만 따로 떠서 증류한 것이 삼해소주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이렇게 1년에 단 한 번 연초에 만들었다고 한다.

한창 추울 때인 정월에 삼해주를 빚기 시작하는 것은 발효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다. 통상 탁주인 막걸리를 섭씨 22도 안팎에서 발효시키는 것에 비하면 매우 낮은 온도다. 김 명인은 “높은 온도에서 발효가 이뤄지면 맛과 향이 거칠어지기 때문에 복합적이고 깊은 맛을 내기 위해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발효시킨다”고 말했다.

발효 기간이 짧은 대신 숙성 기간이 긴 위스키와는 반대다. 우리 술도 증류한 뒤 오래 숙성하면 더 깊은 맛을 내지만 대부분 업체가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소량 생산하는 여건 상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삼해주는 짧게는 세 달, 길게는 거의 반년 가까이 숙성한 뒤 증류한다”며 “숙성 과정에서 독특한 향과 맛이 생기는 위스키와 달리 우리 술은 발효 과정에서 깊은 맛이 만들어져 증류 후 바로 마셔도 맛이 좋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정성을 들여서일까. 처음 맛 본 삼해소주는 알코올 도수 45도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웠다. 잘 익은 쌀밥의 달콤함이 혀끝에 닿고 난 뒤 복잡ㆍ미묘한 맛이 순식간에 입안을 가득 채운 다음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시중의 희석식 소주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풍성한 뒷맛이 술을 삼킨 한참 뒤에도 입 속을 맴돌았다.

전자부품 수출 관련 일을 하던 김현종 대표도 이 맛에 빠져 김 명인에게서 소주 빚는 법을 배우다 삼해소주가의 사업을 맡게 됐다. “처음 마시고 깜짝 놀랐죠. 수출 업무로 세계를 다니며 많은 술을 마셔봤지만 이렇게 풍부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술은 찾아보기 어렵거든요. 쌀밥이 술의 기본 베이스여서 더 친근하지 않나 싶어요.”

음주 문화가 점점 맛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젊은 층도 전통 증류주의 깊은 맛에 눈을 뜨고 있다. 이날 공방을 찾은 대학생 김영훈(27)씨와 프리랜서 번역가 곽지수(28)씨가 그런 예다. 석 달 전 곽씨를 따라 시음하러 왔다가 수업 신청을 하게 됐다는 김씨는 “취하기보다 좋은 술을 조금씩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술을 직접 담그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택상 삼해소주 명인과 제자들이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삼해소주가 공방에서 술 익는 항아리를 앞에 두고 소주의 기본 재료가 되는 밑술과 누룩을 들어 보이고 있다.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영훈씨, 김현종 삼해소주가 대표, 김택상 명인, 곽지수, 정우연씨. 삼해소주가는 공식 홈페이지가 없으며 양조 아카데미 신청이나 시음행사 참여, 제품 구매 관련 문의는 종로구 사무실 방문이나 전화(070-8202-9165)를 이용하면 된다. 신상순 선임기자
김택상 삼해소주 명인과 제자들이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삼해소주가 공방에서 술 익는 항아리를 앞에 두고 소주의 기본 재료가 되는 밑술과 누룩을 들어 보이고 있다.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영훈씨, 김현종 삼해소주가 대표, 김택상 명인, 곽지수, 정우연씨. 삼해소주가는 공식 홈페이지가 없으며 양조 아카데미 신청이나 시음행사 참여, 제품 구매 관련 문의는 종로구 사무실 방문이나 전화(070-8202-9165)를 이용하면 된다. 신상순 선임기자

천천히 만드는 귀한 술, 마실 때도 조금씩 천천히

녹색 병에 담겨 판매되는 시중의 희석식 소주는 증류식 소주와는 만드는 법이 전혀 다르다. 희석식 소주는 일제에서 군부독재로 이어지는 억압의 역사가 낳은 결과물이다. 수입 저가 곡류를 발효한 뒤 연속식 증류기로 알코올 95% 이상의 주정을 만든 다음 물로 희석하고 감미료와 향신료 등을 첨가한 것이 희석식 소주다. 곡물의 특성이 완전히 사라진 에틸알코올에 물을 탄 녹색병 소주와 달리 증류식 소주에는 원료의 고유한 맛과 향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김택상 명인은 “우리 땅에서 지은 곡식으로 빚은 술은 술이기 전에 음식”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술을 빚을 때 재료보다 중요한 것이 빚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며 “예전엔 밑술을 만들 때나 덧술을 할 땐 늘 목욕재개를 했고 물을 준비할 때도 새벽에 샘에 가서 가장 맑은 물을 떠서 술을 담갔다”고 했다. 이러니 술을 마시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김 명인은 “삼해소주 같은 술은 한 자리에서 취할 때까지 많이 마시는 술이 아니다”면서 “함께 먹는 음식도 짜고 매운 자극적인 것보다 담백한 것이 잘 맞는다”고 말했다.

군부 독재 시절 정부가 양곡 관리를 명분으로 전통주 제조를 금지하고 희석식 소주 산업을 육성하면서 전국 각지의 많은 양조장들이 자취를 감췄고 극히 일부만이 살아남았다. 살아 남은 곳도 대부분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삼해소주가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이 회사 임직원은 김 명인과 김 대표를 포함해 단 세 명뿐이다. 전통적인 가내수공업 방식을 고집하다 보니 삼해소주가가 한 달에 내놓을 수 있는 수량도 한 달에 300병 정도다. 기업식 대량 생산법을 쓸 수도 있지만 고유의 맛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앞으로도 기존 방식을 고집할 것이라 한다. 김 명인은 “대량 생산을 하게 되면 전통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본다”며 “귀한 술로 대접 받고 싶다”고 말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