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담판’으로 불린 6ㆍ12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세계적 관심에도 불구, 발표된 트럼프-김정은 공동성명은 평범하고 추상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4개 항의 문장에 머물렀다. 기대가 컸던 이들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속담을 저절로 떠올렸을 법하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극찬하며 새 역사를 썼다고 연일 자찬이다. 하지만 국내 보수 세력과 미국 조야에서는 김 위원장에게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라는 선물만 안기고 트럼프 대통령은 챙긴 게 없다고 강한 비판을 내놓고 있다. 싱가포르 현지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며 방송해설과 한국언론재단 주최 포럼에 참석한 김준형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교수를 회담 다음날인 13일 만났다. 그는 연초부터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 대전환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_북미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실망감이 크다. 특히 미국 언론 등의 비판이 상당하다. 이번 회담의 의미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가.
“엄청난 역사적 변화다. 한반도의 긴장과 대립을 해소하고 평화적 국면으로 가는, 이른바 분단체제 또는 냉전체제를 극복하는, 판 자체가 바뀌는 전환점이다. 북미 70년 적대관계가 해소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합의하거나 협의하는 레벨이 낮았는데 최고 권력자가 결단하고 약속하고 합의 서명했다. 결과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런 판 자체가 처음이다. 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전격적인 변화다.”
_하지만 공동성명에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가 포함되지 않아 비판이 적지 않다.
“사실 저는 공동성명 서명이 없을까 봐 걱정했다. 두 정상의 서명은 굉장히 중요하다. 형식과 내용이 다 담기면 더할 나위 없지만 이번에 적어도 형식에서는 새로운 전기를 열었다. 그 중요성과 의미를 절대 가볍게 볼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워낙 얘기를 많이 했고, 6월 12일까지가 너무 길었다. 극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그 내용도 극적으로 하루 아침에 비핵화와 체제보장이 될 것처럼, 심지어 북미 수교가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가 있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실망스럽지만 역사적인 규모는 절대 간과할 수 없다.”
_여차하면 회담장에서 박차고 나오겠다던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결과에 만족스러워 하는 데는 공동성명에 담기지 않은 이면 언질이나 부속합의가 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초기 조치(Front loading) 논의나 타임라인, 사찰 범위에 관한 어느 정도의 합의 등이다. 미국이 원하는 수준에 가깝게 북한이 사찰 받을 준비가 돼 있다는 부분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얘기한 전부는 아니라 해도 초기 진정성을 보여줄 핵 물질, 핵무기의 폐기 또는 반출도 있을 것이다. 타임라인은 미국과 2년 내에 끝내자, 그 부분이 들어갔을 거라고 본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ABC방송,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북한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후속 조치에 들어갈 수 있다고 기대를 표명했다. 이면합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는 힌트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다음 주에 협의한다는 것도 그렇고.”
_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나라 지도자를 높게 평가하거나 칭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문데 이번에 최상급 언어로 여러 차례 김 위원장을 칭찬했다. 김 위원장의 어떤 면모가 그로 하여금 그토록 ‘김정은 사랑’에 빠지게 했을까.
“트럼프는 스트롱맨 리더십이다. 군림하고 참모 말 뒤엎고 카리스마 있고 권력을 발휘하는 점에서 김정은과 굉장히 비슷하다. 적대관계였을 때도 김정은에 대해 ‘man of honor’이라고 얘기 한 적 있다. 기본적으로 강한 리더십에 대한 특별한 관심 또는 선호가 있는 것 같다. 또 하나, 트럼프가 계속 강조하는 게 김정은을 아무도 못 만났지 않느냐, 자기가 처음이라는 거다. 자기니까 만날 수 있다는 희귀성, 이게 중요하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뭔가 언질을 받았거나 감을 잡았을 것이다.”
_김 위원장을 4ㆍ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이번도 보니 내공이 만만치 않게 느껴지던데.
