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연인이다’ 성우 정형석
영화 ‘나를 찾아줘’에 캐스팅
“스케줄 없을 때는 오디션 봐요”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오디션 보러 다녀요.”
최근 서울 여의도동 KBS본관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라디오드라마 ‘행복한 이기주의자’ 녹음 중이던 성우 정형석(44)은 “요새 바쁘시죠?”라는 질문에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배우 이영애의 스크린 복귀작 ‘나를 찾아줘’에 캐스팅 돼 촬영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대뜸 “목소리로요?” 했더니 “아니요. 극중 민박집 주인으로요” 한다.
정형석이란 이름만 들으면 ‘누구지?’하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종합편성채널 MBN ‘나는 자연인이다’의 성우라고 소개한다면, 무릎을 딱 치는 시청자들이 많을 것이다. 정형석은 2012년 ‘나는 자연인이다’의 내레이션을 맡은 이후 7년 간 마이크 앞을 지키고 있다. 원래는 7회 정도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이 나간 뒤 시청률이 3%대가 나오면서 정규 편성됐다. 현재 ‘나는 자연인이다’는 6%대의 시청률을 보이는 인기 프로그램. “이렇게 많은 분들이 보실 줄도, 장수할 줄도 몰랐다”는 정형석은 “그만큼 세상살이가 각박해지니까 자연에 힐링하고 싶은 사람들의 본능이 시청률에 반영된 게 아닐까”하고 말했다.
시청자와 대화하듯 친근하게 다가오는 ‘나는 자연인이다’ 내레이션은 특별하다. 여타 다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과 달리 내레이션에 ‘허허허’하는 웃음 소리나 ‘와~’ ‘어머나’ 등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틀을 깬 ‘정형석 스타일’이 만들어낸 수확이다. 오죽하면 ‘나는 자연인이다’를 패러디 한 MBC ‘무한도전’ 등 예능 프로그램이 앞다퉈 그를 섭외했을까. 그의 독특한 내레이션 방식이 예능과 만나 의외의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의 노하우가 있는 걸까. “리얼리티한 현장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원고를 미리 받지 않고, 바로 가서 읽는 편입니다. 사람을 처음 만나는 순간의 설렘과 기대감을 시청자들과 똑같이 공유하고 느끼는 겁니다. 계산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생동감을 전하는 게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의 묘미죠.”
사실 그의 출발은 성우가 아니라 배우였다. 재수시절을 보낸 그는 한 전문대의 비서과에 입학했다. 정원 120명 중 남자만 7명이었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그 때 연극동아리에 들어갔다.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고 연극동아리에서 살다시피 했다. 선후배들과 서울 대학로에 연극 보러 다니며 연기와 작품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 많았다. 결국 1년여 만에 학교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예대 연극과에 다시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연극배우로 무대에 섰고, 뮤지컬 ‘난타’를 만나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다녔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할 당시 ‘이젠 무얼 하지?’하는 느닷없는 공허함이 찾아왔다. “마음의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고.
평소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자주 하던 한 선배가 성우를 추천했다. 6개월간 ‘성우 아카데미’를 다녔다. 2006년 KBS 32기 공채 성우로 단번에 합격했다. 당시 남자 성우의 경쟁률은 700~800대 1이었다. 여자 성우의 경우는 더 높았을 정도로 만만한 시험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합격통지서를 받고 KBS 전속 성우가 됐지만 녹록지 못한 생활이 이어졌다. 정형석은 “오랜 기간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전속 기간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처음에는 원고를 한 음절도 못 읽었거든요. 방송 제작진이나 선배들에게 ‘연습하고 와’ ‘왜 그렇게 못 읽어?’라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심각할 정도로요. 원고를 보고 읽는대도 다음 단어가 눈에 안 들어오는 겁니다. 아주 죽을 맛이었죠.”
