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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대심판정이 교회와 흡사한 까닭은

입력
2018.06.09 10: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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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앉은 헌재 소장 뒤 휘장

목사 설교하는 교회 십자가 연상

하늘과 연결 ‘10개의 빛의 계단’

재판관 눈높이에 둬 경각심 갖게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세력 없어도 똑같이 말할 기회를”

모세는 재판관들에게 공정성 강조

사법 정의 무너지면 모든 것 잃어

헌법재판소 재판정 내부. 내부 공간이 신성한 교회처럼 연출되어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헌법재판소 재판정 내부. 내부 공간이 신성한 교회처럼 연출되어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 장면. 이 또한 신성함을 연출해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 장면. 이 또한 신성함을 연출해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나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안에는, 재판관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 ‘10개의 빛의 계단’이라는 하동철의 작품이 걸려있다. 생명의 근원인 빛을 10개의 화폭에 표현하여, 사람들에게 희망과 자유 그리고 궁극적인 평화를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이곳의 법적 판결은 하늘에서 내리는 빛처럼 밝고 투명하길 염원하는 듯하다.

헌법재판소 안에 설치된 하동철의 작품 '10개의 빛의 계단'. 헌법재판소 홈페이지 갈무리.
헌법재판소 안에 설치된 하동철의 작품 '10개의 빛의 계단'. 헌법재판소 홈페이지 갈무리.

헌법재판소가 2016년 말부터 뜻밖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영상 매체를 통해 자주 보였던 대심판정 내부 모습이 흥미롭다. 정면에 앉아있는 아홉 명의 재판관이 길고 수려한 가운을 입고 있는데, 마치 교회 강대상에 성의를 입고 있는 목사 같다. 재판관은 청중들을 마주보고 앉아 있는데, 예배를 집례하는 목사가 마치 성도들을 대면하고 있는 듯하다. 내부 디자인도 꼭 교회 같다. 헌법재판소장은 마치 담임 목사처럼 정 중앙에 앉아 있다. 그분 머리 뒤에는 무궁화 안에 ‘헌법’이라고 적어놓은 휘장이 걸려있는데, 교회 강대상 뒤에 십자가가 걸려 있는 것이 연상된다.

이렇게 헌법재판소의 심판정은 그 분위기가 전통적이고 신성한 교회 같다. 이곳은 국가의 법 중에서 기본이며 으뜸인 헌법을 기준으로 삼고, 우리 사회에 발생한 분쟁을 올바르게 해결하는 곳이기에 진중함이 느껴져야 하는 곳이다. 헌법은 여러 하위 법령들 위 최고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든 법의 근간이 되기에 거의 신격(divinity)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라엘 “재판은 하나님의 지혜”

고대 이스라엘에도 이런 대심판정 같은 곳이 있었을까?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혜를 부여 받아 사법적 권한을 행했던 왕, 솔로몬은 특별한 재판정이 있었다. 그리고 재판정의 “마루를 모두 백향목으로 깔았다”고 한다.(열왕기상 7:7) 귀한 자재인 백향목으로 깔았다는 것도 신적 지혜로 판결하는 그 곳의 권위를 높이려 했던 의도였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대심판정 내부 목재도 전부 최고급 백두산 홍송(紅松)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솔로몬의 재판정은 굳이 인테리어를 통해 법의 권위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심 때문이다. 그들은 재판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이루어 졌다고 믿었다.(3:28)

이처럼 사법(司法)은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재판을 존중하고 따를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정神政ㆍtheocracy)’을 믿었다. 그래서 법정의 무게감 있는 인테리어가 딱히 필요하지는 않았다. 법의 판결을 하나님의 지혜로 한다는데 누가 감히 그 권위를 무시하겠는가? 당시 법정에 서서 모르쇠로, 혹은 기억나지 않는다며 무조건 잡아떼는 건 웬만큼 간이 크지 않으면 할 수 없던 일이었다. ‘헌법’이 새겨진 휘장 아래에서 그리고 가운을 입은 재판관 앞에서 판결 받는 정도가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재판 받는 다고 믿었다.