“국제정치는 윤리적, 이상적으로 바라보면 어려워지고 개인 덕성이나 인성으로 지도자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곤란함이 생긴다. 미국이 그렇다. 북한을 악마화하면 국가 대 국가 협상이 안 된다. 이런 부분을 상쇄시킬 수 있다면, 그런 부분을 제쳐 놓으면 김정은은 완전히 전략적인 사람이다. 전략적 훈련과 재능을 갖고 있다. 또 북한은 1인 체제의 제도화가 돼 있다.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은 지도자로 자리를 잡는 데 20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노하우와 시스템이 김정은을 빨리 능력이 탁월한 지도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北 경제개혁과 인권문제 개혁 시작하면 성공할 가능성 커 다시 핵으로 돌아가지 않게 도와야 인권문제는 시차 두고 거론 필요 #쟁점 된 ‘한미연합훈련 중단’ 한미동맹이 우리에 중요하지만 美가 상수가 되는 건 바람직 안해 트럼프가 우리 부담 덜어준 측면도_북한이 그렇게 어렵게 개발한 핵을 포기하겠냐는 의구심이 많지만 핵 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일련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쉬워진다.
“비슷한 논쟁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북한 핵 개발이 협상용인지 보유용인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진보는 협상용이라고 해서 포기 가능성이 있다고 봤고, 보수는 절대 포기 안 한다고 했다. 자연스러운 논쟁이지만 지나치면 프레임이 된다. 극한으로 끌고 가면 북한이 어떤 경우에도 포기 안 한다는 프레임이 다시 작동을 하는 거고, 협상용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언제든 포기할 수 있다고 한다. 저는 이 순간, 이 조건에서는 포기가 진심이라고 본다. 그 조건이 달라지면 전략적 마인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속임수, 포장, 시간 끌기는 아닌 것 같다.”
_김 위원장이 나름대로 경제발전 구상이 있을 텐데, 뜻대로 경제발전이 잘 되면 핵 개발 하라고 해도 안 할 것이다. 하지만 잘 안 되면 원인을 다시 외부로 돌리면서 핵으로 돌아갈 욕구가 커지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북한 비핵화의 키는 내부 프로세스, 즉 내부 경제발전에 달려 있지 않은가 싶다. 외부세계가 CVID에 매달릴 게 아니라 김 위원장의 경제발전 구상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게 비핵화의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얘기다. 하지만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경제발전에 문제가 있다 해서 핵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해결 안 된다. 경제발전 실패와 핵으로의 회귀를 바로 연결 짓는 것은 정확한 비교가 안 된다. 두 번째는 경제개혁을 시작하면 성공 가능성 많다. 김정은도 그렇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지난 6~7년 동안 인프라를 깔아 놨기 때문에 상당 기간 성공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안정기라서 1~2% 성장밖에 못하지만 북한은 심한 제재 속에서도 한국은행 통계로 5~6%를 성장했다. 나중엔 문제 생겨도 지금은 오히려 속도조절이 필요하지 처음부터 실패하긴 힘들다. 나중에 실패해서 10년 후쯤 핵개발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해도 그때는 상당부분 비핵화가 진행된 상태여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기 어렵다. 즉 비가역적이라는 뜻이다.”
_북한 체제는 경직적인 집단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중국과 베트남은 당이 국가를 영도하는 틀만 유지하고 집단주의를 포기했지만 북한은 그럴 조짐이 아직 없다. 경제개혁이나 발전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북한이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나라여서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 중국, 러시아와는 다르다. 상당히 안정적으로 속도조절이 가능할 것이다. 은행 시스템이나 전산화를 통해 자금 흐름을 관리할 수 있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전주(錢主) 등 부자들의 출현, 부정부패 심화 등으로 부의 불평등이 생기면서 체제 불안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체제 불안 요인이 되기 전에 싹을 자를 거다. 금융 전산화 등을 통해 돈 흐름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을 거고, 국경지역 중심으로 밀수, 뇌물수수 등 부패가 많겠지만 500개 넘는 장마당을 관장하는 유산계급이 당분간은 체제 도전보다는 편승해서 갈 거라고 생각한다.”