배우 생활을 했던 게 약이 됐는지 라디오드라마는 그나마 6,7개월 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내레이션을 맡은 건 2년이나 걸렸다. 현재 KBS 성우 전속기간은 2년이지만 당시만 해도 3년. 그는 불과 1년을 남겨 놓고 내레이션을 맡을 수 있었던 셈이다.
그랬던 그에게 희망의 빛이 내려왔다. 라디오 DJ 자리를 제안 받았다. 2015부터 2년간 진행한 EBS라디오 ‘책처럼 음악처럼’이다. “광고도 없고 게스트도 없는, 오롯이 DJ와 청취자만 있는” 시간을 보냈다. 한때는 성우들이 라디오 DJ를 독식하던 시절도 있었다. 배한성 양지운 등 기라성 같은 대선배들이 활동하던 1980년대였다. 지금 그 자리는 연예인들이 대신한다. 성우에게 라디오를 맡기는 일이 화제가 되는 세상이 됐다.
최근에는 KBS라디오 드라마 ‘행복한 이기주의자’에서 MC 격인 내레이션을 맡았다. ‘행복한 이기주의자’의 김호상 PD는 “정형석의 남다른 공감 능력에 반해 제안했다”고 밝혔다. 정형석과 라디오 팟캐스트를 진행한 적이 있는 김 PD는, 그가 ‘쉽지 않아요’ ‘그래요?’ 등 청취자들의 말과 사연에 귀 기울이며 “쌍방향 교류가 가능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공감 능력은 무대에서 관객들과 호흡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재능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는 여전히 배우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2014년부터 “나이 50이 되기 전에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며 성우와 배우 생활을 병행해 보자”는 다짐을 했다. 영화 ‘약장수’(2015)에 출연했고, 내달 개봉하는 영화 ‘인랑’에서 단역이지만 연기를 펼쳤다. 최근 종방한 tvN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도 깜짝 등장했다. 극중 아이유와 이선균이 자주 가던 술집 사장 역이었다. 손에 꼽을 정도로 출연 횟수가 적었지만, 목소리만 듣고 알아봐주는 시청자들도 많았다고. 이 역할은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 됐다. 요새도 직접 영화나 드라마 오디션 현장을 다니며 부딪히는 중이다. 단, 프로필에 성우 경력은 쓰지 않는단다.
“영화 ‘인랑’의 경우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한 역할을 두고 저와 어떤 분이 합격했어요. 며칠 있다가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죠. 그런데 한 달쯤 지나 다시 연락이 왔어요. 총에 맞는 단역을 제안 받았고 즐겁게 촬영했어요. 아, 오디션을 볼 때는 프로필에 성우 경력은 쓰지 않아요. 덧대기가 부끄럽더라고요.”
성우와 배우 중 더 어려운 분야가 있을까. 정형석은 “성우는 10년 이상을 해왔지만 아직도 어렵다”고 말한다. “(머릿속으로)공간을 그려야 하는” 창의력이 더 들어간다.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렇다고 배우가 쉽다는 얘기는 아니다. 경쟁이 치열한 분야라서 기회가 주어지는 시간이 더디다. 그것을 견디고 이겨나가야 “기다림의 미학”을 배울 수 있다. “성우는 스스로 분석해서 파고들어야 하는 직업이에요. 배우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고요. 뭐 하나 쉬운 게 없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 행복이죠.”
정형석은 멋진 ‘이중생활’을 하는 만큼 성취감도 두 배다. “라디오 드라마를 하거나 다큐멘터리 방송 내레이션을 하는 모든 작업들이 포근하고 따뜻합니다. 목소리만으로 대중과 연결된다는 점도 매력적이고요. 영화와 드라마는 현장성이 있어서 스스로 살아있다는 기분이 느낄 때가 많아요. 어떤 분야가 더 애정이 가느냐고요? 그런 건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 부끄럽지 않게만 살자’고 다짐하고 있어요. 멋있게 살고 싶거든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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