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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좇는 과학적 열망이 민주주의 사회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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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좇는 과학적 열망이 민주주의 사회를 발전

입력
2018.06.15 04:4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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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15일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이 합숙토론회를 끝낸 뒤 폐회식에 참석하고 있다. '원전 마피아'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취지에서 가동된 공론화위원회는 흔들리는 과학을 상징하는 것일까.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10월 15일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이 합숙토론회를 끝낸 뒤 폐회식에 참석하고 있다. '원전 마피아'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취지에서 가동된 공론화위원회는 흔들리는 과학을 상징하는 것일까. 한국일보 자료사진

“포스트모더니즘은 결코 한 발 이상의 총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 한 발의 총알은 ‘회의주의’라는 총알인데, 그 강력한 한 발은 튼튼하고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과학의 성벽을 무너뜨려 도시의 뒤죽박죽인 거리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하지만 회의주의를 계속 키워 갈 수는 없다. 회의주의는 무너뜨리기는 하지만 다시 짓지는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자들이 선택한 표현이 ‘선택적(Elective) 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다음의 모더니즘으로 말이다. ‘선택적’이라 해서,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내 마음에 드는 걸 골라잡는 것이라기보다는, 뭔가 고심한 뒤 신중히 고르는 듯한 느낌이 더 강하다고 보는 게 좋겠다.

영국 과학사회학자인 두 저자가 이 용어를 만들어낸 건 이런 판단 때문이다. “뒤죽박죽이지만 중요한 도시를 버리거나 오래된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리지 않고는 전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 과학에 대한 인식이 위기라 본다는 얘기다. 이 시대 과학에 대한 인식이 진짜 위기인가, 아니면 배부른 부자의 앓는 소리인가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접어두자. 이 책, 그리고 우리의 관심사는 이들이 과학의 경계선을 어떻게 솜씨 좋게 재구축하느냐는, 논리의 문제니까. 이들이 취한 방법은 허리띠를 느슨하지만, 분명하게 다시 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일단 ‘과학주의 매파’의 길을 거부한다. 과학을 옹호하기 위해 “팝스타 같은 과학자들”을 만들어내거나 “다윈을 신으로 모시며 요란한 지지”를 받아낼 필요도 없다. “위대한 종교들의 리더십을 박탈하고 도덕철학에서의 공백을 채우겠다고 공언”하거나 “종교 재판하듯 과학적 이단을 맹공격”할 이유도 없다. 저자들은 이런 접근법을 “과학을 종교에 적대적으로 대비시켜 정치적 자본을 만들어내는 미국식 해법”이라고 은근히 깎아 내린다. 이런 접근법을 즐겨 써서 ‘전투적 무신론자’라 불리는 리처드 도킨스가 영국 사람인걸 떠올려보면 그 은근함이 웃기기까지 한다.

저자들의 해법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면 그렇게 믿게 내버려두라’, 그 뿐이다. 하기야 어쩌겠나. 다 큰 어른들이 그렇게 믿고야 말겠다는데. 조건은 딱 하나다. 대신 과학이라 해서는 안 된다. 창조론을 믿는 건 자유지만, 그걸 창조과학이니 지적설계론이니 하면서 과학인 것처럼 위장하는 건 속임수요 반칙이다. 과학이 창조론에 대한 믿음을 비난하지 않듯이, 다른 영역에 속한 별개의 일들이니 경계선만 명백히 그어주면 된다.

과학 입장에서 더 골치 아픈 건 사실 앞서 언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공세다.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는 명확하다. 갈라주면 된다. 하지만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토머스 쿤의 연구 이후 과학에 드리워진 성대한 장막을 열어 젖히고 보니 그 무대 뒤엔 정밀한 수학과 순수한 열정 같은 것만 있는 게 아니라 권력, 자본, 암투에 휘둘리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이런 게 과학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왜 과학에 우선권을 줘야 하는가. 이런 불만은 사실 충분히 이해되는 구석이 있다. 정치적 편향, 경제적 이해관계, 개인적 오호감정에 따라 이론을 구부리는 이론가들을 그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말이다.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 해리 콜린스 등 지음ㆍ고현석 옮김 이음 발행ㆍ252쪽ㆍ2만2,000원

저자들은 그래도 과학은 보편적 진실을 향해 뻗어 있다는 점에서 양해를 받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남달리 과학자들만 보편적 진실을 찾았다거나, 알 수 있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다. 포인트는 과학자들이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은 늘 반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실에 대한 관찰을 앞세우며, 모호하지 않고 명확한 태도를 지니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들은 이를 ‘형성적 열망’이라 부른다. 비록 현실에선 권력과 돈과 인간관계에 때론 휘둘리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신의 위대함을,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저쪽 사람들의 비열함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얘기다. 우리는 그들, 과학자들의 설명이 전적으로 옳기 때문에 무조건 추종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노력을 존중하기에 선택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선택이 무엇이든, 그 선택은 가능한 가장 좋은 증거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학과 민주주의는, 전문가와 대중은 충돌하지 않는다. 아니 충돌하지 않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과학을 내세운 전문가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과학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제껏 많았다. 이 책은 거꾸로 ‘민주주의에 과학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에는 과학이 어울린다’고 외치는 셈이다. 이쯤이면 의심이 솔솔 풍긴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의 과학 비판은 오래 묵은 난제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과학을 부정하는 과학’이라서다. 이 때문에 김경만 서강대 교수는 미국의 포스트 이론가 리처드 로티를 두고, 뒷문으로 지식인의 특권을 되살려 놓았다고 맹비판하기도 했다. ‘선택적 모더니즘’도 뒷문으로 과학의 특권을 되살려놨을 뿐일까. 200여쪽의 짧은 분량에 칼 포퍼에서 시작되는 과학철학, 존 듀이와 월터 리프만의 대중 논쟁, 위르겐 하버마스의 숙의 민주주의 등 차려 놓은 밥상이 풍성하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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