_인권 문제도 부각될 것이다. 인권이 인류 보편의 가치라지만 개인주의적 관점의 가치다. 북한은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고 집단주의를 체제구성 원리로 삼는다. 북한 인권문제는 상당 부분 그 같은 체제 속성에서 기인하다. 인권 문제를 정면 거론하면 체제 부정이 된다는 딜레마가 있다.
“집단주의 측면도 나아질 것이다. 헬싱키 프로세스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게 있다. 시차를 두고 추진하는 것이다. 보수 정부는 인권만 강조했고, 진보 정부는 불가침과 교류협력을 중시했다. 이 세 가지에 순서가 있다. 헬싱키 프로세스는 초기엔 소련 인권 문제에 사하로프 망명 등 몇 가지 가시적 조치를 요구했다. 북한도 관리적 차원에서 초기에 상징적 조치를 보여주고, 불가침과 교류 협력이 심화한 다음에 인권 요구 수준을 올리는 순서로 가야 한다.”
_한미연합훈련 중단 문제가 큰 쟁점이 됐다. 훈련은 북한에도 위협이 되지만 중국 러시아에도 메시지를 주는 게 크다. 미-중러 패권 경쟁 차원에서 어려운 문제 같은데 어떻게 풀어야 하나.
“저도 기본적으로 중국 위협론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중국이 세계를 이끌 소프트 파워가 부족한 상황에서 우리가 지리적으로 붙어있다는 것은 큰 위험이다. 근데 두 가지 측면서 다른 게임을 해야 한다. 북한은 중국 의존도가 너무 커서 자기 레버리지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최근 들어 중국에 접근하는 건 미국과의 협상을 의식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은이 상당히 뛰어나다. 우리도 지나치게 친미였기 때문에 사실상 힘을 발휘 못했다. 그런데 남북이 이렇게 가까워지니까 위상이 커졌다. 미중 사이에서 주도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미동맹이 중요하지만 전적으로 미국이 상수가 돼 있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변화를 시작하는 트럼프가 우리 부담을 덜어준 측면이 있다. 우리의 일방적 구애가 아니라 미국이 필요해서 오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_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자위를 위한 대체 무력이 있어야 하는데 생화학무기에 의존할 수도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핵 문제 해결되면 당장 생화학무기 문제 들고 나올 것이다.
“북한이 정권 유지 위해 그걸 가져야 한다는 논리로 가면 해결점이 없다. 북한은 핵이 없으면 남한이 겁날 거다. 바로 남북 공동성명에 제일 먼저 나왔던 게 사실상 남북 간 군사충돌 방지다. 북한의 핵 포기를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북한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장치, 다자체제나 6자회담을 발전시켜 그런 조약을 맺어야 한다. 가능한 많은 방법과 시스템으로 북한의 체제안전을 보호하는 것은 북한만을 위하는 게 아니다.”
_지금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중에 트럼프가 제일 강하지만 제일 약하기도 한 것 같다. 그러니 김 위원장이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주문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가 현 기조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저는 김정은 위원장이 이미 했다고 본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회담 전날까지 CVID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정상회담 이후 그 표현이 안 들어간 공동성명에 사인했다. 트럼프가 확실하게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초기 조치 등에 대한 확실한 언질이 있었을 거다. 그렇다면 고삐를 늦추지 말고 바로 가야 한다. 세 사람은 한 배를 탔다. 적어도 지금은. 따라서 새로운 체제로 넘어가는 데 있어서 3인이 상대방의 입지를 고려하면서 동반자적 관계를 중시했으면 좋겠다.”
3인 지도자들이 각자 상대 국가 내부 반대세력의 비판과 공격을 견딜 수 있도록 선제적 조치를 통해 도와주어야 한다는 당부다.
싱가포르/ 인터뷰=이계성 논설고문 wkslee@hankookilbo.com
정리=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김준형 교수는]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의회 산하 평화재단 연구원 등을 거쳐 1999년부터 한동대 교수로 재직하며 한미관계, 국제관계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정책평가위원회 외교안보분과 전문위원으로 활동해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 방향과 외교안보 철학을 꿰뚫고 있다. 4ㆍ27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자문단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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