“법정에선 하나님 앞에 선 듯 말하라”

구약성서의 법에 이런 조항이 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돈이나 물품을 보관하여 달라고 맡겼는데, 그 맡은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에, 그 도둑이 잡히면, 도둑이 그것을 갑절로 물어내야 한다. 그러나 도둑이 잡히지 않으면, 그 집 주인이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그 이웃의 물건에 손을 댔는지 안 댔는지를 판결 받아야 한다.”(출애굽기 22:7-8) 여기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성소 안이나 종교 지도자 앞에서 심판받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교회에 와서 목사나 신부 앞에서 판결 받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는 교회나 목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대변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1537년 작품 '솔로몬의 재판'. 이스라엘은 재판이 곧 하나님의 것이라 생각했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1537년 작품 '솔로몬의 재판'. 이스라엘은 재판이 곧 하나님의 것이라 생각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전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성소에 서서 재판 받기를 기다리는 어느 한 피고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주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시편 26:1) 이 노래를 하는 자는 성소에 잡혀갔지만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였고, 그날 밤 아마도 풀려나 집에 돌아와 이와 같은 감사의 노래를 지었을 것이다. 자신의 죄를 토로하지 않은 ‘모르쇠’의 고통을 들어보자.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습니다.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 가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32:3-4)

“세력 없는 이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라”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는다는 믿음은, 법정이 내린 의결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 할 수 있었다. 대심판정 안에 걸려있는 ‘10개의 빛의 계단’도, 디자인으로나마 헌법재판소의 신격(?) 권위를 나타내려 한 것은 아닐는지. 법정에 서는 피고인뿐만 아니라, 재판관들에게도 그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특별히 재판관들에 관하여 이렇게 당부했다. “당신들 동족 사이에 소송이 있거든, 잘 듣고 공정하게 재판하시오. 동족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동족과 외국인 사이의 소송에서도 그렇게 하시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재판을 할 때에는 어느 한쪽 말만을 들으면 안 되오. 말할 기회는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주어야 하오.”(신명기 1:16-17)

법정에 준엄한 인테리어가 없어도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믿음은 재판관으로 하여금 ‘잘 듣고 공정하게 재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독히 민족주의적인 나라였기에, 외국인이나 이민자가 법정에서 부당한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권력을 오용하고 갑질을 일삼는 ‘세력이 있는 사람’도 법정에서는 공정한 기회만 주어져야 했다. 이 모든 명령은 법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그들의 신앙에 근간하여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던 예언자 아모스는, 정의를 내동댕이쳤던 이스라엘 사법을 무섭게 질타했다. “너희들이 저지른 무수한 범죄와 엄청난 죄악을 나는 다 알고 있다. 너희는 의로운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법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였다.”(아모스 5:12) ‘법정’과 ‘뇌물’, ‘세력 있는 자’. 3,000년 전 멀리 중동 땅에서 들려졌던 말인데 어찌 이렇게 낯설지 않을까?

아모스는 이렇게도 말했다. “너희는 공의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며,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치는 자들이다.”(5:7)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2:7)

예수도 법을 완성하고자 왔다

아모스가 당시 사람들에게 느닷없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 사회에 돌고 있던 격언에는 이미 이런 말이 있었다. “악인은 가슴에 안겨 준 뇌물을 먹고서, 재판을 그르친다.”(잠 17:23)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에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일은 옳지 않다.”(18:5) 읽다 보니 참 소름 돋는다. 전혀 3,000년 전 그 땅을 향한 경고로만 들리지 않아서다. 심지어 왕궁에서 섬기던 엘리트 예언자 이사야도 이렇게 소리쳤다. 지금으로 보자면 청와대 조찬 기도회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이다.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나의 백성에게서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였다.”(이사야 10:2)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 ‘법 앞에 만민은 평등하다’라고 적혀있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 ‘법 앞에 만민은 평등하다’라고 적혀있다.

성경에 비추어 보자면, 법은 신격의 권위를 지녔다. 구약성서와 유대교의 핵심이 법이기도 하다. 신약성서와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도 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다.(마태복음 5:17) 올바른 사법이 종교적 완성으로 여겨질 만큼, 법은 신성하다. 올바른 사법이 인간의 구원에 견주어 질 정도다. 그래서 법의 정의가 무너지는 것은, 신앙인이 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충격이다.

우리 사회의 법적 정의는 대한민국 국민의 신앙이다. 우리 사회의 사법 정의가 무너지면 우리에겐 국가를 잃는 것과 같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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